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고장 우리마을 숨겨진 보물을 찾아서[13] [탐방일:2020. 6.25]
순흥 소수서원 내 숙수사지 출토 불상
불상은 당간지주 북쪽 150m 지점 지하 1m 항아리 속에 담겨
교장이 문교부에 안 주고 버티다 중학교 설립인가 받고 넘겨
지금 국립대구박물관 유불관에 전시되어 언제라도 친견 가능
불상 발굴 당시(1953) 소수서원 전경
“여기가 불상이 출토된 곳”(충효교육관 마당)
숙수사는 소수서원 자리에 있던 통일신라 때 지은 절이다. 1953년 소수서원 북쪽 경내에 중학교 건립을 위해 땅을 파던 중 땅속 1m 지점에 묻혀 있던 항아리 속에서 불상 25구가 나왔다. 이 불상 출토에 따른 발굴 이야기 속에는 숙수사 폐사 시기와 소수서원 건립내력 그리고 소수중학교 설립 이야기도 들어있다.
숙수사(宿水寺)…
소수서원 소나무숲길을 가다보면 높이 3.9m의 당당한 통일신라 양식의 당간지주가 보인다. 이 정도의 당간지주라면 숙수사는 상당한 규모의 사찰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숙수사는 물이 잠드는 절이라고 한다. 이 터는 영귀봉을 제외하고는 평지에 죽계를 끼고 있는 형국이다. 이곳을 감도는 물의 흐름이 너무나도 완만하다. 그래서 마치 물이 잠자는듯하다고 보았던 모양이다. 이 숙수사가 언제 왜 폐사(廢寺)됐는지 이유를 놓고도 여러 설이 있다.
사원(寺院)에서 서원(書院)으로
소수서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으로 숙수사 터에 세워졌다. 절터에 서원을 조영(造營)하였다는 사실은 사원에서 서원으로 옮겨가는 시대적 전환점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결국 숙수사의 폐사는 불교의 퇴장과 유교의 등장이라는 사상사적 교체를 여기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조선 중종 때 풍기군수로 부임한 주세붕(1495-1554)은 순흥 출신 고려시대 유학자인 안향(1243-1306)을 제사하기 위해 사당을 세우고 나서 1543년 유생들 교육을 위해 백운동서원을 건립했다. 1548년 풍기군수로 부임한 이황(1501-1570)의 요청에 의해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사액을 받았고 국가의 지원도 받게 됐다. 소수서원처럼 옛 절터를 서원으로 사용하게 된 배경은 세속에서 멀리 벗어나 공부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고, 아울러 선현을 모시는 곳이라 산수가 뛰어나고 한적한 곳이 적합했기 때문이다.
‘숙수사지’서 불상 25구 출토
1953년 9월 1일 소수의 전통이 이어지길 바라는 순흥 유림의 전폭적인 지지와 소수서원의 재원으로 소수고등공민학교가 설립됐다.
개교와 함께 소수서원 안쪽 현 충효교육관 자리에 교사(校舍) 신축공사가 시작됐다. 어려운 일은 학부형들이 하고, 대부분 학생들에 의해 공사가 진행됐다. 그해 12월 1일 오후 이날도 학생들이 운동장 정비작업을 하던 중 지하 1m 지점에서 큰 항아리(지름60, 높이75㎝)가 발견됐는데 그 속에서 작은 불상 25구가 쏟아져 나왔다.
학교장의 배짱이 중학교 설립인가?
학생들은 녹슨 불상을 보고 엿장수 생각이 났지만 교장(安勝玉)은 교장실에 보관해 두고 사실을 문교부에 보고했다. 문교부의 지시를 받은 국립박물관(관장 김재원)은 이듬해(1954) 3월 현지답사와 동시 유물인수를 위해 김원룡 학예연구관을 현지에 보냈다.
그러나 영주교육장과 영주경찰서장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안승옥 교장은 유물 인도를 강하게 거절하는 바람에 연구관은 빈손으로 돌아갔다.
안 교장은 “학교 부지에서 나왔으니 학교가 유물을 보관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면서 “문교부가 현 소수고등공민학교를 정식 소수중학교로 승격해 주면 내 주겠다”고 버텼다.
몇 달 뒤 이 유물은 영주 국회의원이었던 이정희 의원의 손을 거쳐 교육부에 넘겨졌고, 학교는 소수중학교로 승격됐다. 당시 지역주민들은 “교장 선생님의 치밀한 작전과 배짱이 정식 중학교 설립인가를 이끌어 냈다”며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그 때 그 불상, 지금 어디에?
1953년 땅속에 묻혀 있다가 세상에 나온 그 불상은 1954년 가마니에 싸여 순흥을 떠나 국립박물관으로 갔다. 그리고 또 40년의 세월이 흐른 후 1994년 12월 7일 국립대구박물관이 개관될 때 대구로 이관됐다.
기자는 지난 6월 12일 국립대구박물관에 갔다. 대구박물관 마당에는 1975년 풍기읍 성내2리에서 발굴된 ‘금동형당간두’가 국기게양대처럼 높이 솟은 당간(幢竿) 위에 복원되어 위엄을 자랑하고 있다. 대단한 재현이다. 당간두를 쳐다보고 나서 전시관 안으로 들어갔다.
