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수서원 살펴보기
영주(榮州 ) 소수서원(紹修書院 / 백운동서원)- 사적 제55호
-경북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 151
1543년에 풍기 군수 주세붕이 세운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교육기관이다. 서원의 일반적인 배치방식인 전학후묘가 아니라 동학서묘의 독특한 배치로 지어졌는데 지금도 옛모습과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 그러나 근래 서원 뒤에 세운 사료전시관과 교육관 건물이 너무 커서 서원을 압도하고 있는 점이 아쉽다
하늘에서 내려다 본 소수서원의 모습... 저멀리 선비촌도 같이 보인다.
영주 소수서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으로 사적 제 55호이다 서원의 배치는 강학(講學)의 중심인 명륜당은 동향이고 배향의 중심 공간인 사당(祠堂)은 남향이다. 기타 전각들은 어떤 중심축을 설정하지 않고 자유롭게 배치된 특이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주세붕이 서원 이름을 '백운동'으로 한 것은 소수서원의 자리가 중국 송(宋)나라 때 주희(朱熹, 1130∼
1200)가 재흥시킨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이 있던 "여산(廬山)에 못지않게 구름이며, 산이며, 언덕이며, 강물이며, 그리고 하얀 구름이 항상 서원을 세운 골짜기에 가득하였기" 때문에 '백록동'에서 취한 것이라고 한다.
주세붕이 편찬한 『죽계지(竹溪志)』 서문에는 "교화는 시급한 것이고, 이는 어진 이를 존경하는 일로부터 시작되어야 하므로 안향의 심성론(心性論)과 경(敬) 사상을 수용코자 그를 받들어 모시는 사당을 세웠고, 겸하여 유생들의 장수(藏修)를 위하여 서원을 세웠다"는 설립 동기가 적혀 있다.
백운동서원이 들어선 곳은 숙수사(宿水寺) 옛터로 안향이 어린 시절 노닐며 공부를 하던 곳이다. 현재 서원 입구에 있는 당간지주(幢竿支柱)는 이곳이 절터였음을 알려주고 있다.
백운동서원이 국가로부터 공인을 받고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1548년 10월 풍기군수로 부임한 퇴계 이황의 노력 덕분이었다. 퇴계는 1549년 1월에 경상도관찰사 심통원(沈通源, 1499∼?)을 통하여 백운동서원에 조정의 사액(賜額)을 바라는 글을 올리고 국가의 지원을 요청하였다. 이에 명종은 대제학 신광한(申光漢, 1484∼1555)에게 서원의 이름을 짓게 하여 "이미 무너진 유학을 다시 이어 닦게 했다(旣廢之學 紹而修之)"는 뜻을 담은 '소수'로 결정하고 1550년(명종 5) 2월에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고 쓴 현판을 내렸다.
소수서원은 조선 최초의 사액서원이 되면서, 조정에 의하여 서원이 성리학의 정통성을 인정받는 계기가 된다. 사액을 내려 국가가 서원의 사회적 기능을 인정한다는 것은, 곧 서원이 갖는 중요한 기능인 선현의 봉사(奉祀)와 교화 사업을 조정이 인정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네이버 지식백과] 소수서원 (한국 미의 재발견 - 궁궐 · 유교건축, 2004. 11. 30., 이상해)
소수서원 전경
소수서원은 서원 동쪽에 죽계수가 북에서 남으로 흐르고 입구에는 소나무가 우거진, 풍광이 수려한 곳에 자리잡았다
꼬불꼬불 죽령을 넘어 닿는 곳에 풍기읍이 있다. 여기서 소백산 쪽인 동북 방향으로 접어들어 가노라면 세월의 무게가 느껴지는 유적들을 만날 수 있다. 그중에서도 소백산 비로봉으로부터 흘러내리는, 소리만 들어도 가슴이 시원해지는 맑은 죽계천가에 자리한 소수서원은 우리나라 사립교육기관의 첫 발자취이다.
소수서원은 주세붕(周世鵬, 1495~1554)으로부터 시작되었다. 풍기 군수로 부임한 주세붕은 우리나라 성리학의 선구자 문성공 안향 선생이 젊어서 공부하던 이곳 백운동에 중종 37년(1542)에 영정을 모신 사묘(祠廟)를 세웠다.
그리고 이듬해에 중국에서 주자가 세운 백록동서원을 본떠 양반자제 교육기관인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세웠다. 그후 퇴계 이황이 풍기 군수로 부임하면서 명종 5년(1550)에 왕에게 진언을 올려 ‘紹修書院’(소수서원)이라는 현판을 하사받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소수서원은 대원군의 서원 철폐 때 살아남은 47개소에 들었으며 사적 제55호이다.
소수서원 배치 평면도
조선시대의 사립대학이랄 수 있는 서원은 그렇게 탄생되었고 조선 중·후기에 걸쳐 많은 인재를 배출하면서 학문과 정치의 요람이 되었다. 서원이 생기기 전의 교육기관으로는 중앙의 성균관과 4부학당, 지방의 향교가 있었다.
관립기관인 향교는 사립교육기관인 서원이 생기면서부터 사실상 교육의 기능을 서원에 내주고 문묘제사를 지내는 곳으로 역할이 줄어들었다. 서원은 특히 경상도에 많이 세워졌는데, 조선 중종대부터 철종대까지 세워진 서원 417개소 중 40%가 넘는 173개소가 경상도에 집중돼 있다. 또 전국적으로 200여 곳인 사액서원 가운데 56개소가 경상도에 있다.
경북 북부지방이 아직도 ‘추로지향’(鄒魯之鄕), 곧 공자와 맹자의 고향이라는 자부심을 지니고 있는 것은 이러한 내력 때문이며 이와 같은 학문의 맥은 오늘날에도 이어지고 있다.
본래 서원은 교육을 하는 곳이지만 서원마다 받드는 분이 있어 제사도 중요하게 여긴다. 때문에 서원의 공간은 크게 교육공간과 제사공간으로 나뉜다. 소수서원은 사묘에서 출발하여 교육기관이 된 만큼 그 배치가 엄격한 규칙에 의하기보다는 매우 자연발생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특징이다.
서원으로서의 파격을 가장 먼저 깨는 것은 소수서원을 들어설 때 만나게 되는 당간지주 한 쌍이다. 아니, 서원 영역에 웬 당간지주일까? 소수서원 자리는 본래 숙수사(宿水寺)라는 절이 있던 곳이다. 절의 흔적은 이 당간지주나 소수서원 사료전시관 마당에 모아놓은 석등·석탑의 부분으로 남아 있는데, 1953년에는 손바닥만한 금동불 수십 구가 발견되기도 했다.
땅 위의 통치원리가 유교로 바뀌게 되자 힘이 미약해진 불교문화는 그런 식으로 땅속에 파묻혔던 것이다. 그 하나의 흔적인 이 당간지주는 높이 3.65m로 두 지주가 마주보며 곧게 뻗어 있는데 바깥면 중앙에 세로로 띠선을 새긴 것말고는 아무런 조각이 없다
. 이 지주는 기둥 끝으로 갈수록 조금씩 가늘어지다가 맨 끝을 곧게 둥글렸다. 당간을 받도록 원호를 새긴 댓돌이 지주 가운데에 길게 남아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유물로 여겨지며 보물 제59호로 지정되어 있다.
[진입영역Ⅰ-영귀봉,성생단, 당간지주,적송군락지 등]
서원 왼편에 봉긋하게 솟아있는 둔덕은 거북이가 알을 품은 모습처럼 보여 영귀봉이라 한다. 영귀봉 주변으로 수백년 된 적송이 장관인데, 소나무에게서 선비의 충절을 배운다는 뜻으로 학자수라 불리기도 한다. 보기에도 멋진 소나무 숲은 서원의 품격을 한층 높여주고 있다.
영귀봉 위에는 작별의 정을 나누던 소혼대가 있다. 서원 정문인 지도문 앞 잔듸 제단은 성생단이다. 매년 봄, 가을에 안향 선생의 제사를 지낼 때 사용할 가축의 흠결을 살피고 잡던 제단터이다.
