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고장 우리마을 숨겨진 보물을 찾아서[20]
풍기읍 수철리 가장 오래된 보물 ‘죽령’
위 사진은 1912년(108년전) 죽령 모습이다. 사람이 걸어 다니거나 말이 다닐 수 있는 길 뿐이다.
서기 158년 죽죽이 죽령을 개척한 후 1934년 자동차길이 열릴 때 까지 1800년 동안 옛 모습을 간직한 죽령고갯길의 모습이다.-무명 한복을 입은 보부상이 등짐을 지고 고개를 넘고 있다. 우측 너와집은 희방사역에서 쳐다보는 백룡사의 전신(前身)이다. 1900년경 죽죽의 사당 터에 백룡사가 창건되었다고 전한다. 사진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유리건판 사진자료
현재 죽령 모습(2020). 죽죽을 모신 죽죽사 터(竹竹祠址)에 지금은 장승이 서 있다.
죽령로 길가에 홀로 외로운 ‘퇴계선생 죽령유적비’
수철리에서 바라 본 죽령의 모습 주막거리 마을과 멀리 죽령이 보인다. 벌거숭이 산이다.
1912년 죽령옛길 입구 느티쟁이 마을에서 바라본 죽령의 모습이다. 산은 알몸 드러내고 있고, 느티나무 주변에 초가토담집이 몇 채 보인다. 1960년대까지 화전민 60여 가구가 이 골(옛길주변)에 살았다고 한다.
옛 느티쟁이 마을은 지금 과수원이 되었고, 숲이 우거져 죽령이 보이지 않는다.
희방사 입구 숲속에 버려진 ‘모죽지랑가비’의 현재 모습.
죽령주막 앞 죽죽석상(竹竹石像)
1950년대 죽령주막
2020 현재 죽령주막
158년 죽죽이 죽령 개척 후 순사했다. 고갯마루에 죽죽사가 있었다.
500년 신라 소지왕 죽령순행, 936년 왕건이 죽령에 ‘등항성’ 남기다.
죽령에 숨겨진 보물 ‘죽죽사지’ ‘모죽지랑가비’ ‘퇴계선생 죽령유적비’
안정 비상활주로에서 소백산을 바라보면 연화봉과 도솔봉 사이 짤록한 지점이 죽령이다. 해발 689m로 소백산 고개 중 제일 높다.
역사서에 고갯길의 개척자와 시기가 명확히 기록된 유일무이(唯一無二)한 옛 고갯길이 있다. 바로 죽령(竹嶺)이다. 삼국사기 지리2에 「본래 고구려 날이군(捺已郡)이었던 지금 영주지역을 ‘신라 파사왕(婆娑王,재위80~112)이 취(取)했다’고 했으며, ‘아달라왕(阿達羅王) 5년(158년)에 죽령(竹嶺)을 열었다’」고 했다. 영주 역사상 가장 오래된 기록이다.
소백산보다 오랜 역사 ‘죽령’
영주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 기록은 아무래도 죽령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아달라이사금 5년 158년에 죽령(竹嶺)이 열었다」고 나온다. 그러면 소백산에 대한 기록도 살펴보자. 소백산은 고려 초 세워진 보리사지 대경대사탑비(939년)와 비로사 진공대사보법탑비(939년)에 ‘소백산’이라는 명칭이 처음 나온다. 아마도 이 무렵부터 ‘소백산’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으로 보여 진다. 소백산은 죽령보다 800여년 뒤인 939년에 ‘소백산’이란 지명을 사용했다.
삼국 때 군사요충지 ‘죽령’
삼국사기에 「아달라왕 5년(158년) 3월 죽령이 열렸다는 기록이 있고, 동국여지승람에는 아달라왕 5년(158) 죽죽(竹竹)이 죽령길을 개척한 후 지쳐서 순사(殉死)했다. 고갯마루에는 죽죽을 제사하는 사당 죽죽사(竹竹祠)가 있다」고 했다. 지금 죽죽사지(竹竹祠址)에는 장승이 서 있다.
·소지왕 22년(500년) 가을 9월에 왕이 날이군(捺已郡, 지금의 영주)에 행행(行幸)하여 고구려와 국경을 이룬 죽령 등을 순행(巡幸)했다.
