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사랑 이야기/소수서원

소수서원의 슬픈 역사

단산사람 2020. 7. 15. 16:43

경상북도 영주의 옛 순흥 고을에 위치한
소수서원을 모르는 이는 아마 드물 것이다.
우리나라, 아니 이조의 첫 사액서원이요
수많은 정치인과 학자를 배출한 이 서원은
대원군 시절의 서원 철폐 정책에도 살아남을 만큼 그 유명세가 크다.
올곧게 뻗은 울창한 소나무와
사시장철 멈추지 않고 흘러내리는맑은 계곡물,
우람한 소백산 자락이 감싸는 듯 뻗어내린 이곳 지형(地形)은
범인(凡人)이 보아도 가히 천하 절승지라 일컬을 만하다.
이런 곳에서 심신을 연마하고 학문을 갈고 닦은 이들이
중앙 정계로 진출하여 크게 빛을 발하고
또한 후학들은 잘 길러냈다는 사실은
어찌 보면 당연지사라 할 수 있겠다.

인간은 작은 우주요 자연의 축소판이다.
불결하고 번잡스런 환경에 처해 있으면
인간 또한 혼미해지기 마련이고,
청정하고 수려한 곳에 몸을 의탁하고 있으면
그 기운이 스며들어 자신도 모르게
품이 넉넉해지고 의젓해지고 넓어진다.
인간과 자연의 합일(合一)은 그래서 아주 이상적이다.
예부터 풍수지리를 중히 여기고
집터와 묏자리를 고르는 데 유달리 신경을 쓴 데는 이런 연유가 있다.
지관(地官)이라는 직업이 생겨나고
아낌을 받은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그것은 오늘날도 예외가 아니다.
정계(政界)에서 성공하거나 돈을 많이 모은 재벌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조선 팔도의 명당 승지를 찾아다닌다.
때문에 내로라하는 지관들은 이들에게 아주 귀한 존재요 필수적이다.

명당 승지에 묏자리를 써서
그 자손들이 번창하고 발복(癹福)했다거나
그 자리를 둘러싸고 상쟁(相爭)한 끝에
서로 파내고 묻는 행위가 되풀이 되었다는
전설 같은 일화가 전해져 내려오는 것도
다 이러한 연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좌청룡 우백호, 배산(背山) 임수(臨水), 동남향….
풍수지리의 이런 용어(用語)는 과학적으로도
그 근거가 증명되고 있어 결코 지나칠 일은 아니라고 한다.
특히 부자유친(父子有親), 군신유의(君臣有義) 등
유교적 논리가 유달리 강조되어 온 조선의 왕권 사회에서
풍수지리사상이 중요한 자리 매김을 했음은 당연지사라 볼 수 있겠다.
죽기 전에 선친의 묏자리를 미리 봐 두는 것은 상식에 속했고,
모두 다 그러했다.

중국의, 저 유명한 맹모삼천의 이야기는
아직도 인구(人口)에 회자되고 있지 아니한가.
맹자의 어머니가 좋지 못한 곳을 피해
세 번을 이사했다는 이 이야기는
교육열이 세계 으뜸으로 꼽히는
오늘날의 우리나라 어머니들에게도
해당될 사항임은 물론이다.

소수서원 쪽을 가끔 지나치다 볼라치면
명당 승지란 말에 고개가 끄덕여질 만큼
과연 천하 제일의 명당 자리요 절승지다.
이씨 조선시대에서도 손꼽히는 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인 주세붕이
이곳을 눈여겨 보고 큰 계획을 세운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는 풍기군수로 재직하면서 이곳을 수시로 오고가며
그 계획을 실천에 옮길 날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이 천하 절승지는 이미 숙수사(宿水寺)란 절이 자리잡고 있었다.
숙수사, 물이 자는 절, 물이 자고 가는 절.
얼마나 시적(詩的)이고 그윽한 이름인가.
그러나 이 시적이고 그윽한 이름의 숙수사는
주세붕에 의해 헐리게 되고
승려들은 쫓겨나 뿔뿔이 흩어졌다.
숭유배불정책이 주류를 이루던 이조 왕권 사회에서
승려들은 아무런 힘이 없었다.
당시엔 유생들이 기생을 거느리고 절로 찾아들어
승려들을 종처럼 부리며 질탕하게 놀고 자기 일쑤였다.
이런 판국이니 어쩔 도리가 있었겠는가.
물이 자는 절, 물이 자고 가는 절.
숙수사는 그렇게 해서 없어졌다.
사라지고 말았다.
주세붕이란 유생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숙수사는 아마 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소수서원 대신 숙수사는 아직도 그 자리에 남아
부는 바람에 풍경소리를 울리고 있을 것이다.