지도문 오른쪽 경령점은 죽계수를 따라 펼쳐지는 멋진 경관을 바라보며 학문을 이야기 하던 곳으로 1543년 주세붕이 세웠다. 경렴정에는 스승인 퇴계 이황의 앞에서 떨리는 마음으로 썼다고 전해지는 초서의 대가 고산 황기로의 현판이 남아 있다. (안내문, 영주시청, 2009년)
서원 정문의 왼쪽에는 얕은 언덕인 영귀봉(靈龜峰)
소수서원(紹修書院) 왼편에 솟아 있는 둔덕은 거북이가 알을 품은 모습처럼 보여서 영귀봉(靈龜峰)이라고 하며,영귀봉 주변에는 수령이 수백년 된 적송(赤松)이 있어, "겨울을 이겨내는 소나무처럼 인생의 어려움을 이겨내는 참선비가 되라"는 의미로 적송 군락의 소나무 숲을 "학자수(學者樹)"라 하였다. 소수서원은 신라시대 때 창건된 "숙수사(宿水寺)"라는 절터에 세워 졌다고한다
진입공간의 적송군락의 숲길의 『영귀봉(靈龜峰)』과 『지도문』,『경렴정』
소혼대(消魂臺)
오른쪽 영귀봉의 중턱에 죽계계곡이 내려다 보이는 곳의 숙수사의 '숙수루' 별대(別臺)로 쓰였던 건물 추정되어 기와파편과 주초자리가 남아있다. 서원이 들어선후 이자리는 유생들이 머리를 식히는 장소로 방문한 손님을 배웅하는 장소로 이용되어 방문객들이 여기서 작별을 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소혼(消魂)은"혼이 사그러든다"," 넋이 나갈 만큼 심하게 근심하다"는 뜻으로 현대에도 "혼이 나가다"' 넋을 잃다"뜻으로 사용되는 말이다. 소혼대(消魂臺)란 이름은 남송시대 강엄이 이별을 노래한 『별부(別賦)』에서 따왔다고도 하는 데 별부(別賦)』의 이별의 정경을 노래한 옛시를 연상케한다
암연호혼(黯然銷魂) 말도 없이 혼이 사그라 드는 건
유별이기(唯別而己) 오직 이별뿐이네 [江淹 (강엄)]
『경렴정』과 『성생단』이 있는 지도문 원경
소수서원 입구에는 은행나무 두 그루가 서 있다. 이 지점부터 지면이 한단 높아지며 서원 경내임을 알 수 있고, 서원 출입문인 사주문으로 통하는 길 왼쪽으로는 성생단이, 오른쪽으로는 죽계수가 내려다 보이도록 지은 경렴정(원생들이 시를 짓고 학문을 토론하던 정자)이 있다.
소수서원의 정문인 지도문과 성생단(省牲壇)
소수서원의 출입문인 지도문은 보통 서원의 솟을삼문이나 루문이 아닌 사주문인 협문의 형태로 소박하것이 특징이다.
지도문(志道門)
지도문(志道門) 현판
소수서원의 성생단 『省牲壇)』
지도문 왼편의 성생단은 제향에 올릴 희생제물의 적합 여부를 심사하고 잡던 제단으로 생단이라고도 한다. 서원의 성생단은 일명 생단이라고도 하는데 사당 근처에 있는 것이 관례인데 소수서원의 성생단은 서원 입구에 위치해 있다.
아마도 소수서원은 다른 서원들과는 달리 『전당후묘』형식이 아니라 동쪽이 강학공간이고 서쪽이 제향공간으로 되어있는 점이 특이하다. 떄문에 입구인 지도문을 들어서면 바로 사당인 『문성공묘』가 있어 가까운 지도문 앞에 『성생단』이 놓이게 된 것으로 보인다
경렴정에서 바라본 소수서원 정문인 『지도문』
숙수사지당간지주(宿水寺址幢竿支柱)는 보물 제59호
소수서원으로 들어서면 당간지주를 비롯하여 불교 유물들이 다수 발견되는대 신라시대 때 창건된 숙수사라는 절터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불교에서 유교로 넘어와 선비정신을 이어가는 유불 문화의 융합으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나 숭유억불 사상의 영향이라는 견해도 있다.
숙수사터 당간지주
통일신라시대의 유물인 이 숙수사지당간지주(宿水寺址幢竿支柱)는 보물 제59호로 지정되었다
숙수사터의 유물들사료전시관 마당에 모아놓은 숙수사터의 여러 석물 중 불상광배와 연꽃이 새겨진 석등 받침이다. 사료전시관 마당말고도 서원 곳곳에서 옛 숙수사의 흔적을 찾아보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소수서원의 숙수사 관련 유적
비운의 사찰 ‘숙수사(宿水寺)’…죽계천과 영구봉이 감싸 안은 가람
숙수사를 소개하면서 ‘비운의 사찰’이라 이름한데에는 그 현장에 답이 있다. 폐사가 되고 그나마 남아 있던 사원건축의 부재들은 모두 서원의 건축부재로 재활용되고, 땅속에서 나온 각종 불기(佛器)들은 유교의 책들을 사는데 쓰였고, 수많은 불상들은 죽계천에 버려졌다는 얘기도 전한다. 또한 청정했던 도량의 한 켠은 제례를 위해 희생된 가축들의 비린내가 진동했을 터...
이제 현재 소수서원에 남아 있는 숙수사의 흔적을 통해 그 창건 연대를 추정해보기로 한다.
앞서의 연재에서도 숙수사의 창건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고 폐사의 시기는 14세기 후반 왜구 침입으로 사라졌다고 밝힌바 있다. 폐사 이후 숙수사는 오랫동안 빈터로 남아 있다가 1542년 주세붕이 그 터에 소수서원을 건립하였다.
숙수사지에는 현재 보물 제59호 숙수사지 당간지주를 비롯하여 석불과 각종 건물에 사용되었던 초석과 불상, 탑재 등이 산재해 있다.
또한 절터 주변으로는 승림사지 석조여래입상과 순흥면사무소 내 석불 입상을 비롯하여 순흥향교 안에도 여러 종류의 사찰 건축 부재들이 남아 있다.
먼저 숙수사에 대한 전반적인 현황 중 입지여건을 살펴보기로 한다. 숙수사지는 소백산 석륜암(현재 폐사)에서 발원한 죽계(竹溪)가 북에서 동으로 이어져 남으로 흐르고 있으며, 북쪽과 서쪽으로는 야트막한 영구봉(靈龜峰)이 경내를 감싸고 있다.
현재 남아 있는 유물과 유적을 토대로 숙수사 진입 동선을 살펴보면 보물 제59호 숙수사지 당간지주를 시작으로 지금은 소수서원의 소혼대(消魂臺)가 있는 자리에 ‘숙수루’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곳에는 지금도 다량의 기와편이 산재해 있다.
소수서원 문성공묘 남쪽 입구에 남아있는 목탑의 심초석으로보이는 석재
이렇게 숙수루를 지나면 바로 정면에 목탑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위 사진에서와 같이 문성공묘 앞에는 목탑의 심초석으로 보이는 석재가 남아 있다. 이 석재는 자연석을 편평하게 다듬은 다음 원형의 기둥자리를 두고 그 가운데에는 사각형의 구멍을 팠다. 이러한 석재의 형태로 보아 목탑이 숙수사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숙수사지에 목탑의 흔적은 하나만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크다. 현재 남아 있는 심초석은 영구봉쪽에 붙어 있는데 금당으로 추정되는 영정각과는 중심축선상에서 좌측으로 벗어나 있다. 따라서 문성공묘 앞에 서탑, 그리고 강학당 쪽에 동탑이 각각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영정각 앞의 정료대(庭燎臺)는 석등 부재를 재활용해서 만든 것으로 이 정료대 하대석이 석등으로 사용될 당시의 자리에서 이동하지 않고 본래의 위치를 고수하고 있었다면 숙수사 금당 앞에 동서 목탑이 존재했을 가능성은 더욱 농후해진다.
소수선원으로 변해버린 옛 숙수사터 추정 가람배치도
①보물 제59호 숙수사지 당간지주.①보물 제59호 숙수사지 당간지주 ②추정 숙수루 터 ③,④추정 동서 목탑지(현 문성공묘 및 강학당) ⑤추정 금당지(현 영정각) ⑥연지(현 탁청지)
우연의 일치일까. 회헌 안향을 비롯하여 회암 주희, 신재 주세붕, 오리 이원익, 한음 이덕형, 미수 허목의 영정이 봉안된 영정각은 필자의 판단으로는 숙수사의 금당이 있었던 자리로 보고 있다.
