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고장 우리마을 숨겨진 보물을 찾아서[21]
한절마(大寺洞) 큰절(大寺)이 남긴 보물 ‘석조여래입상’
1914년 도리이류조가 촬영한 석조여래입상. [통일신라-1917]. 당시 영주면 가흥리(현 영주교육청) 한절마 앞에 서있던 석불의 모습이다.
1933년 일제 때 촬영. 1917년 영주-예천 간 도로공사로 영주초 앞으로 옮겼다.[1917-1971]
1971년 도시계획으로 가흥리(구 공공도서관)로 옮기면서 보호각을 지어 그 안에 보존하고 있다. [1971-현재]
1915년 영주 가흥리 출토 동제종. 국립대구박물관 소장
동제종 도면. 옆면에 덕산사(德山寺) 명문이 새겨져 있다.
한절마에서 발견되어 영주동으로 갔다가 다시 현 위치로 옮겨
통일신라 당시 영주지역만의 독특한 특징이 잘 나타난 불상
돌에 새긴 신라인의 염원, 부처의 힘으로 평화로운 세상을 꿈꿔
1915년 ‘덕산사’라고 새긴 동제종 발굴로 한절은 덕산사로 추정
‘영주동 석조여래입상’의 위치
삼판서고택에서 남쪽으로 100여m 내려가면 구 공공도서관 건물이 있다. 도서관 뜰 서편 보호각 안에 모셔진 석불이 ‘영주동 석조여래입상’이다. 1963년 1월 21일 대한민국 보물 제60호로 지정됐다. 석불 이름 앞에 ‘영주동’이라고 붙은 것은 문화재 등록 당시 영주동(영주초 앞)에 있었기 때문이다.
석불 앞 안내판에 「이 불상은 1917년 가흥동 남산들 제방공사 중 발견되어 영주초 앞 도로 중앙에 모셔졌다가 1971년 다시 공공도서관 정원으로 옮기면서 별도 보호각에 보관되어 있다」고 썼다. 불상연구가들은 “이름을 알 수 없는 한 신라시대 폐사지에서 발견된 8세기경의 석조불상”이라고 했다.
석불 발견과 이동 경위
영주가 고향인 사람들은 예전에 영주초 앞 축대위에 우뚝 서 있던 그 석불을 기억할 것이다. 그 석불이 지금 구 공공도서관(세무서 서편) 정원에 있다.
이 석불이 발견된 곳이 ‘남산들’이라고만 했지 정확한 위치를 모르고 있었다.
최근 1914년 ‘도리이류조’가 촬영한 석불사진(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이 발견되어 한절마 출신 김상홍(75)씨와 향토사학자 송재승 씨 등이 위치를 탐색한 결과 현 영주교육청 입구인 것으로 확인됐다. 이 석불이 원래 어디에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발견 당시 무릎 아래가 땅에 묻힌 채 아래한절마 마을 앞에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이 마을 출신 김상홍 씨는 “일제 때(1915-20) 영주-예천 간 도로공사 중 석불이 도로에 인접하게 되어 부득이 영주초 앞으로 옮긴 것으로 안다”며 “옛 도로는 현재 도로보다 안쪽으로 들어가 있었다”고 말했다.
1917년 영주초 앞 높다란 동산위에 안치된 석불은 군민들의 사랑을 많이 받았으며, 영주의 상징물이 되기도 했다.
특히 이곳에는 이정표(里程標), 학교, 군청, 경찰서, 교육청, 법원 등이 있어 영주의 중심지이면서 번화가였다. 세월이 흘러 도로확장 등 도시계획으로 이 석불은 다시 자리를 옮겨야할 처지가 됐다. 이 때 지역 인사들이 ‘영주공공도서관이 좋겠다’는 의견이 많아 1971년 현재의 자리로 옮기게 됐다.
한절마와 대사동(大寺洞)
한절마는 지금의 가흥1동 서구대(대순진리회관)에서 삼존불(부처모랭이)까지이다. 동국여지승람(1481-1530)에 「고려 때는 불교를 신봉할 때라 고을마다 절을 짓고 ‘대사(大寺,큰절)’라 이름을 붙였으며, 지금의 향교와 같다. 절이 폐지된 지 오래되었으나 그 터는 남아있으니 지금의 구학정(龜鶴亭)이다. 쌍탑이 아직 남아있다」고 내력을 적었다.
한절은 큰절이란 뜻이고 한자로 대사(大寺)라고 쓴다. 한절마는 조선 때 행정구역상 영천군 가흥면 ‘대사리(大寺里)’였고, 현재는 영주시 가흥1동에 속한다.
한절(大寺)의 이름은 덕산사?
1917년 영주-예천 간 도로공사 때 현 영주교육청 인근 대사지(大寺址)에서 옛 절의 것으로 보이는 동제종(銅製鐘, 또는 쇠북)이 발견됐다.