이광현 학예연구사의 안내로 2층 유불(儒佛) 전시관으로 갔다. 입구에 서니 멀리서도 안향 영정과 소수서원 현판이 보이고, 그 옆에 숙수사 불상들이 전시돼 있다. 가까이 갔다. ‘작은불상’은 기자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작아보였다. 키가 작은 것은 6.5cm, 가장 큰 것은 17.5cm로 한 손에 잡힐만한 크기다. 숙수사 불상은 6세기 후반에서 8세기에 이르는 시기의 것들이다. 「영주 숙수사 터에서 나온 불상」이란 제목 하에 부처상, 보살상, 반가사유상, 탄생불, 신장상, 공양자상 등 11점이 통유리 안에 전시돼있다. 그리고 좀 더 귀한 평가를 받고 있는 금동보살입상(신라6세기) 1점, 금동보살좌상(통일신라 8세기) 1점, 금동불입상(신라 7세기) 1점 등 3점은 다른 지역에서 출토 된 불상과 함께 별도 전시돼 있다.
발굴 현장에 있었던 박종섭 중학생
1953년 당시 고등공민학교 1학년이었던 박종섭 학생은 비봉산 아래 속수마을에 살았다. 그는 올해 80세로 순흥 유림의 중견(中堅)이 됐다. 기자는 발굴 이야기를 듣기 위해 박종섭 선생께 뵙기를 청했다. 그리고 지난 16일 소수서원 소나무숲길을 같이 걸으면서 시간을 67년 전으로 돌렸다.
박 선생은 “그땐 순흥에 중학교가 없었다. 그러던 중 고등공민학교가 설립되자 200명 넘게 지원했다. 그러나 아직 교실이 없어 명륜당에 80명, 지락재와 학구재에 각각 60명씩 콩나물 교실에서 개교했다. 명륜당은 그냥 마룻바닥에서, 지락재와 학구재엔 외나무다리 같은 의자에 앉아 공부했다. 그리고 일신재는 교무실, 직방재는 교장실로 사용했다”고 했다.
선생은 “그해 가을부터 교실을 짓기 시작했는데 집집마다 서까래 한 두 개씩 가지고 왔다. 학생들이 직접 벽돌을 찍었고, 어른들은 벽돌을 쌓고 지붕을 얹었다”고 말했다.
“불상이 나온 곳이 어디쯤 되냐?”고 여쭈니, “현 충효교육관 뒤 언덕빼기에는 초가집 교실 5칸을 짓고 있었고, 그 앞에 운동장을 만들었다. 그날도 운동장 고르기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높은 곳은 파내고 나무뿌리는 캐내는 일을 했다. 누군가 ‘독이다’라고 외쳐 그리로 가보니 큰 독 속에 푸른 녹이 슨 불상이 수두룩 나왔다. 그 자리가 현 ‘사료관’ 뒷벽쯤이 아닐까 짐작된다. 다음해(1954) 2학년 때 새로 지은 교실로 이사를 했는데 그때는 책걸상이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해 12월 정식 사립소수중학교로 승격됐고, 1956년 2월 우리는 소수중학교 제1회 졸업생(103명)이 됐다”고 말했다.
숙수사 폐사 시기?
참화(慘禍)가 일어나던 날 저 귀한 부처님들을 항아리에 고이 담아 1m 깊이의 땅 밑에 묻었던 이는 숙수사 스님이었을 것이다. 숙수사가 불탄 뒤 그 스님은 어찌되었을까?
불상이 출토된 후 ‘숙수사가 언제 폐사됐는지?’에 대해 관심이 집중됐다. 고려 말 몽고의 침입(1231-1259) 때 폐사됐다는 설이 있는가 하면, 고려 말 왜구의 방화로 소실됐다는 설도 있고, 또 정축지변 때 불탔다는 설도 있다. 한편 대한불교 조계종 모 스님이 쓴 칼럼에는 ‘서원 설립이 아니었다면 숙수사는 지금도 건재했을 것’이라는 설도 있다.
우리고장에서 발행된 숙수사 관련 기록에 보면
안향(1243-1306) 선생 가승(家乘)에 「1257년, 성(城) 북쪽에 숙수사가 있었는데 선생이 젊은 시절 그곳을 오가며 독서했다」는 기록으로 볼 때 이 무렵까지 숙수사가 건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몽고의 침입(1231-1259)으로 폐사됐다는 설은 신빙성이 적다.
부석사개연기(浮石寺改椽記)에 「1357년(왜병) 적병화(敵兵火)로 무량수전 소실」이란 기록에서 이 때 숙수사도 소실된 것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순흥지에 보면 「부사 최해운(崔海雲)이 우왕(1375-1388) 때 부사로 부임했다. 당시 왜적이 객관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최 부사가 날마다 왜적과 전투하여 노획한 마소, 재물, 곡식을 사졸과 백성들에게 주었다」는 기록에서 왜적의 방화설에 한층 무게가 실린다. 또 순흥의 대참화인 정축지변(1457) 때 폐사됐을 것으로 보는 이들도 있다. 어쨌든 참화를 눈앞에 두고 숙수사 스님들이 다급하게 불상을 땅 속에 묻고 절을 떠나는 모습이 영화를 보듯 눈에 선하다.
금동보살입상(신라 6세기)
금동보살좌상(통일신라 8세기)
금동불입상(신라 7세기)
금동여래입상(통일신라 7세기)
금동삼존불(통일신라 9세기)
탄생불·반가사유상(신라 7세기)
금동불입상(신라 7세기)
공양자상·신장상(통일신라 9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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