금당으로 이곳을 지목하고 있는 이유는 우선 앞서 언급한 석등을 재활용한 정료대와 문성공묘 동문(東門) 입구의 디딤돌인 석조 대좌 때문이다.
특히 통일신라시대 사찰의 금당 정면에는 석등이 배치되어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곳이 금당이었을 가능성을 높이고 있으며, 특히 불상의 대좌가 부근에 있다는 사실 또한 영정각이 본래 불상을 봉안한 곳임을 추론하기는 어렵지 않다.
소수서원에 남아 있는 불상의 석조 광배 일부
두광 부분에 4개로 추정되는 구멍이 파여 있는데, 이는 광배를 장식하기 위한 장엄물이 부착되었던 흔적으로 보인다.
소수서원 내에는 현재 금당에 봉안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석불의 불두(佛頭)와 광배의 일부가 남아 있다. 이 중 광배는 그 형태가 매우 특이하여 그 사례를 찾아보기 어렵다. 이 광배의 남아 있는 형태로 보아 불상의 몸 전체를 감싼 거신광(擧身光) 중에 두광(頭光)부분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인다.
보주형(寶珠形) 두광은 중앙에 연화문이 있고 주변에 얕은 홈을 파고 4개가량(현재 3개 확인)의 구멍을 뚫어 놓았다. 이어 그 주변으로는 보주형 두광이 표현된 좌상의 화불이 모두 5구가 조각되었을 것으로 보이며, 각 화불 사이에는 원형의 장식이 남아 있다.
이 광배에서 주목되는 점은 연화문 사이에 나타난 구멍이다. 구멍의 용도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광배를 장식하기 위한 모종의 장엄물이 부착돼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이 광배의 제작시기에 대해서는 7세기 후반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숙수사지 인근에서 발견된 다수의 금동불과 남아 있는 유물로 보아 숙수사는 늦어도 7세기 후반이전에는 창건될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밖에 현재 탁청지로 남아 있는 연못은 숙수사 경내의 연지(蓮池)로 추정되며, 소수서원 경내가 숙수사 중심사역으로 특히 청다리 혹은 제월교로 불리던 다리가 소수서원 북쪽에 위치해 있던 점을 고려한다면 그 주변에 다수의 전각과 승방 등이 산재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숙수사지 출토 연화문 암막새
숙수사지 출토 삼보명문(三寶銘文)수막새
불상 대좌 하대석
숙수사의 어느 건물에 사용되었던 초석
석탑 옥개석
석탑 부재
석탑 부재
지금까지의 내용을 정리해보면 숙수사는 본래 금당 정면에 목조 쌍탑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현존하는 여러 유적과 유물들을 통해 추측해볼 때 현재의 소수서원을 중심으로 반경 2km 이내에 사찰 관련 시설과 함께 관공서 등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출처} : 김태형 :<허미수의 영정각은 금당이 있었던 자리>-비운의 사찰 숙수사 / 부다미디어,2016.8.25. 서원은 성현에게 제사를 지내며, 후학을 양성하던 곳으로 중국 당나라 때 집현전서원 등의 설치에서 유래하였다 소수서원은 최초의 사액서원 답게 건물이 크고 그 숫자도 많은 편이다. 경사진 언덕에 계단식으로 강학공간과 제향공간이 배치되는 후대의 서원과는 달리 죽계천 변에 옛 절터에 여러 건물들을 자연스럽게 배치하고 있다. 후대 서원이 앞에 강학공간을 후면에 제향공간을 배치하는 후대의 전학후묘의 공간배치와는 달리 강학공간을 동쪽에, 제향공간을 서쪽에 두고 있어 동학서묘의 공간 배치를 하고 있다. 서원의 중심에는 '백운동'이라는 현판이 걸린 강학당을 중심으로 그 주변에 유생들이 공부하는직방재와 일신재, 학구재, 지락재와 장서각, 전사청의 건물이 배치되어 있으며, 서쪽편에 안향 등을 모신 사당인 문성공묘가 배치되어 있다. 다른 서원에 비해 유생들이 머물렀던 기숙사 건물이 크로 많은 편이다. [강학공간] 소수서원은 후학 양성을 위해 세워진 서원의 전형적인 모습으로 보여주는 곳이다. '강당'건물인 강학당(보물 제 1403호)를 중심으로 여러 동의 건물들을 두고 있다. 유생들이 머물렀던 기숙사는 3동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학문의 단계에 따라 지락재,학구재,일신재, 직방재가 있으며, 평상시 많은 유생들이 머물렀던 것으로 보인다. 강학공간 한쪽 편에 는 도서관 격인 장서각이 있다. [강학영역] 서원은 크게 강학영역과 제향영역으로 나눌 수 있다. 강학영역은 학문을 닦고 배우던 공간이다. 앞의 제일 큰 건물이 강학당(보물 1403호)이고, 오른쪽 뒤편으로 돌아가면서 지락재와 학구재, 일신재와 직방재가 위치한다. 강학당 왼쪽으로 장서각이 있다. 건물배치는 하학상달(下學上達式), 즉 학문의 차례와 단계를 뜻한다. 독서를 통한 학문의 즐거움을 의미하는 지락재를 시작으로, 성현의 길을 따라 학문을 구하는 학구재, 날마다 새롭게 한다는 일신재, 그리고 깨어있어 마음을 곧게 한다는 직방재, 이 직방재에 이르면 학문을 크게 이루게 되므로 비로소 명륜당이라 불리는 강학당에 들어 세상의 이치를 밝히게 된다. 이런 과정을 거쳐 배출된 인재가 4,000여명에 달한다. 1543년에 건립된 강학당 내부에는 명종임금이 내려준 친필 편액이 걸려있으며, 원본은 소수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장서각은 책과 목판을 보관하던 곳이다. (안내문, 영주시청, 2009년)
정문인 『지도문』과 마주하고 있는 『강학당』 지도문(志道門)을 들어서면 강학(講學)의 중심인 명륜당(明倫堂)이 동향으로 서있습니다
보물 제1403호로 지정된 "영주 소수서원 강학당(榮州 紹修書院 講學堂)"
소수서원 강학당 정면
강학당의 옆 모습 보물 제 1403호로 지정되어 있는 강학당은 학문을 강론하던 장소로 소수서원을 세운 주세붕(周世鵬)이 1543년(중종 38) 군학사(郡學舍)를 옮겨온 것이다. 전체적으로 큰 대청을 형성하고 방은 한쪽에만 있는데 정면 4칸 중 좌측 3칸은 마루이며, 우측 1칸에는 방 2개를 설치하였고 기단 3면(정면, 우측, 좌측)에 계단을 설치하였으며 굴뚝은 마루 밑에 조그마한 구멍을 뚫어 처리 하였다. 정면 4칸, 측면 3칸의 단층 팔작기와집으로, 중앙의 대청과 온돌방 및 마루방으로 되어 있고 대청·온돌방·마루방 주위로 툇마루를 둘렀다.소수서원에 입교한 유생들이 강의를 듣던 곳으로 서원의 중심건물이다.
강학당 우측면
지도문 쪽에서 본 강학당 좌측면 서원 정문인 지도문에서 바로 강학당으로 들어갈수 있도록 남쪽 기단에 계단을 설치하였으며, 계단을 오르면 "백운동(白雲洞)"의 현판을 볼수 있습니다.
강학당의 좌측면에 주세붕 선생이 처음으로 지은 이름인 백운동(白雲洞)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명륜당인 소수서원 강학당(紹修書院講學堂)동북측면 전경 - 국가지정문화재 보물 제1403호
'소수서원 강학당'은 정면 4칸, 측면 3칸의 초익공 오량가 팔작지붕 겹처마집으로, 건물 사방에 1m 정도의 툇마루를 설치하고 가장자리에는 7㎝ 정도의 턱을 두었으며 기둥 네 모서리에 추녀를 받는 활주를 설치하여 웅장하면서도 고색을 잘 간직하고 있다.