당시 기사 내용은 이렇다. 1917.2.12일자 영주헌병분소장이 보고한 내용 「1915년 11월 영주군 영주면 가흥리의 서남방 무명산 중복에서 도로공사 중 동제종 1개, 진유제식기 등을 발견했다. 발견자 김모씨는 발견당시 일부를 지참하고 군청에 신고하고, 일부는 자택에 가지고 있다가 이번에 신고했다. 매장물이 발견된 장소는 고려시대 덕산사(德山寺)라는 사원지로 전해진다. 현재 부근에 2체의 석불이 남아있다」고 기록했다.
이 동제종 명문(銘文)에 ‘덕산사(德山寺)’라고 새겨져 있어 대사(大寺)로만 알려져 왔던 옛 절의 이름이 ‘덕산사’인 것으로 추정된다. 또 2체의 석불은 ‘석조여래입상’과 ‘마애삼존불’인 것으로 짐작된다.
국립대구박물관에 가면 「‘덕산사’가 새겨진 쇠북(‘德山寺’銘 靑銅金鼓). 고려시대 1143년. 영주 출토」라고 설명되어 있다.
또한 신동국여지승람 영천군 산천조에 「하륜이 군수로 부임하여 남쪽이 낮아 수재(水災)를 근심하여, 남산을 지천(至天)이라하고, 덕산수(德山藪) 숲을 만들었다」라는 기사에 덕산(德山)이 나온다. 지금은 ‘구수산(龜首山)’이라고 부르는 한절마 뒷산의 이름은 덕산(德山)이고, 절은 덕산사(德山寺)인 것으로 추정된다.
학계의 연구결과
이 불상은 보기보다 유명세를 많이 타고 있다. 아마도 시내 복판에 자리 잡고 있어 사람들과 가까이 하는 동안 친해졌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또한 학계에도 널리 알려져 연구결과도 많은 편이다. 1917년 이후 학계의 연구결과를 보면 「이 주변이 신라시대에 조성된 사찰 터임이 확인되었고, 고려말이나 조선초 즈음에 폐사된 관계로 이 사찰의 정확한 이름은 알 수 없다.
높이 2.39m로 불상의 전체적인 양식은 719년에 조성된 경주 감산사 석조아미타여래입상(국보82호)과 유사한 형식을 하고 있다. 넓적한 사각형의 얼굴, 특히 두꺼운 입술의 표현은 영주 가흥동 마애여래삼존상 및 여래좌상(보물221호), 영주 석교리 석조여래입상(보물116호) 등에서만 보이는 것으로, 신라시대 당시 영주만의 독특한 지역적 특색을 확인할 수 있다」고 했다.
매우 당황스러운 것은 석불의 파손이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인위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인데, 학계에 의하면 인위적으로 불상의 눈동자를 쪼아낸 자국이 발견되었고, 이후에도 불상 몸 전체에 일부러 파손한 흔적이 지속적으로 확인됐다. 이렇게 불상을 일부러 파손한 이유는 아직까지 역사의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한 연구자에 의하면 “의약이 발달하지 못한 당시 ‘눈병환자에 좋다’는 설에 의해 눈이 많이 훼손 된 것으로 본다”고 했다. 즉 눈 부위를 쪼아 ‘돌가루’를 내어 눈병 치료약으로 사용했다는 것이다.
돌에 새긴 신라인의 염원(念願)
석불 앞에 섰다. 당초 큰 돌덩어리였을 것이다. 1300년 전 신라의 석수장이는 수백만 번 정으로 쪼아 광배와 보살상과 대좌를 조각했다. 눈, 코, 입, 귀 등 전신을 입체감 나게 쪼았다. ‘얼마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힘을 모았을까?’ ‘신라인들은 어떤 염원이 있었기에 이 어렵고 힘든 일을 했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당나라 군대의 침략 소식을 신라에 전한 사람은 의상이었다. 신라는 사천왕사를 창건하여 부처의 힘으로 당나라 군사를 물리쳤다. 이때가 670년 전후이다. 의상은 676(문무왕16)년 부석사를 창건했다. 676년은 신라가 삼국통일을 완성한 해이기도 하다. 이후 비로사, 초암사가 연이어 창건됐다. 의상은 부처의 힘으로 통일신라를 온전히 지켜내고자 하는 염원으로 부석사를 창건했다고 전한다.
소백산에는 부석사를 중심으로 절과 석불이 수없이 많다. 그 이유는 부처의 힘으로 국난을 극복하려는 염원이 담겨 있었던 것으로 보여 진다. 그 후 문무왕은 감은사를 지어 왜구를 물리치기도 했다.
영주동 석조여래입상을 조각한 석수장이들. 그들이 그토록 염원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부처님의 자비 즉 부처님의 사랑이 천강(千江)에 비춰 전쟁 없는 평화로운 세상을 꿈꿨을 것이다.
이원식 기자 lwss041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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