책사랑 355

한절마(大寺洞) 큰절(大寺)이 남긴 보물 ‘석조여래입상’

우리고장 우리마을 숨겨진 보물을 찾아서[21] 한절마(大寺洞) 큰절(大寺)이 남긴 보물 ‘석조여래입상’ 1914년 도리이류조가 촬영한 석조여래입상. [통일신라-1917]. 당시 영주면 가흥리(현 영주교육청) 한절마 앞에 서있던 석불의 모습이다. 1933년 일제 때 촬영. 1917년 영주-예천 간 도로공사로 영주초 앞으로 옮겼다.[1917-1971] 1971년 도시계획으로 가흥리(구 공공도서관)로 옮기면서 보호각을 지어 그 안에 보존하고 있다. [1971-현재] 1915년 영주 가흥리 출토 동제종. 국립대구박물관 소장 동제종 도면. 옆면에 덕산사(德山寺) 명문이 새겨져 있다. 한절마에서 발견되어 영주동으로 갔다가 다시 현 위치로 옮겨 통일신라 당시 영주지역만의 독특한 특징이 잘 나타난 불상 돌에 새긴 신라..

사서(史書) 기록상 영주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 ‘죽령(竹嶺)’

우리고장 우리마을 숨겨진 보물을 찾아서[20] 풍기읍 수철리 가장 오래된 보물 ‘죽령’ 위 사진은 1912년(108년전) 죽령 모습이다. 사람이 걸어 다니거나 말이 다닐 수 있는 길 뿐이다. 서기 158년 죽죽이 죽령을 개척한 후 1934년 자동차길이 열릴 때 까지 1800년 동안 옛 모습을 간직한 죽령고갯길의 모습이다.-무명 한복을 입은 보부상이 등짐을 지고 고개를 넘고 있다. 우측 너와집은 희방사역에서 쳐다보는 백룡사의 전신(前身)이다. 1900년경 죽죽의 사당 터에 백룡사가 창건되었다고 전한다. 사진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유리건판 사진자료 현재 죽령 모습(2020). 죽죽을 모신 죽죽사 터(竹竹祠址)에 지금은 장승이 서 있다. 죽령로 길가에 홀로 외로운 ‘퇴계선생 죽령유적비’ 수철리에서 바라 본 죽령..

광승마을 「송상갑(야성인) 고택」 궤짝에서 나온 ‘근대사’

우리고장 우리마을 숨겨진 보물을 찾아서[19] 휴천동 야성송씨 고택 궤짝에서 나온 보물 1881년 광승에서 태어나 강명학교·영흥야학·신간회 활동 주역 1919년 일제가 군 관아를 헐 때 자재모아 성저에 33칸 한옥신축 1934년 공회당을 극장으로 개조-최초 영주극장(현 분수대) 개관 근대사 보물을 간직한 궤짝 광승마을 출신 송재승(75,야성인) 향토사연구가는 영주시민신문 애독자다. 신문을 받으면 먼저 ‘숨겨진 보물을 찾아서’를 본다는 송씨는 ‘우리 집에도 숨겨진 보물이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다가 어느 날 창고에 숨겨둔 할아버지의 궤짝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며칠 뒤 기자에게 문자를 보냈다. 「영주시민신문에 연재되는 ‘숨겨진 보물’에 자극받아 창고에 숨겨 두었던 할아버지의 궤짝을 뒤져서 근대사 사진,..

퇴계가 평생 공부한 것을 거르고 짠 결정체 「성학십도」

숨겨진 보물을 찾아서[18] 소수박물관 소장 ‘성학십도’ 성학십도-소수박물관 1층 기증유물전시실 성학십도 병풍-소수박물관 새로 지은 이산서원-이산면 석포리 이산서원 구지 (남간로 세영첼시빌 101동 앞 50m 지점) 괴헌고택 ‘고물’-성학십도 보관창고(상단 액자 뒤) 퇴계가 성리학 기본개념을 열장의 그림에 담아 선조에게 올린 글 소고가 황해도관찰사로 있을 때 경비마련-이산서원에서 목판 새겨 그 속에 ‘선비정신의 핵심’이 들어있어 ‘영주 선비들이 꼭 읽어야’ 1568년 겨울, 퇴계(退溪) 이황(李滉,1501-1570)이 68세 때 그동안 자신이 익힌 성리학의 기본개념을 열장의 그림에 담아 17세 어린 왕 선조에게 올렸다. 성군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그리고서 452년이 지났다. 현대를 사는 우리가 ..

문수암 절벽에 아슬아슬 걸터앉은 ‘문수사(文殊寺)’

우리고장 우리마을 숨겨진 보물을 찾아서 [17] 문수면 월호리 ‘문수사’ 신라 때 창건한 방석사지(放石寺址)에 세워진 절집 처음 보는 순간 아슬아슬한 절집구조에 놀라기도 옛 방석사 보물들, 화단·돌담·계단·절간으로 흩어져 문수면 월호3리 문수사 전경 방석산 문수사 방석마을 표석 문수면 방석마을 문수사 문수사(文殊寺)는 문수면 월호3리 방석(放石) 마을에 있다. 영주에서 내려가는 서천과 봉화에서 흘러 온 내성천이 합류하는 지점에서 서북쪽 방향 산속에 숨어 있다. 옛 승문역 노트리 승강장에서 강 건너 산등성이에 위치한 문수사는 꼬부랑 산길을 돌고 또 돌아야 겨우 찾을 수 있다. 좀 더 자세히 안내드리면 문수면소재지에서 문수역 앞을 지나 서천 강변도로를 따라 무섬방향으로 간다. 학가산을 바라보며 남쪽으로 뻗은..