강학당 뒷면 기단은 장대석(長臺石)을 바른 층 쌓기 하여 높게 만들고 그 위에 초석을 놓아 두리기둥[圓柱]을 세웠고, 기둥 윗몸에 앙서[仰舌] 하나를 내어 기둥머리인 주두(柱頭)와 결구시킨 초익공(初翼工) 구조를 이루고 있다. 가구(架構)는 5량(五樑)으로 대들보를 앞뒤 평주(平柱) 위에 걸고 동자기둥을 세워 마룻보를 받쳤으며, 그 위에 파련대공(波蓮臺工)을 놓아 종도리를 받치고 있다.
강학당 추녀 정문으로 들어서면 먼저 강당인 명륜당과 마주하게 된다. 강당은 유생들이 모여서 강의를 듣는 곳으로 넓은 마루를 중심으로 온돌방이 달려 있는 것이 보통이다. ‘白雲洞’이라는 현판이 달려 있는 이 강학당은 동향을 하고 있는데 규모가 정면 4칸 측면 3칸이며 팔작기와집이다. 명륜당이 동서로 길게 앉아 있는 데 비해 이 집은 남북으로 앉아 있다. 가운데에 각각 한 칸짜리 대청이 있고 양옆으로 벌어져 온돌방이 있는데, 좁은 툇마루를 앞에 두고 칸칸이 나뉜 한 칸짜리 방들이 매우 아담하다.
강학당 대청의 창호 (문성공묘 쪽)
강학당 북쪽면 천정가구와 편액들
강학당 천정가구와 편액들
강학당 우물마루
강학당의 천정가구
강학당 내부 편액들
강학당 내부 편액들
강학당 파련대공
강학당(명륜당) 내부의 명종의 친필로 쓴 '소수서원(紹修書院)' 현판(경북 유형문화재 재 330호). 1550년 4월에 명종이 직접 써서 내린 것이다(소수박물관) 명륜당(明倫堂)은 일명 강학당이라고도 하는 이 건물은 원생들이 배움을 익히고 닦는 강당으로 1543년(중종 38년) 신재 주세붕(愼齋 周世鵬 : 1495~1554)선생이 건립하였다. 길러낸 원생은 4천여명에 달하며 퇴계 이황(1501~1570) 선생의 문하생 대부분이 망라되어 있다. 규모는 정면 4칸, 측면 3칸의 굴도리 초익공 건물이다. 평면구성은 마루방 3칸과 온돌방 1칸이고, 사면에는 폭이 좁은 쪽마루를 돌렸다. 상부가구는 5량가이고, 잘 치목한 대량위에 주두와 초각보아지를 끼운 동자주를 두어 종량과 중도리를 받쳤다. 종도리는 소로를 끼운 파련대공 위에 올려져 있다. 마루방부분의 창호는 사분합 들문이고, 온돌방 부분에는 고식의 문틀을 잘 간직하고 있다. 지붕은 팔작지붕에 골기와를 이었다. 동·서재는 한채로 구성되어 있는데, 정면 6칸, 측면 칸반의 납도리 소로수장집이다. 평면구성은 가운데 2칸 마루방을 중심으로 양측에 온돌방 2칸을 두었고, 온돌방앞에는 툇마루를 깔고 헌함을 세웠다. 상부가구는 5량가이고, 지붕은 홑처마 팔작지붕이다. '백운동(白雲洞)'이라는 현판이 달려 있는 이 강학당은 동향(東向)을 하고 있으며, 강당 안의 대청 북쪽면에는 명종의 친필인 '소수서원(紹修書院)'이란 현판(경북 유형문화재 제 330호)이 걸려있으니 바로 서원의 중심 건물임을 말해준다.
일신재(日新齋)와 직방재(直方齋)와 명륜당
강학당과 『직방재와일신재』의 측면과 뒷면
『일신재(日新齋)』와 『직방재(直方齋』)는 선비들의 기거공간인 동재와 서재이다. 현판은 둘 있지만 집은 이어진 한 채이다.일신재와 직방재는 2개의 건물이 하나로 된 형태인데 날마다 새롭게 한다는 『일신재』, 깨어있어 마음을 곧게 한다는 『직방재』에서 학문을 크게 이루면 비로소 성균관의 명륜당과 같은 기능의 『강학당』에서 세상의 이치를 밝히는 공부를 하게 된다.
영주 소수서원 직방재(直方齋)와 일신재(日新齋) 원장의 집무실로 정면 6칸 측면 1칸반이다. 교수들의 집무실인 일신재와 동재와 서재를 이룬다.일신재와 직방재선비들의 기거공간인 동재와 서재이다. 동·서재가 독립되어 있지 않고 양재(兩齋)가 한 동으로 이루어진 독특한 건물이다
영주 소수서원 직방재(直方齋)와 일신재(日新齋)
일신재와 직방재의 오른쪽에는 기숙사인 학구재(學求齋)와 지락재(至樂齋)가 읶다
학구재(學求齋)와 지락재(至樂齋)
지락재와 함께 "ㄱ"자 형을 이루고 있는 학구제(學求齊), 이곳 또한 학생들의 숙소 이며 "성현의 길을 따라 학문을 구한다"는 의미이다
학구재(學求齋)
학구제(學求齊)의 개방된 마루 학구제(學求齊)는 지락재의 곁에 있지만 구조는 서로 달라서, 가운데 마루를 두고 양쪽에 방을 들인 중당협실형(中堂夾室形)의 구조로 가운데 마루가 있으면서도 개방되어 있다 학구재(學求齋)는 유생들이 공부하던 기숙사로서 학문의 숫자인 3을 상징하여 3칸으로 꾸몄고, 공부잘하라는 뜻으로 건물 입면이 공(工)자 형으로 지어져 있기도 하다. 학구재는 학문을 구한다는 뜻으로 일명 동몽재(童蒙齎) 라고도 하며, 스승의 숙소와 나란히 세우지 않고 뒤로 물려 방바닥 높이 까지 낮추어 지은 것이 특이하다. 학구재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간결하고 아담한 3량가 납도리집이다. 이 건물은 주세붕의 문인인 송간 황응규(松磵 黃應奎 : 1518 ∼ 1598)가 건립하였다. 평면은 가운데 마루를 중심으로 양측에 온돌방 1칸씩을 두었다. 지붕은 홑처마 맞배지붕에 골기와를 이었다
학구재(學求齋)의 뒷면 학구재,앞면 3칸자리 건물로 가운데 마루를 중심으로 양쪽에 온돌방 1칸씩이 있다
지락재(至樂齋)는 학생들 숙소로,방 하나에 2칸의 마루 뿐으로 아주 소박한 건물이며,
지락재의 마루위에는 많은 시판 편액들
지락재(至樂齋) 지락재는 배움의 깊이를 더하면 즐거움에 이른다는 뜻으로 일명 앙고재(仰高齎)라고도 하며, 1613년(광해군 5년) 창석(蒼石) 이준(李埈)이 세웠다. 유생들이 머무는 기숙사 중 가장 낮은 단계인 지락재는 앞면 3칸 건물로 온돌방 1칸, 마루 2칸으로 되어있다.
학구재(學求齋)와 지락재(至樂齋) 일신재와 직방재처럼 선비들이 기거하며 공부하던 곳으로 매우 아담하고 소박한 건물이다 집중하여 공부하기에 큰 방이 필요치 않다고 여겼던 옛사람들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그 오른편 개울 쪽으로는 ㄱ자로 앉혀진 학구재(學求齋)와 지락재(至樂齋)가 있다. 지락재는 개울을 마주한 담장에 연해 있으니, 많은 유생들이 이곳에서 자연의 기운을 만끽하며 호연지기를 기르고 학문 연마에 심취했으리라. 이 소수서원의 작은 방과 마루를 모두 4천여 명의 유생들이 거쳐갔다고 한다. [제향공간] 소수서원은 고려 때 성리학을 들여온 안향을 모시기 위해 세워진 서원이다 제향공간에는 사당인 『문성공묘』 (보물 제 1402호)과 제사를 준비하는 전사청이 있다. 사당은 담장으로 둘려 져 있는데 후대 서원과는 달리 그 규모가 크지 않은 편이다. 반면에 사당을 사(祠)라하지 않고 묘(廟)로 격을 높여 부르고 있다. 소수서원은 서원의 일반적인 배치방식인 강당이 앞에있고 사당이 뒤에있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배치형식이 아니라, 강당이 동쪽에 있고 사당이 서쪽에 배치된 동학서묘(東學西廟)의 독특한 배치로 지어 졌는데, 이는 서원의 일정한 배치 형태가 정해지기 전에 지어진 최초의 서원이기 때문으로 보인다. 사당 뒷편에는 안향초상(국보 제 111호)와 주세붕 초상(보물 제 717호)를 모시기 위한 건물인 영정각을 두고 있다
문성공묘 협문
강학당에서 바라 본 문성공묘 - 안축, 안조, 주세붕의 위패를 봉안한 제향 기능의 사당이다.
