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사랑 이야기 362

영주 제민루, '조선 최고(最古)의 지방 의국(醫局)'

김호 교수 논문… 1591년 의국 재건, 공립이지만 향촌 사족이 운영 주도 조선에서 가장 오래된 공립 지방 의원은 경북 영주의 ‘제민루(濟民樓)’인 것으로 나타났다. 김호 경인교대 교수는 학술지 ‘국학연구’ 최근호에 게재한 논문 ‘16∼17세기 조선의 지방 의국 운영’에서 “조선 최고(最古)의 지방 의국(醫局)은 사족(士族)들이 주도해 운영한 제민루”라고 밝혔다. 논문에 따르면 제민루는 1433년(세종15년) 영주군수가 학교와 의국을 겸하는 건물로 세웠다. 오랫동안 의국보다는 서당과 학자들이 공부하는 곳으로 사용하다가 1591년 군수 이대진이 북쪽에 큰 건물을 재건해 의국으로 삼으면서 기능을 회복했다. 김 교수는 논문에서 “제민루는 내의원에 납입할 약재를 관리하기 위해 국가 주도로 세워졌지만 지방민을 위..

숙모전 영주인 배향인물

숙모전(肅慕殿) 충남 공주시 반포면 학봉리 계룡산의 東鶴寺(동학사) 경내에 있으며, 조선시대의 端宗(단종)과 충신의 충혼을 모시는 곳으로서 고은공,정도공 두 분선생의 신위도 이곳에 모셔져 있다.세조에 의해 원통하게 왕위를 빼앗긴 단종을 모신 正殿(정전)과 東,西(동,서무)에는 癸酉靖難(계유정란)에 寃死(원사)한 황보인,김종서,정분 三相(삼상),안평·금성대군등 宗室(종실), 그리고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발각되어 참형을 당한 死六臣(사육신)그 외 죽음을 당한 수많은 원혼과 생육신 등 충의절사를 모신 곳이다. -1456년(세조 2년)에 김시습이 처음에 이곳에 와서 壇(단)을 모아 사육신을 초혼 제사하고 1457년에 세조가 속리산을 거쳐 동학사에 들렸다가 초혼단을 보고 감동하여 팔폭 비단에 寃籍(원적)이란 제..

금양정사 중수상량문 (錦陽精舍 重修上梁文)

금양정사 수리를 하는 과정에서 대들보에 쓰인 긴 상량문을 보았습니다. 요즘 상량문은 매우 짧은 한 줄 짜리가 대부분이나 예전 어른들은 건물의 신축, 개축, 증축 시 그 이유, 건축 과정, 건축 후기까지 상세히 적어서 기록으로 상량문을 남겼습니다. 글이 쓰인 대들보는 다시 제자리에 위치시켰습니다. 상량문이 쓰인 시기는 정조 임금 시절입니다. 상량문 원문은 정조 때 문신인 두암 김약련선생이 적었으며 대들보의 상량문 글씨는 당시의 종손(黃潤九)께서 썼습니다. 번역은 2013년, 강원대 명예교수인 황재국교수가 하였습니다. 금양정사 중수상량문 (錦陽精舍 重修上梁文) 선생께서 돌아가신지 수 백 년이 되었지만 이름난 이곳의 풍광은 옛날과 같은데 후손들이 중수를 너 다섯 번 했으니 정사의 제도가 한결같이 새로워졌도다 ..

식암 황섬의 신도비, 문화재 지정

순흥 거묵골(태장2리) 「식암 황섬 신도비」 ‘경북도문화재자료’로 지정 황섬은 풍기 희여골 출신으로 대사성, 부제학, 대사간 역임 비문 남태저(한성부우윤) 짓고, 글씨 강세황(서화가) 쓰다. 신도(神道)는 묘 앞에서 입구까지 낸 길을 말한다. 신도비(神道碑)란 조선시대 이후 관직으로 정2품 이상의 뚜렷한 공업과 학문이 뛰어나 후세의 사표(師表)가 된 사람에 대해 신도비를 세워 기리도록 하였다. 영주시 순흥면 태장리 82-1(거묵골, 여우생태관찰원 인근) 소재 ‘식암 황섬 신도비(息庵 黃暹 神道碑)’가 2020년 11월 26일 자 경상북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됐다. 이 비석은 식암 황섬(1544-1616)이 세상을 떠난 지 159년 뒤인 1775년(영조51)에 세워진 신도비이다. 신도비는 비각 안에 모셔져 있..

영주 맛집 '명하원 해신탕', " 새롭게 단장했어요"

영주맛집 '명하원 해신탕'이 고객님들의 칭찬과 응원에 힘입어 내부시설을 새롭게 단장하여 고객님들을 맞이합니다. 아! 참! 운이 좋아 '영주관광 음식점으로' 선정되어 경북도의 지원으로 내부 시설을 멋지게 리모델링했어요. 우왓!!!! 여기가 '명하원 해신탕'입니다. 영주 '선거관리위원회'에서 남쪽 50m 지점에 있어요. 맞은편에 대성철강이 있고, 바로 뒤에는 위즈호텔이 있어요. 주변이 온통 주차장이지요. 차 댈 곳이 많아서 좋아요. 이번에 고객님들의 적극 추천으로 '전복 해신탕'을 선보이게 됐어요. 해신탕은 소백산에서 나는 7가지 약초와 동해바다에서 나는 해산물 7가지가 오리와 함께 어우러져 특유한 맛을 내는 보양음식입니다. 옛날 아주 먼 옛날이야기에 나오는 동해 용왕님이 즐겨드신 음식이라고 전해지고 있어요..

