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고장 우리마을 숨겨진 보물을 찾아서[15] [탐방일:2020.7.23]
최초의 군지 ‘영주지(榮州誌)’
취사 이여빈이 평생 독서하고 학문하던 감곡마을(부석면 감곡1리 감실)
취사, 후세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가르쳐 준 선비의 표상
후일 ‘징험할 것이 없어 보지 못했다’는 한탄 면하게 하려함
고려 때 지명 영주(榮州)에서 유래하여 ‘영주지’라 칭했다
취사 이여빈은 누구인가?
이여빈(李汝馪 , 1556-1631)의 본관은 우계(羽溪) 자는 덕훈(德薰)이며, 호는 취사(炊沙) 또는 감곡(鑑谷)이다. 우계이씨가 영남 땅으로 낙남한 것은 8세 퇴은(退隱) 억(薿 )으로부터 비롯됐다. 억은 강계원수로 재임 중 이성계의 명을 받아 요동정벌에 선봉으로 나가 공을 세워 밀직부사에 이르렀으나 고려가 망하자 벼슬을 버리고 처가 고장인 순흥(구구리)에 은거하니 우계이씨 영남 입향조이다. 그의 4세손 도촌(桃村) 수형(秀亨)은 단종사건 때 낙향하여 불사이군의 충절을 지킨바 그의 현손이 취사이다.
취사는 1556년 9월 도촌 옛집에서 태어나 이후 감곡으로 이주하였는데 평생 학문하면서 독선(獨善)과 겸선(兼善)의 진퇴를 조종하였고, 스스로의 수양과 진덕(進德)에 힘썼다.
취사는 임진왜란과 광해군 무렵 계축옥사 및 인조반정과 호란이 발발한 난세에 대의명분을 바탕으로 절의를 지킨 선비의 표상이다.
영주지의 산실 인수정
소수박물관에서 영주지 원본 친견
1625년 당시 영주는?
영주는 1413년(태종13년) 조선의 행정구역을 8도제로 정비할 때 경상도 영천군(榮川郡)이 됐다. 1457년 정축지변으로 순흥부가 폐부되어 풍기군에 속하게 됐다. 1543년 소수서원이 창건되고, 1558년 이산서원이 설립되는 등 어느 고을보다 교학진흥이 활발했다.
이 무렵 주세붕(1495-1554), 안공신(1496-1561), 황효공(1496-1553), 이황(1501-1570), 장수희(1516-1586), 박승임(1517-1586), 황준량(1517-1563) 등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학자·시인·묵객들이 많이 배출되어 취사 또한 좋은 인연과 가르침을 받으면서 성장했다.
취사는 1591년 사마시에 합격하여 지역유림의 지도자가 된다. 임진왜란(1592-1598)이 일어나던 해 4월 왜구의 침입으로 고을이 큰 혼란에 빠졌다. 난중에 보고 들은 것을 바탕으로 ‘난중일기’를 썼는데 류성룡의 ‘징비록’에 버금간다는 ‘용사록(龍蛇錄)’이다.
1605년 증광문과(增廣文科) 병과로 급제하여 이듬해 벽사도찰방에 임명됐으나 병중의 늙은 어머니를 생각해 고향으로 돌아왔다. 1610년 성균관전적으로 등용됐다. 광해군 때(1608-1623) 문란한 국정과 인륜을 거스르는 일들에 대해 ‘전은소(全恩疏)’를 비롯한 수차례 상소를 통해 그 부당함을 주장하였으나 여의치 않자 감곡(鑑谷)으로 낙향하여 인수정에 은거하면서 시문을 짓고 후진 교육에 힘을 쏟았다. 1624년 사우들이 취사에게 이산서원 원장직을 맡겼다. 1625년 드디어 묘우를 배알하고 붓을 들었다.
“후일 위해 영주지를 집필한다”
취사선생문집 연보에 「천계5년 을축년(1625, 70세) 11월에 이산서원에서 ‘영주지’를 집필하였다. 당시 이산서원 원장으로서 고을 선비인 진사 박성범, 김여욱, 조관금이 합심하고 생원 박안복, 유학 송상헌, 장룡우, 손회종 등이 사적을 수집하여 군지를 만들었다」고 기록했다.