소수서원 문성공묘는 국가지정문화재 보물 제 1402호로 지정되어있다.
문성공묘(文成公廟)의 현판 문성공묘(文成公廟)의 현판은 주자(주희)의 후손인 주지번(朱之蕃)이 썼는데, 명필로 소문난 명나라 주지번이 선조때인 1606년 명나라 사신으로 조선에 왔을 때,성균관의 "명륜당(明倫堂)" 현판 글씨를 썻으며 소수서원에도 들러 참배를 하고 문성공묘(文成公廟)의 글씨를 남겼다. 건물의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집으로 장대석으로 마무리한 낮은 기단 위에 둥글게 다듬은 주좌(柱座)를 놓고 배흘림 두리기둥을 세웠으며,기둥머리에 주두를 놓고, 첨차를 내어 그 위에 소로가 주심도리의 장혀를 받치고 있다. '소수서원 문성공묘'는 정면 3칸 측면 3칸의 오량가(五樑家) 맞배집으로 낮은 장대석 기단 위에 둥글게 다듬은 주초를 놓고 배흘림기둥을 세웠다. 기둥머리에 주두를 놓고,첨차를 내어 그위에 소로가 주심도리의 장혀를 받치고 보 방향으로 쇠혀를 내고 안쪽으로는 보아지 모양을 하여 퇴간의 보를 바치는 초익공식 구조를 이루고 있다. 가구는 오랑으로서 대들보를 전면 고주와 후면 평주 위에 걸고, 첨차로 짜인 동자기둥을 놓아 종보를 받치고, 이 위에 판대공을 놓아 종도리를 받치도 있다. 맞배지붕의 양측 박공에는 풍판을 3ㅏㄹ았다. 건물의 좌측과 뒤편에 장대석 축대를 쌓고 사방 돌담을 두른 후 정면에 외단문을 설치하고 우측에 협문을 달았다. 서원의 또 한 가지 중요한 역할은 제사를 드리는 기능이다. 서원마다 어떤 선비를 모셨는가에 따라 그 서원의 품격과 세력이 달라질 수 있으므로 서원들마다 앞다투어 영향력 큰 선비를 모시려고 했다.
문성공묘의 문성공위패 소수서원은 처음에는 안향을 모시는 사묘로 출발하였는데, 사당공간은 강당 왼편으로 담장 안에 있으며 이 서원 안에서는 유일하게 단청을 칠했다. 이 사당에는 안향 선생말고도 뒤에 안보(安輔)와 안축(安軸), 주세붕을 함께 모셔 배향하고 있다.
『문성공묘』, 오른쪽에 『장서각』, 그 옆에 『직방재,일신재』 그 앞에 명륜당인 『강학당(講學堂)』이 있다. 『장서각』 우측 뒷편에 『전사청』, 좌측 뒷편에 『영정각』의 일부가 보인다
명륜당 주변 장서각 오른쪽는『문성공묘』이고, 『장서각』의 오른쪽 뒷면에는 『전사청』지붕이 뒷면왼쪽에는 『영정각』일부가 보이고, 좌측 명륜당 측면에 양재 격인 『직방재,일신재』의 일부가 보인다. 장서각 앞에 '정료대',세수 대야 올려놓는 '관세대', 해시계 올려 놓는 '일영대' 석물도 보인다
소수서원 장서각(藏書閣)과 밤에 횃불을 밝히던 정료대 책을 으뜸자리에 둔다하여 스승 숙소 우측에 두었는데, 당시 유명한 서원들은 많은 장서를 보관하고 있어 당시에는 현대의 도서관 역할을 하였으며,도산서원 907종 4,338책, 소수서원 141종 536 책, 병산서원 1,071종 3,039책 등을 서원에 두었다고 한다.
정료대, 관세대, 일영대 장서각 바로 앞에는 정료대는 밤에 서원을 밝히던 조명시설로 윗 부분 석재위에 관솔불을 피워 정원을 밝혔다. 관세대는 사당을 참배할 때 손을 씻을 수 있도록 대야을 올려 놓는 받침돌이다
소수서원 장서각 직방재의 우측에 있고, 목판과 나라에서 내려준 서책을 포함한 300여권의 서적을 보관하던 곳이다. 정면 2칸, 측면 1칸, 홑처마 맞배지붕의 형식이다. 직방재와 문성공묘 사이에는 책과 목판을 소장했던 장서각이 있는데 장서각에는 141종 563책의 장서가 소장되어 있다
장서각 뒷편의 전사청과 영정각
영주 소수서원 전사청
사당 뒷편에 있는 전사청 문성공묘 뒤쪽에 남향으로 자리하며, 제사용 그릇 등을 보관하던 곳이다. 건물의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은 마루로 나머지 1칸은 방으로 되어 있다. 전사청(典祀廳)은 1542년(중종 37년) 풍기군수 주세붕이 제기(祭器 :제사 때에 쓰는 그릇. 예기(禮器)라고도 함)를 보관하고 춘추향사(春秋享祀 : 제사)때 제물을 장만하기 위하여 건립하였다 사당 바로 뒤 나무판자벽으로 된 자그마한 집은 책을 보관하는 장서각(藏書閣)이고 그 뒷건물은 전사청(典祀廳)으로 제사 때 음식을 준비하는 곳이다.
『장서각』과 『직방재·일신재』의 뒷편의 『전사청』과 『영정각』 전면은 해시계를 올려놓는 『일영대』 와 전사청의 측면.오른쪽은 영정각이다
영정각(影幀閣) 주자, 문성공 안향, 주세붕, 한음 이덕형 등의 영정(影幀)을 모시고 있다
영정을 모시기 위해 세워진 영정각 장서각과 직방재 뒷편에는 영정각이 있는데 불교(佛敎) 사찰(寺刹)이라면 조사전(祖師殿)에 해당하는 전각 으로 1975년에 새로 세운 건물이다
영정각 현판
일영대(日影臺) 영정각 앞에 있는 일령대는 막대기를 끼워 그림자로 시간을 재던 해시계를 올려 놓던 받침돌로 자연석 주춧돌위에 문지도리석을 올려 놓은 것으로 숙수사의 유적이라는 설도있다.
전면에는 회암(晦菴) 안향(安珦), 주자(朱子)를 왼쪽에 모셨다, 오른쪽에는 국보 제111호 회헌영정(晦軒影禎)으로 사실상 이곳 영정각의 주인은 “회헌(晦軒) 안향(安珦)”의 초상(肖像) 이다.
전면에서 보아 왼쪽에는 미수(眉叟) 허목(許穆)과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의 영정을 모셨고, 그 옆에 주자의 영정이 보인더
영정각 안에는 유학자들의 영정이 모셔져 있는데 소수서원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진품 영정은 국보 제111호 회헌영정, 보물 제485호 대성지성문선왕전좌도, 보물 제717호 주세붕영정이다.