6.25 때 희방사와 함께 불타버린 잃어버린 보물 ‘월인석보’

우리고장 우리마을 숨겨진 보물을 찾아서[16] [탐방일:2020.7.30] 풍기읍 수철리 희방사 월인석보 월인석보, 한글창제 후 불교서적을 최초 한글로 번역한 책 1459년 초간본 발행 후 1568년 희방사에서 복각-인쇄-보급 잃어버린 목판 복각 위해 영주시와 시민들이 뜻을 모아야 희방사 전경 우리고장 희방사에는 부처님 일대기를 새긴 월인석보(月印釋譜) 목판과 그 판본(목판으로 인쇄한 책)을 소장하고 있었다. 조선 때 희방사는 ‘월인석보’라는 보물을 소장하고 있어 명성이 높은 사찰로 알려졌다. 그러나 하나뿐인 이 보물이 안타깝게도 6.25 난리 통에 불태워지고 말았다. 그것도 불가항력의 재변(災變)이 아닌 순 인위(人爲)에 의해 소멸시켰으니 애석하다기 보다 너무도 기막히고 어이없는 노릇이다. ‘월인석보’..

1625년 취사 이여빈이 만든 최초의 군지 ‘영주지(榮州誌)’

우리고장 우리마을 숨겨진 보물을 찾아서[15] [탐방일:2020.7.23] 최초의 군지 ‘영주지(榮州誌)’ 취사 이여빈이 평생 독서하고 학문하던 감곡마을(부석면 감곡1리 감실) 취사, 후세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가르쳐 준 선비의 표상 후일 ‘징험할 것이 없어 보지 못했다’는 한탄 면하게 하려함 고려 때 지명 영주(榮州)에서 유래하여 ‘영주지’라 칭했다 취사 이여빈은 누구인가? 이여빈(李汝馪 , 1556-1631)의 본관은 우계(羽溪) 자는 덕훈(德薰)이며, 호는 취사(炊沙) 또는 감곡(鑑谷)이다. 우계이씨가 영남 땅으로 낙남한 것은 8세 퇴은(退隱) 억(薿 )으로부터 비롯됐다. 억은 강계원수로 재임 중 이성계의 명을 받아 요동정벌에 선봉으로 나가 공을 세워 밀직부사에 이르렀으나 고려가 망하자 벼슬을 버..

소수서원에 숨겨진 또 하나의 보물 ‘도동곡(道東曲)’

우리고장 우리마을 숨겨진 보물을 찾아서[14] [탐방일:2020.7.9] 소수서원 향사 때 부르는 ‘도동곡’ 도동곡은 주세붕이 안향을 찬양하기 위해 지은 긴 노래이다 총 9장을 3장씩 나누어 초헌, 아헌, 종헌을 드릴 때 창한다 내용은 주자를 존경하고 안향의 공덕을 찬양하는 것이 핵심 한 선비가 소수서원으로 들어가고 있다. 유생이 문성공묘 앞에서 경독하고 있는 모습 죽계지에 실린 도동곡 소수서원 보존용 도동곡 도동곡을 창하는 모습 도동곡을 창하는 모습 도동곡을 창하는 모습 소수서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 서원으로 한국의 서원을 대표할 뿐만 아니라 국보 제111호 회헌영정과 보물 제1402호 문성공묘 등 보물이 수두룩하다. 또 옛 숙수사지에서 발굴된 보물도 있고, 아직 곳곳에 숨겨져 찾지 못한 보물도 많이..

1953년 소수중 건립 때 학생들이 발굴한 신라불상 25구

우리고장 우리마을 숨겨진 보물을 찾아서[13] [탐방일:2020. 6.25] 순흥 소수서원 내 숙수사지 출토 불상 불상은 당간지주 북쪽 150m 지점 지하 1m 항아리 속에 담겨 교장이 문교부에 안 주고 버티다 중학교 설립인가 받고 넘겨 지금 국립대구박물관 유불관에 전시되어 언제라도 친견 가능 불상 발굴 당시(1953) 소수서원 전경 “여기가 불상이 출토된 곳”(충효교육관 마당) 숙수사는 소수서원 자리에 있던 통일신라 때 지은 절이다. 1953년 소수서원 북쪽 경내에 중학교 건립을 위해 땅을 파던 중 땅속 1m 지점에 묻혀 있던 항아리 속에서 불상 25구가 나왔다. 이 불상 출토에 따른 발굴 이야기 속에는 숙수사 폐사 시기와 소수서원 건립내력 그리고 소수중학교 설립 이야기도 들어있다. 숙수사(宿水寺)… ..

1953년 소수중 건립 때 학생들이 발굴한 신라불상 25구

우리고장 우리마을 숨겨진 보물을 찾아서[13] [탐방일:2020. 6.25] 순흥 소수서원 내 숙수사지 출토 불상 불상은 당간지주 북쪽 150m 지점 지하 1m 항아리 속에 담겨 교장이 문교부에 안 주고 버티다 중학교 설립인가 받고 넘겨 지금 국립대구박물관 유불관에 전시되어 언제라도 친견 가능 불상 발굴 당시(1953) 소수서원 전경 “여기가 불상이 출토된 곳”(충효교육관 마당) 숙수사는 소수서원 자리에 있던 통일신라 때 지은 절이다. 1953년 소수서원 북쪽 경내에 중학교 건립을 위해 땅을 파던 중 땅속 1m 지점에 묻혀 있던 항아리 속에서 불상 25구가 나왔다. 이 불상 출토에 따른 발굴 이야기 속에는 숙수사 폐사 시기와 소수서원 건립내력 그리고 소수중학교 설립 이야기도 들어있다. 숙수사(宿水寺)…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