영주의 지명유래

지명이 만들어지는 과정에는 여러 가지 요인들이 있다. 그 가운데에서도 가장 결정적인 요인 가운데 하나가 바로 물과 산이다. 따라서 지명형성에는 내와 산의 이름이 바로 특정 지역의 지명으로 통용되는 보기들이 많다. 산과 물이 있는 곳에 농경문화가 발달하고 사람이 자리를 잡고 마을이 함께 발달하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는 영주의 옛 지명인 ‘나이(奈已)’ 혹은 ‘내기(奈己)’의 ‘내(奈)-’가 물을 뜻하는 ‘내(川)’를 드러내는 형태이며 여기에서 영주가 비롯하였음을 언어 지리적으로 밝히고자 한다. 지명소 ‘내(奈)-’는 소백산을 동과 서로 하여 영주는 ‘내기(奈己)’, 영월은 ‘내생(奈生)’ 그리고 제천은 ‘내제(奈堤)’로 공유하고 있다. 여기서도 ‘내(奈)-’는 냇물을 뜻하는 지명소로 볼 수 있다. 영주의 ..

소수서원의 슬픈 역사

경상북도 영주의 옛 순흥 고을에 위치한 소수서원을 모르는 이는 아마 드물 것이다. 우리나라, 아니 이조의 첫 사액서원이요 수많은 정치인과 학자를 배출한 이 서원은 대원군 시절의 서원 철폐 정책에도 살아남을 만큼 그 유명세가 크다. 올곧게 뻗은 울창한 소나무와 사시장철 멈추지 않고 흘러내리는맑은 계곡물, 우람한 소백산 자락이 감싸는 듯 뻗어내린 이곳 지형(地形)은 범인(凡人)이 보아도 가히 천하 절승지라 일컬을 만하다. 이런 곳에서 심신을 연마하고 학문을 갈고 닦은 이들이 중앙 정계로 진출하여 크게 빛을 발하고 또한 후학들은 잘 길러냈다는 사실은 어찌 보면 당연지사라 할 수 있겠다. 인간은 작은 우주요 자연의 축소판이다. 불결하고 번잡스런 환경에 처해 있으면 인간 또한 혼미해지기 마련이고, 청정하고 수려한..

소수서원 살펴보기(2020.06.15)

수수서원 살펴보기 영주(榮州 ) 소수서원(紹修書院 / 백운동서원)- 사적 제55호 -경북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 151 ​ 1543년에 풍기 군수 주세붕이 세운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교육기관이다. 서원의 일반적인 배치방식인 전학후묘가 아니라 동학서묘의 독특한 배치로 지어졌는데 지금도 옛모습과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 그러나 근래 서원 뒤에 세운 사료전시관과 교육관 건물이 너무 커서 서원을 압도하고 있는 점이 아쉽다 ​ 하늘에서 내려다 본 소수서원의 모습... 저멀리 선비촌도 같이 보인다. 영주 소수서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으로 사적 제 55호이다 서원의 배치는 강학(講學)의 중심인 명륜당은 동향이고 배향의 중심 공간인 사당(祠堂)은 남향이다. 기타 전각들은 어떤 중심축을 설정하지 않고 자유롭게 배치된 특이..

비운의 숙수사

김태형의 ‘영주지역 불교문화유산 답사기’]6. 비운의 사찰 ‘숙수사(宿水寺)’① 현재 소백산 자락에 있는 사찰 중에 창건연대가 가장 오래된 사찰은 희방사다. 희방사는 643년(선덕여왕 12) 두운(杜雲) 스님에 의해 창건되었는데, 호랑이와 얽힌 창건연기가 전한다. 희방사 외에서 소백산 자락에는 7세기에 조성된 사찰이 여러 곳 있다. 현재 남아 있는 소백산 자락과 영주의 사찰 창건 연대를 살펴보면 대부분 7세기 중반부터 후반에 집중되어 있다. 표)에서 언급한 사찰 외에도 현재 터만 남아 있거나 기록만 전하거나, 석불·석탑과 같은 유물만 있는 곳을 포함하면 그 수는 상당할 것이다. 열거한 모든 사찰을 소개할 수는 있겠지만 이 중에 사료와 유물 등이 상당수 남아 있는 몇 곳만을 선정하여 소개하고자 한다. 이번..

한 점 부끄럼 없는 선비의 삶을 살다 간 故 권상목 선생

참전용사로, 교육자로, 각계지도자로 한 점 부끄럼 없는 선비의 삶을 살다 간 故 권상목 선생 6.25참전, 현리전투서 중공군에 포로, 포로교환 때 귀환 영어교사, 항소장학회 이사장, 도교육위원, 상공회의소 회장 무공수훈자회장, 소수서원장, 영주향교 전교 등 역임 고 권상목 선생(영주시민신문 한절마 마을탐방 때 2016) 2020년은 6·25전쟁이 발발한 지 70주년이 되는 해이다. 해마다 6월이면 6.25 특집기사를 준비했던 기자는 지난 1월부터 권상목 선생께 뵙기를 청했다. 6.25 전쟁담을 듣기위해서다. 그러나 행사일정상 또는 건강상 이유로 다음 달로 또 다음 주로 미루다보니 4월이 되었고, 어느 날 선생께서 타계하셨다는 비보를 듣게 됐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그날 이후 선생의 지인들과 가족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