주세붕(周世鵬 ) 초상 (소수서원 영정), 보물 제 717호, 소수서원 소장
주세붕 초상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작자 미상 160.6 X87.5 cm <주세붕 초상>은 녹색 단령을 입은 주세붕의 모습을 그린 전신상으로 초상 왼쪽에 따로 붙인 종이에 ‘증자헌대부예조판서겸지경연의금부춘추관사행가선대부호조참판겸동지춘추관 성균관사신재주선생휘세붕자경유(贈資憲大夫禮曹判書兼知經筵義禁府春秋館事行嘉善大夫護照參判兼冬至春秋館成均館事愼齋周先生諱世鵬字景遊)’라는 글씨가 쓰여 있어 주세붕의 초상임을 알 수 있다.주세붕의 집안에 전해오다가 1980년에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되었다. 이 초상화는 16세기에 생존한 인물을 그린 것이지만 그 양식은 16세기와 조선 후기의 특징이 혼재되어 있다. 기본적인 상의 모습은 영주 소수서원에 전래된 보물 재717호 <주세붕 초상> 반신상과 매우 흡사하다. 체와의 밀착감이 떨어지는 관복의 부피감이나 고식적인 교의 표현은 다소 시대가 올라가는 초상화에서 나타나는 특징이다. 그러나 운문이 아닌 운보문(雲寶紋)으로 그려진 관복은 17세기 말을 그 상한선으로 잡아 볼 수 있으며, 사모의 모정과 양각이 둥근 것, 족좌대 위의 화문석 표현 역시 조선후기의 시대양식을 보여준다. 다양한 시대적 특징이 혼재되어있으며 16세기의 도상을 기본으로 후대의 양식이 반영되고 있는 점이 특징이며 이 초상화를 본으로 삼은 그림이 경남 함안군 무산사에도 전해오고 있다 <주세붕 초상>은 녹색 단령을 입고 약간 우향을 한 채 공수자세를 취한 전신교의좌상이다. 교의에는 호피가 걸려 있고 칠기로 된 족좌대 위는 화문석으로 마무리되었다. 의복은 풍성한 모습으로 그려졌는데 어깨와 소매 자락의 구분 없이 계속 이어져서 양 어깨와 옷소매 선은 신체를 덮고 있다기보다는 둥글게 부풀어 있는 것 같다. 흉배의 문양은 서조인 듯 한데 정확한 종류는 확인되지 않는다. 얼굴은 살색을 매우 두껍게 칠했으며 음영 표현은 하지 않았다. 얼굴 윤곽선과 눈, 코, 입에는 진한 선을 사용하였다. 얼굴의 이목구비가 모두 크고 뚜렷한데, 특히 눈썹과 눈의 표현이 두드러진다. 눈동자는 완벽한 원형이며 눈의 모양도 도식적이다. 눈썹은 숱이 수북하며 색이 진한데 눈썹 털 하나하나를 그렸다. 이러한 윤곽선 위주의 표현은 이 초상화가 주인공에 대한 사실적인 묘사에 중점을 두었다기보다는 그 이미지를 인상적으로 전달하고자 한 것임을 보여준다.
대성지성문선왕전좌도(大成至聖文宣王殿坐圖),보물 제 485호, 170×65㎝, 소수박물관 ‘대성지성문선왕전좌도(大成至聖文宣王殿坐圖)’는 공자에서 시작된 유가의 계보를 정리한 그림이다. 공자는 맨 위쪽 중앙에 홀을 잡고 앉아 있고 양 옆으로 안자와 자사, 증자와 맹자가 호위하듯 앉아 있다. 그들 옆으로는 공자의 직계 제자가 5명씩 병풍처럼 앉아 있고 이들 앞에는 83명의 제자가 앉아 있다. 흐트러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자세다. 파도처럼 두 줄로 펼쳐진 제자들은 맨 위에 앉은 공자를 향해 점점 간격이 좁아진다. 모든 시선이 공자로 귀결되게 하려는 계산이다. 공자의 권위를 드러내기 위한 좌우대칭의 구도만큼이나 치밀한 의도가 느껴진다.
‘대성지성문선왕전좌도’는 유가의 질서가 정교하게 표시돼 있다. 반면 지금까지 우리가 알아왔던 공자의 인간적인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근엄하고 신격화된 공자가 박제돼 있을 뿐이다. 사당에 모신 그림인 만큼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문제는 이런 우상화 작업 때문에 공자가 더욱 더 사람들로부터 멀어지고 신화 속의 인물처럼 변질된다는 것이다. ‘논어’에 등장하는 공자는 인간적이다. ‘대성지성문선왕전좌도’에는 그런 인간미가 제거돼 있다. 범접할 수 없는 성인 공자만이 있다[출처] 조정육 미술사학자 :<그림으로 읽는 공자>대성지성문선왕전좌도 / 주간조선,2014.3.31. 주세붕 영정안향을 모신 백운동서원을 세운 인물이다. 눈이 부리부리하고 윤곽이 뚜렷하여 매우 호방하고 과단성 있는 성격의 소유자로 보인다 안향(安珦, 1243~1306)은 안유(安裕)라고도 하는데, 고려시대 사람으로 흥주 죽계 상평리에서 태어났다. 만년에 송나라의 주자를 추모하여 그 호인 회암(晦庵)을 모방하여 호를 회헌(晦軒)이라고 지을 만큼 주자학에 대한 경도가 깊었다. 원나라에 가서 그곳 학풍을 직접 느끼고 주자서를 베껴와 우리나라에 보급하는 노력을 기울여 우리나라 최초의 주자학자로 불린다. 그가 원나라에 가게 되었던 것은 우리나라 왕과 원나라 공주이기도 한 왕비를 호종하는 직책을 맡아서였다. 원나라의 지배를 받는 현실을 헤쳐나갈 새로운 사상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던 때 명분을 중시하면서 주지적인 주자학을 만난 안향은, 주자학이야말로 새시대를 열어가기에 합당한 사상, 새로운 철학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안향의 노력 덕분이었는지 백년여 뒤에는 마침내 주자성리학을 수양과 치세의 원리로 삼은 성리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새로운 왕조를 개창하고 유교를 통치원리로 삼았다. 그러므로 조선시대에 와서 안향을 받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안향이 죽은 뒤인 1318년, 충숙왕은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궁중의 원나라 화공에게 명하여 그의 영정을 그리게 하였다. 현재 영정각에 모신 안향의 영정은 그 이모본을 조선 명종 때에 다시 고쳐 그린 것으로 국보 제111호로 지정되어 있다. 사후에 그려진 영정이지만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증언에 따라 그린 것이니만큼 영정에서 그의 품성이 엿보이는데, 온화하면서도 결단력이 있어 보이는 매우 단단한 인상이다. 아울러 두건을 쓰고 붉은 겉옷을 입은 모습에서는 당시 학자의 풍모도 느껴진다. 영정각 안에는 보물 제485호로 지정된 ‘대성지성문선왕전좌도’(大成至聖文宣王殿座圖)도 있다. 이는 공자를 향하여 여러 성인과 제후를 그리되, 문묘와 향교의 대성전 동·서무에 위패를 배향하듯이 인물을 배치한 그림이다.