취사는 영주지 서문에서 “왕조와 시대가 변천을 거듭하고 치란이 이어져 징험할 문헌이 없어 무엇에 의지해 고찰할고?… 정종소(1457-1463) 군수가 군지를 지었다고 하나 남아있지 않아 볼 길이 없다”며 탄식한다.
취사는 “10여 년 전 백암 김륵과 죽유 오운 두 공께서 일찍이 이 일을 박여인(朴汝仁:朴善長,1555-1617,문과)와 나에게 당부하였는데 미처 겨를이 없었다. 오래지 않아 박 공이 세상을 뜨고 두 영공 또한 서거했다. 나 홀로 세상에 남아 두 영공께서 부탁한 뜻을 이루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여러 분야에 걸쳐 자료를 모으고 다듬는 등 군지 편찬에 심혈을 기울였다. 벗들과 의논하여 이 일을 이루게 된다면 후세 사람들로 하여금 얻어 보고 참고하게 함으로써 후일에 징험(徵驗)할 것이 없어서 보지 못했다는 한탄을 면하게 하려는 것일 뿐”이라며 편찬 취지를 밝혔다.
백지 몇 권을 얻어 사우들에게 나누어주고 각자 자기 마을의 사실을 기록하게 하였는데 오래도록 이루지 못하였다. 고을 원인 완산 이식립이 소문을 듣고 지필묵을 도와주었다. 얼마 있다가 김숙회와 송숙도 등 여러 벗들이 기록한 각 마을의 사적들을 모아 ‘여지승람’ 범례에 따라 군의 사방 이수를 첫머리에 쓰고 12개 마을의 사적을 각각 차례로 뒤에 기록했다.
군지 이름을 ‘영주지’라 칭하다
취사가 영주지를 편찬할 당시 고을이름은 영천군이었다. 그런데 군지 이름을 ‘영천지(榮川誌)’라 하지 않고 ‘영주지(榮州誌)’라고 한 까닭은 무엇일까?
영주란 지명을 처음 사용한 것은 고려 고종45년(1258년)이다. 당시 무신집권기 위사공신 김인준의 고향이라 하여 순안현(順安縣)을 승지영주(陞知榮州) 즉 영주군으로 승격하여 지영주사(知榮州事,수령)를 두면서부터다. 영주라는 지명은 그로부터 1413년 조선의 행정구역을 8도제로 정비할 때까지 155년간 불리어졌다.
1625년 취사가 벗들과 군지 이름을 논의할 때 「우리고을이 고려 때 길주(안동)에 귀속되기도 하고 순안현령이라고도 불렀는데 군으로 승격되면서 영주(榮州)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을 기념하고, 또 천(川)보다는 주(州)가 더 큰 고을에 붙여주는 이름이기 때문에 ‘영주지(榮州誌)’라 칭하기로 했다」는 구전이 전해온다. 그 후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 개편 때 ‘영주군’이라 한 것 또한 ‘영주지’의 영주(榮州)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취사별묘
취사묘소
영주지의 산실(産室) 인수정
취사는 이산서원과 자신이 지은 인수정을 오가며 영주지를 집필했다. 이산서원은 1558년 영주의 동편 남간재 남쪽에서 창건했다가 1614년 이산면 내림리로 이건했다. 취사가 영주지를 집필할 당시는 내림리로 이건했을 때다. 취사는 감곡과 이산서원(약 16km)을 오가며 영주지 집필에 온 정성을 다했다. 취사가 은거했던 감실마을(현 부석면 감곡1리)에는 영주지의 산실(産室)이라고 할 수 있는 인수정(因樹亭)이 있다. 인수정 뒤편으로 취사별묘가 있고 연달아 재사와 종택도 있다. 기자는 지난 7월 12일 취사 후손 이갑선(소수서원운영위원장)씨와 인수정을 찾았다. 이씨는 “취사 선조께서 용사록과 영주지를 집필하신 곳이 인수정”이라며 “지금은 없지만 인수정 앞에 초가 까치구멍집인 석양와(夕陽窩)가 있었다”고 말했다.