·고구려가 죽령을 차지한 것은 장수왕 말년(480년대)이다. 신라 진흥왕 12년(551년)에 죽령 이북 열 고을을 탈취했다. 그 후 40년 뒤인 영양왕 1년(590년) 고구려 장수 온달이 왕께 자청하여 군사를 이끌고 나서면서 “죽령 이북의 잃은 땅을 회복하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겠다”고 하는 기록 등에서 당시 죽령이 중요한 군사요충지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왕건이 남정 때 죽령을 넘어…
고려 왕건이 남정(南征) 때(936년) 죽령을 넘어 기주(基州.옛풍기)에 와서 7일을 기다려 견훤(후백제)의 항복문서를 받은 곳을 등항성(登降城)이라 부른다. 등항성은 현 봉현면 두산2리 ‘마산’이라고 전해온다. 풍기지에 「登降城 在郡西五里 諺傳高麗太祖南征時 留于此縣七日 百濟降書至 遂名駐輦處曰登降城(등항성은 군 서쪽 5리에 있다. 고려 태조가 남정할 때 7일간 머물렀는데 이 때 백제(견훤)의 항복 문서가 도착했기 때문에 태조의 가마가 머물렀던 이곳을 ‘등항성’이라하였다」고 기록했다. 또 순흥지(順興誌)에 「왕건이 죽령을 넘다가 두운대사의 명성을 듣고 희방사에 들렸다. 936년(태조19년) 그의(두운대사) 덕을 기리기 위해 절을 크게 중창했다」고 기록했다.
숲에 숨겨진 ‘모죽지랑가비’
죽령로에서 희방사로 오르는 길목(시설지구 입구왼쪽) 숲속에 모죽지랑가비(慕竹旨郞歌碑)가 숨어있다. 이 비는 1996년 10월 영주의 향토사학자 최현교 선생이 비문을 짓고, 경북대 오동섭 교수가 글씨를 썼으며, 영주향토사학회가 건립했다.
비문에 「영주인들의 중지를 모아 현대어로 고쳐서 시비를 죽령에 세운다. 설립 근거는 이 시가의 주인공 죽지(竹旨)는 영주인이다. 이 시가가 영주인의 노래이기 때문이다」라고 적었다.
전면에는 ‘모죽지랑가’를 한글과 한문으로 새겼고, 측면과 후면에는 죽지의 생애를 적었다.
모죽지랑가 ■원문 「去隱春皆林米 毛冬居叱沙哭屋尸以憂音 阿冬音乃叱好支賜烏隱 貌史年數就音墮支行齊 目煙廻於尸七史伊衣 逢烏支惡知作乎下是 郞也 慕理尸心未 行乎尸道尸蓬次叱巷中宿尸夜音有叱下是」 ■해설 「가는 봄이 그리워, 모든 것이 서러워 우네. 아담한 얼굴에 주름살지는 것을, 잠시 사이나마 만나 뵙게 되었으면. 님이여 그리운 마음으로 가시는 길, 쑥대마을에 자고 갈 밤 있으실까」
신라 효소왕(재위:692-702) 때 득오(得烏)가 지은 모죽지랑가(慕竹旨郞歌)는 8구체 향가다. 죽지랑은 김유신을 도와 삼국통일을 완성한 화랑이다. 삼국유사에는 죽령과 인연이 있는 죽지랑 탄생설화가 전하기도 한다.
지나는 길손들은 “귀중한 유적이 잡초에 묻혀 안타깝다”며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곳으로 옮겨 관광상품으로 활용했으면 좋겠다”고 입을 모았다.
외로운 보물 ‘퇴계죽령유적비’
퇴계학회경북지부가 1987년 퇴계의 죽령유적을 기념·보존하기 위해 국도 5호선(죽령로) 희방입구와 죽령 사이 도로변에 ‘퇴계선생죽령유적비’를 세웠다. 퇴계(李滉)는 1548년(48세) 정월 단양군수로 부임하여 민생을 살피고 시문을 논하던 중 그해 10월 형 온계(溫溪,李瀣)가 충청도관찰사를 제수 받아 부임하게 됨에 따라 8개월 만에 풍기군수로 옮겼다.