회헌 안향 초상,국보 제 111호 고려 중기 문신인 회헌 안향(1243∼1306) 선생의 초상화로 가로 29㎝, 세로 37㎝의 반신상이다. 안향은 고려 원종 1년(1260)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하였으며, 여러 차례에 걸쳐 원나라에 다녀오면서 주자학을 우리나라에 보급한 인물로 우리나라 최초의 주자학자라고 할 수 있다. 그림의 화면은 상하로 2등분되어 위에는 글이 쓰여 있고 아래에는 선생의 인물상이 그려져 있다. 머리에 평정건(平頂巾)을 쓰고 왼쪽을 바라보며 붉은 선으로 얼굴의 윤곽을 나타내었다. 옷주름은 선을 이용하여 명암없이 간략하게 처리하였다. 시선의 방향과 어깨선에서 선생의 강직한 인상이 보인다. 소수서원에 있는 이 초상화는 선생이 세상을 떠난지 12년 후인 고려 충숙왕 5년(1318) 공자의 사당에 그의 초상화를 함께 모실 때, 1본을 더 옮겨 그려 향교에 모셨다가 조선 중기 백운동서원(후에 소수서원이 됨)을 건립하면서 이곳에 옮겨놓은 것이다. 선생의 초상화는 현재 전해지는 초상화 가운데 가장 오래된 초상화로, 고려시대 초상화 화풍을 알 수 있어 회화사 연구에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귀중한 작품이다. 안향 영정우리나라 최초의 주자학자로 불리는 안향의 상으로 온화하면서도 결단력 있어 보이는 단단한 인상이다. 현재 영정각에 모신 초상은 고려 충숙왕 때 처음 그려진 초상의 이모본을 다시 조선 명종 때 고쳐 그린 것이다 최초의 서원이니만큼 간직한 문화재도 많고 연구할 거리도 많아 소수서원은 전속 연구원을 두어 연구를 하게 하고 있다. 유물전시관에서는 강학 모습, 제향 모습의 모형을 갖추어 옛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보물 제717호인 주세붕 영정도 있는데 반신상에 사모관대를 한 모습이다. 한바퀴 돌아보면 금세 알 수 있듯이 소수서원은 건물들이 놓인 방식이 자유롭다. 강당에 견주어 사당공간은 왼쪽 뒤켠으로 치우쳐 있고 특히 사당의 자리가 매우 어정쩡하기까지 하니 최소한 사당을 뒤에 놓고 강학공간을 앞에 놓는 ‘전학후묘’(前學後廟)조차도 염두에 두지 않은 듯하다. 도산서원의 엄격한 계층성도, 병산서원의 단아한 짜임새도 없으며, 어떤 위계질서가 주는 엄숙함의 카리스마를 기대했던 사람들에게는 자유롭다 못해 시시하다는 느낌마저 준다. 그것은 아마 소수서원이 최초의 서원이어서 어떤 규칙이 정해지기 이전에 형편과 필요에 따라 환경과 어우르면서 건물들을 앉혀 나갔기 때문일 것이다. 서원의 담장 밖으로 나와 당간지주 옆에 있는 경렴정(景濂亭)에 올라보는 맛도 좋다. 건너편 개울을 보며 시원한 물소리에 젖다보면 문득 바위에 새겨진 ‘白雲洞’이란 흰 글씨와 붉은 칠을 한 ‘敬’자가 보인다. ‘白雲洞’이야 이곳의 명칭을 새긴 것이겠으나 ‘敬’자는 웬 것일까? 그것은 다름아니라 ‘敬以直內 義以方外’를 ‘敬’이란 한 글자로 드러낸 것이다. 곧 ‘경으로써 마음을 곧게 하고 의로써 밖으로 드러나는 행동을 반듯하게 한다’는 뜻이니, 그 글자를 보며 행동을 바로잡으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그런 본뜻과는 달리 사람들은 입에서 입으로 다른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숙수사를 폐찰하면서 불상들을 죽계천에 모두 버렸더니 밤마다 울음소리가 들려와서, 퇴계 이황이 ‘敬’자를 새겨 공경하는 뜻을 나타냈더니 그제야 소리가 그쳤다는 얘기며, 단종 복위운동에 스러져간 선비들의 혼백을 달래려는 것이라는 얘기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요즈음의 소수서원은 그런 사연을 아는지 모르는지 결혼식 비디오 촬영에 여념이 없는 선남선녀들로 가득하다. 소수서원 주변의 더없는 풍광과 더불어 이곳이 ‘영귀포란형’(迎貴抱卵形) 지세라서 이곳을 다녀가면 아들을 낳는다는 속설이 부추긴 이 시대 문화의 한 단면일까. [네이버 지식백과] 소수서원 (답사여행의 길잡이 10 - 경북북부, 초판 1997., 15쇄 2010., 한국문화유산답사회, 김효형, 목수현, 김성철, 유홍준, 김혜형, 정용기) 고직사(庫直舍)는 서원을 관리하던 관리인이 거처하던 곳이다.
사료관 시료관은 학구재와 지락재 뒤편과 사료전시관(충효교육관) 사이에 있는 건물로 사료전시관에 전시되어 있지 않은 책, 문서 등이 보관되어 있다.
사료관
사료관(史料館)에는 소수서원의 관련자료를 정리하여 전시해 두어,소수서원의 역사와 전통 및 주요 배출인물 등의 내용을 알수 있다
사료관의 앞뜰에서는 석조불상(石造佛像)의 대좌(臺座)와 주춧돌 등의 불교와 관련한 석물들을 볼수있는데, 소수서원은 숙수사터에 세워졌기 때문에 불교 유적이 남아 있다. 이곳에서 발굴된 불상들은 신라시대인 6세기 후반에서 8세기에 이르는 매우 이른 시기의 것이며, 종류도 여래상, 보살상, 반가사유상, 탄생불, 신장(神將)상, 공양자상 등 다양하여 숙수사가 아주 이른 시기에 지어졌던 사찰임을 알수 있다 소수서원(紹修書院)에는 숙수사(宿水寺)와 관련한 비극적인 속설이 전하는데, 숙수사(宿水寺)에 조선시대에 관군(官軍)의 방화로 절은 폐허가 됐고 그 자리에 서원을 세웠다는 내용이다 세조 3년(1457년) 10월 단종 복위 거사가 실패하자 본거지였던 이곳 순흥도호부 사람들이, 토벌군에 떼죽음을 당한 사건을 정축지변(丁丑之變)이라고 하며 소수서원의 지척에, 당시 화를 입은 금성대군과 순흥부사 이보흠 등을 제사지내는 금성단(錦城壇)이 있으니 그럴듯한 내용이지만 사실과는 다르다고 한다.
『사료전시관』과 『충효교육관』 입구
서원의 맨 뒷편에 있는 사료관 뒷편에 있는 『사료전시관』과 『충효교육관』 1993년 건립된 건물로 서원의 역사와 기능을 알 수 있는 전시관과 200여석의 좌석에 시청각기기를 갖춘 교육 시설이 마련되어 충효예절 교육과 각종 세미나, 역사 교육장으로 활용하고 있으며, 회헌영정, 주세붕영정, 대성지성문선완전좌도 등 소수서원의 깊은 내력을 설명해주는 귀중한 유물들과 각종 고문서, 현판 등이 보존되어 있다. 또한 서원 관련 각종 자료와 서원의 역사, 기능, 제향절차, 봉안인물 공적 등을 패널로 작성 벽면에 부착하여 서원 문화를 한눈에 알아 보도록 전시한 유일한 서원 박물관이기도 하다.
죽계교 선비촌에서 오다가 죽계천을 건너 소수서원에 이르돌다리이다
선비촌에서 소수서원으로 가는 길은 죽계천을 이어 주는 죽계교를 건너 소수서원의 뒷문으로 들어가게 된다
고직사은 민가형식의 건축물로 서원관리인이 머물던곳으로 원래경내에 있었으나 1970년대 서원을 정비하면서 서원 밖으로 옮겨 지었다고한다.서원에 들어 있으되 아직은 원 밖인 셈이다 [진입공간 Ⅱ- 경렴정(景濂亭), 죽계천(竹溪川),경자바위(敬字岩),취한대(翠寒臺)] 죽계천(竹溪川)
탁청지(濯淸池) 서원을 나오며 지락재(至樂齋) 담밖에 있는 못으로 탁청지(濯淸池)는 1593년(선조 26) 겸암(謙菴) 류운용(柳云龍)이 풍기군수로 재임할 때 연못을 파고 대를 쌓았던 곳으로,후일 창석(蒼石) 이준(李埈)이 군수로 부임하여 다시 판 기록이 남아 있으며, 연못이 장방형의 형태로 되어 있어 천원지방(天圓地方)을 표현한듯 보인다.
소수서원 죽계 주세붕은 구름과 산, 그리고 강물이 골짜기에 가득한 곳에 백운동서원을 세웠고, 이황은 백운동서원이 소수서원으로 사액을 받게 하였다. 서원 바로 아래에는 죽계천이라는 하천이 흐르는데 고려 충숙왕 때 안축이 지은 경기체가 『죽계별곡』의 무대가 바로 이 죽계천이다. 죽계천은 소백산에서 발원하여 선비촌을 거쳐 흘러 소수서원 옆에 와서는 소(沼)를 이루는데 주세붕이 백운동 서원을 처음 세울 때 원래 있던 사찰의 불상을 이 소에 빠뜨렸고, 이를 무마하기 위해 존경한다는 뜻의 경(敬)자를 죽계천 동쪽 바위에 새겼다고 한다. 경렴정 동쪽에서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죽계 건너편에는 물가로 튀어나온 경자바위[敬字岩]가 있는데, 거기에 새겨진 '경'자는 주세붕이 백운동서원을 창건하고 쓴 글씨이다. '경'은 성리학에서 마음가짐을 바르게 하는 수양론의 핵심으로, 선비들의 지침이 되었다. 퇴계는 풍기군수로 있을 당시 이곳에 송백과 죽을 심어 취한대(翠寒臺)라고 이름짓고, 또 '경'자 위에 '백운동' 석 자를 써서 음각하고 이곳의 풍류를 즐겼다고 한다.