이씨는 인수정을 바라보며 “저희 후손들이 명심하고 실천해야할 것을 한 가지 든다면, 취사 선조께서 여생을 마칠 때까지 허술하기 그지없는 인수정과 석양와에서 부단히 독서하며 학문을 연마하셨다는 점”이라며 “선조께서는 신미년(1631) 석양와 안방에서 세상을 떠나셨다”고 말했다. 취사별묘에서는 매년 음력 3월 28일 불천위 제사를 올린다.
취사종택
취사재사
취사종부가 생전에 쓰던 수저를 보여주고 있다.
취사의 수저
향로와 향함
벼루와 연적
취사종택에는 취사가 생전에 사용하던 수저와 벼루, 연적, 향로 등 유물이 남아 있다. 김정필(金正必,72) 취사종부는 “불천위 제사 때는 생전에 쓰시던 수저를 지금도 쓰고 있다”고 말했다.
종택에서 200여m 거리에 취사의 묘가 있다. 기자는 취사 선생의 뛰어난 재주와 총명한 기운을 조금 받아보려고 묘소 가는 길로 들어섰다. 묘소아래에 사는 이정수씨 부부가 “산길이 험하다”며 낫, 장갑, 장화, 토시를 챙겨 주면서 “뱀 조심 하이소”라고 했다. 묘소에 두 번 절하고 엎드려 “선생의 높은 뜻을 후세에 전하겠습니다”라고 告했다.
취사본 영주지 원본
취사본 영주지, 소수박물관에
이여빈의 호는 취사(炊沙) 또는 감곡(鑑谷)이다. 감곡은 감곡에 살아서 감곡이라 불렀고, 취사는 취사작반(炊沙作飯)의 준말로 ‘모래를 삶아 밥을 짓는다’는 뜻으로 헛되이 수고하여 공이 없음을 비유한 것이다. 아마도 취사 자신이 광해군 시기에 있었던 일들을 비유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취사본 영주지 원본은 소수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예전에 이산서원에 있었는데 서원이 훼철되면서 괴헌고택에 옮겨두었다가 2004년 소수박물관 개관과 함께 기증된 유물 중 하나다.
영주지 원본을 친견하려고 후손 이갑선 씨와 소수박물관에 갔다. 열람신청을 하고 절차를 밟아 영주지 원본을 친견했다. 빛바랜 고문서를 보는 순간 경건하고 엄숙한 분위기가 됐다.
박물관 사공정길 학예사가 조심스럽게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주요 내용을 해설해 주었다. 감사드린다. 1면 영천지목록(榮川誌目錄) 下에는 경사상거(京師相距), 건치연혁(建置沿革), 형승, 각리 등 40여개 목차가 써져 있다. 2면-4면에는 취사 이여빈이 쓴 영주지서(榮川誌序)가 나온다. 5면은 비워두고 7면부터 76면까지 총 2만 2천 여자를 붓으로 쓴 군지(郡誌)를 만들었다.
취사는 서문 말미에 「皇明天啓五年 十二月二十四日 鑑谷散人 李汝馪書于 伊山書院敬止堂(1625년 12월 24일에 감곡산인 이여빈이 이산서원 경지당에서 쓴다」라고 적었다. 취사는 서문까지 썼으나 발간은 보지 못했다. 지역유림 및 향토사 관련 단체들은 “영주시가 자체로 보물을 지정한다면 그 1호는 단연코 ‘영주지’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책사랑 > 숨겨진 보물을 찾아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문수암 절벽에 아슬아슬 걸터앉은 ‘문수사(文殊寺)’ (0) | 2020.10.03 |
---|---|
6.25 때 희방사와 함께 불타버린 잃어버린 보물 ‘월인석보’ (0) | 2020.09.01 |
소수서원에 숨겨진 또 하나의 보물 ‘도동곡(道東曲)’ (0) | 2020.09.01 |
1953년 소수중 건립 때 학생들이 발굴한 신라불상 25구 (0) | 2020.09.01 |
1953년 소수중 건립 때 학생들이 발굴한 신라불상 25구 (0) | 2020.09.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