2년 후 1550년 봄 온계가 한성부 우윤(右尹)으로 전임되어 고향 도산을 다녀와 한양으로 올라가는데 퇴계가 죽령까지 따라와 ‘전별연’을 마련했다.
두 사람이 헤어진 다리를 소혼교(消魂橋), 골짜기는 안영협(雁影峽), 동쪽으로 보이는 바위 벼랑은 잔운대(棧雲臺), 서쪽 벼랑을 촉령대(矗泠 臺)라고 명명했다.
유적비 윗부분에는 퇴계의 칠언율시 '촉령대'와 '소혼교' 시가 실려 있고, 아랫부분에는 죽령유적비문이 새겨졌다.
■퇴계의 촉령대 시 「천황을 개척하여 축대 만들어서, 우리형님 감사 행차 맞이하고 보내느라, 영령한 물소리 정이 넘쳐흐르는 듯, 우뚝 솟은 봉우리는 이별 한을 쌓았는 듯」
■퇴계의 소혼교 시 「안영협 골짜기서 나누어진 두 그림자, 소혼교 다리위에 애끓는 그 때 심정, 굽이굽이 험한재를 부디 잘 넘으시오. 명년 다시 오실 언약 행여 잊지 마옵소서」
지금 ‘퇴계의 죽령유적비’가 있는 곳은 제2의 죽령옛길이 되어 찾는 사람 없어 외롭다.
근·현대의 ‘죽령’
1890년대 후반 정감록파 1진이 십승지를 찾아 풍기 금계촌으로 왔다. 이 때 대표적인 인물이 현대 풍기인삼의 선구자 구당(求堂) 이풍환(李豊煥,1866-1933) 선생이다.
구당이 가족을 거느리고 풍기로 올 때 “개성에서 배로 한강입구까지 와서, 뗏목을 엮어 타고 남한강을 거슬러 단양까지 올라온 다음, 독이며 책이며 궤짝들을 등짐으로 지고 죽령을 넘어 풍기로 오셨다”고 구당의 손자 이용배(서부3리)씨가 전했다.
1934년(일제 때) 국도 5호선 죽령로의 개통은 죽령 1800년 역사에서 가장 큰 변화다. 또 1942년 중앙선 철도가 개통되어 모든 물류가 철도를 이용하게 됨으로써 죽령은 사람들의 발길 뚝 끊어졌고, 따라서 주막도 모두 사라졌다. 2001년 12월 14일 중앙고속도로 개통으로 아흔아홉 구비 죽령자동찻길은 ‘제2의 죽령옛길’이 됐다.
죽령옛길과 죽령주막
역사의 애환을 간직하며 2천년 가까운 세월, 영남 내륙을 이어온 죽령의 옛 자취를 되살리고 보존하자는 뜻에서 1999년 영주시가 희방사역에서 죽령주막까지 2.5km 길을 복원했다. 그 후 죽령옛길은 그 가치를 인정받아 2007년 12월 17일 국가지정문화재 명승 제30호로 지정됐다.
죽령주막은 1987년 영풍군에서 터를 다듬어 전통초가 주막을 짓고 정자도 세웠다. 죽령 옛길에 있던 주막을 복원한 것이다. 10여년 후 1997년 현 죽령주막의 대표인 김창한·안정자 부부가 주막 내부를 현대화하고 주변을 조경하여 명품 죽령주막을 만들었다.
특히 부부는 예전에 죽령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대나무를 닮은 죽죽석상(竹竹石像)이 단양 모처에 있다는 것을 알고 힘써 찾아와 장독대 옆 옹달샘 앞에 세워두었다.
사서(史書)에 「죽죽이 죽령길을 개척한 후 지쳐서 순사했다. 고갯마루에는 죽죽을 제사하는 사당 죽죽사(竹竹祠)가 있다」고 했다. 이 ‘죽죽석상’이 죽죽을 모신 ‘죽죽사의 흔적은 아닐까?’ 상상도 하고, 추정도 해 본다.
이원식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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