경자바위 경렴정에서 내려다보이는 죽계수 건너편 바위에는 음각으로 주세붕이 쓴 '경(敬)', 이황이 쓴 '백운동(白雲洞)'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경렴정(景濂亭) 동쪽에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죽계 건너편에는 물가로 튀어나온 경자바위(敬字岩)가 있어, 경자바위에는 슬픈 전설이 전해 내려오는데 "경(敬)”자는 유교의 근본정신인 “경천애인(敬天愛人)”의 머리글자이다, 이와 달리 경자바위에는 인근의 금성대군 신단(錦城大君 神壇)과 관련한 애틋하고 슬픈 사연이 함께 전하고 있다. 세조 3년(1457) 단종복위운동 실패로 참절당한 제 의사들의 시신을 죽계천 백운담에 수장시킨 후로는 밤마다 영혼들의 울음소리가 요란하므로 유생들이 밤 출입을 꺼리자, 주세봉이 영혼을 달래기 위하여 "경(敬)”자의 글자 위에 붉은 칠을 하여 제를 드리니 그때부터 울음이 그치게 되었다고 전한다.
경렴정에서 취한대 가는 길
경렴정 아래로는 죽계천을 건널 수 있는 돌다리를 건너 숲속길를 조금가면 취한대를 만날수 있다.
죽계천(竹溪川)과 취한대(翠寒臺) 취한대(翠寒臺)는 원생들이 시를 짓고, 학문을 토론하던 곳으로 1550년(명종 5년) 풍기군수 퇴계 이황이 세웠다. 취한이란 푸른솔, 맑은 내 등 자연경관에 도취되어 호연지기를 기른다는 뜻이다. 취한대 암벽 위에는 퇴계 이황이 여덟 그루의 백송을 심었는데 그중 네 그루는 고사((枯死 )하고 나머지 네그루만이 살아 있어, 옛 선현들의 숨결을 지금도 느끼게 하고 있다. 취한대(翠寒臺) 암벽(岩壁)에는 퇴계 이황이 새긴 경자바위가 있는데, 지신(地神)을 진혼(鎭魂)하기 위하여 새겼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 윗쪽에 새겨진 백운동(白雲洞)은 유서(由緖 : 어떤 대상이 긴 세월을 거쳐 오면서 가지게 된, 특별한 역사나 유래)를 전하기 위한 것으로 '신재문집(愼齋文集)'에 '마애제각백운명(磨崖題刻白雲命) 백일백운생백석(白日白雲生白石) 태수빈래애백운(太守頻來愛白雲) 백두여설안벽남(白頭如雪眼碧藍)' 이란 시(詩)가 있다.
취한대(翠寒臺) 원경 오랜 세월로 무너져 다시 터를 닦아 1986년에 지은 정자로, 취한대란 이름은 푸른 연화산의 산 기운과 맑은 죽계천의 시원한 물빛에 취하여 시를 짓고 풍류를 즐긴다는 뜻에서, 비취 취(翠)자와 차가울 한(寒)자에서 따온 것이라 한다.
취한대(翠寒臺) 정면
취한대(翠寒臺)의 측면 소백산에서 발원한 죽계천은 서원 앞을 지나 낙동강으로 흘러든다. 취한대는 퇴계 이황이 지었는데 공부에 지친 선비들이 잠시 쉬며 휴식하던 곳이다 취한대(翠寒臺)는 이황(李滉)이 세우고 손수 소나무, 잣나무, 대나무 등을 심어서 꾸민 곳으로, 오랜 세월로 무너져 다시 터를 닦아 1986년에 지은 정자로, 취한대란 이름은 푸른 연화산의 산 기운과 맑은 죽계천의 시원한 물빛에 취하여 시를 짓고 풍류를 즐긴다는 뜻에서, 비취 취(翠)자와 차가울 한(寒)자에서 따온 것이라 한다. 소수서원 입구에는 은행나무 두 그루가 서 있고, 바로 그 지점에서 지면이 한 단 높아져, 이곳부터 서원 경내임을 알 수 있다. 서원 출입문인 사주문(四柱門)으로 통하는 길 왼쪽으로는 성생단(省牲壇)이 있고, 오른쪽으로는 죽계수(竹溪水)가 내려다보이도록 지은 경렴정(景濂亭)이 있다. 신재 주세붕(周世鵬) 무릉잡고(武陵雜稿)에 있는 경렴정(景濂亭)을 읊은 시(詩)를 살펴본다다. 八月溪堂夜氣寒 팔월의 계당 밤 기운 차가운데 中庭俯仰二儀寬 뜰에서 천지조화를 살펴보네 若無太極乾坤息 만일 태극과 음양이 없어 쉰다면 誰似堯夫解弄丸 누가 소옹(邵雍, 邵康節)의 재주를 알아 주리요 磨崖題刻白雲名 벼랑을 깎아 백운동이라 하여 세기니 白日白雲生白石 밝은 날 흰 구름 백석에 피어나네 太守頻來愛白雲 내가 백운을 사랑하여 자주 찾으니 白頭如雪眼藍碧 눈처럼 하얀 머리에 눈은 푸르다네 주세붕(周世鵬)이 소수서원에 있는 정자인 경렴정(景濂亭)에 대해 지은 시(詩)로, 경관을 읊은 것 뿐 아니라 도학적(道學的)인 내용도 담고 있다.
경렴정(景濂亭)의 원경
오래된 은행나무 아래의 경렴정(景濂亭)
경렴정(景濂亭) 소수서원 정문밖 오른쪽 동쪽 절벽 위에 있는 경렴정(景濂亭)은 주세붕(周世鵬)이 서원 건립할 당시인 1543년에 세웠으며, 원생들이 시를 짓고 학문을 토론하던 정자로, 죽계수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있다
겸렴정 정면의 해서체(楷書體) 편액 경렴정(景濂亭)에는 2개의 현판이 걸려 있는데, 정면의 해서체(楷書體) 편액은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의 글씨이다
경렴정 마루 안쪽에 걸려있는 초서체(草書體) 편액 조선 중기의 명필 고산(孤山) 황기로(黃耆老)의 글씨이다, 경렴정의 "경렴(景濂)"은 염계(濂溪) 주돈이(周敦頤, 1017~1073)를 경모한다는 뜻으로, 주돈이는 장시성의 루산 개울가에 집을 짓고 살았는데 그 개울이 염계이며 개울가에 염계서당을 짓고 자신를 염계선생 이라 하였는데,중국 성리학의 틀을 만들고 기초를 닦은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정자에서는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죽계천(竹溪川)의 모습이 들어오고 있다
경렴정 마루와 난간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팔작지붕의 경렴정(景濂亭)은,따로 방을 들이지 않고 누마루만 둔 형태로 소박한 난간을 두른 정자다
정자의 마루 위에는천정 가구에는 수많은 시판들과 편액들이 올려져 있다,
마루 위에는 주세붕(周世鵬)과 퇴계(退溪) 이황(李滉), 금계(錦溪) 황준량(黃俊良), 설강(雪江) 안현(安玹) 등 당대 묵객의 시판이 걸려 있다.
경렴정은 원생들이 시를 짓고 학문을 토론하던 정자이다. 정자의 이름 '경렴정'은 북송의 성리학자인 염계(濂溪) 주돈이(周敦頣)를 경모하는 뜻으로 그의 호에서 빌어왔다. 성생단은 향사에 쓸 희생(犧牲)을 검사하는 단(壇)으로 생단(牲壇)이라고도 한다. 서원의 생단은 사당 근처에 있는 것이 관례인데, 소수서원의 생단은 서원 입구에 위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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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영주(榮州)의 서원(書院)Ⅰ-최초의 서원 소수서원(紹修書院) [세계문화유산 서원 ④]|작성자 ohyh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