............................청량사 지현스님 컬럼에서.......................................

 

소수서원 입구의 소나무 숲을 지나 서원 쪽으로 가다보면 숙수사(宿水寺)지 당간지주가 길 오른쪽 숲 속에 서 있다. 숙수사는 세조3년(1457) ‘단종복위운동’ 실패로 순흥도호부가 풍기군의 행정구역으로 편입되면서 없어졌다.

당간은 절에서 불교의식이 있을 때 부처와 보살의 공덕을 기리거나 마귀를 물리칠 목적으로 달았던 ‘당(幢)’이라는 깃발의 깃대를 말하며 이 깃대를 고정시켜 받쳐 세우는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문화재조사를 기록한 「순흥지」에 의하면, 원래는 당간석의 받침돌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나 지금은 높이 3,910mm 폭 520mm 의 거대한 당간지주만이 남아 있으며, 당간지주의 규모와 조각의 수준으로 보아 당시 숙수사의 품격을 짐작할 수 있다.

이 당간지주는 양 지주가 59cm의 간격을 두고 동서로 상대해 있는데, 상부로 가면서 3cm 가량 더 넓어지고 있다. 지주의 안쪽 측면으로는 아무런 조각이 없고 바깥 면은 중앙에 능선형으로 길게 종대를 새기고 있다.
정상에서 117cm 아래서부터 234cm까지 사이는 전면적으로 음각되었다.

전후 양 측면에는 양 지주 모두 폭 7cm의 외록선 문이 돌려지고 그 중앙에도 선으로 능선이 조식되어 있다. 정상부의 안쪽 면으로 장방형의 간구가 있고, 하단은 다듬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다.

한편 지대석은 1면에 원고의 받침이 새겨진 장대석이 양쪽으로 1매씩 놓여 있다.
당간지주의 형식이나 숙수사지의 여타 유물들과 관련해서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당간지주는 서원 경내에 변형된 용도로 남아있는 석조 불상대좌와 주춧돌 등과 함께 소수서원이 숙수사 옛터에 세워진 것임을 알게 한다.
서원 건립 시 비록 배척했던 종교인 불교에서 사용하던 물건이라도 성리학자들이 개의치 않고 필요에 따라 재활용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소수서원처럼 옛 절터를 서원으로 사용하게 된 배경은 배움의 도장으로서의 서원은 세속에서 멀리 벗어나 공부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고, 아울러 선현을 모시는 곳이라 산수가 뛰어나고 한적한 곳이 적합했기 때문이다.
일찍이 이황은 “서원은 성균관이나 향교와 달리 산천경개가 수려하고 한적한 곳에 있어 환경과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고 그래서 교육적 성과가 크다‘고 말한 바 있다.

한편 사찰에서 서원으로서의 기능 전이는 문화교체에 따른 공간점유의 계승이라는 측면도 있으나 새 질서의 수립이라는 정책적 측면의 의도도 있었다..................................................................................................................................


소수서원, 숙수사 옛터에 건설한 조선조 최초의 공인 사립 강학지

중앙 고속국도를 타고 안동까지 가다 보면, 뼈마디 굵은 경상북도 북부지역의 산들이 드센 힘을 자랑하며 우리의 시야로 육박한다. 왕복 4차선 확장공사를 하느라 흙을 잔뜩 실은 트럭이 뒤뚱거리면서 임시 출입구로 들어가고 인부들은 깃발을 흔들며 운전자들에게 경계를 강요한다. 예천을 살짝 스치며 영주방면으로 약 20분 가량 달리다 풍기 쪽으로 방향을 틀어 조금 들어가면 우리 나라에서 유일하게 세금 내는 소나무인 석송령(石松靈)의 오랜 연륜을 만날 수 있다. 그리고 곧 힛틋재 꼭대기에 올라서게 되는데, 그곳에선 소백산을 병풍처럼 두른 풍기읍이 한 눈에 내려다보인다. 풍기는 예로부터 전란을 피할 수 있다는 피병지(避兵地)로 많이 알려져 있을 뿐만 아니라 주세붕(周世鵬)에 의하여 재배가 장려되었다는 인삼 및 소백산 꿀사과, 약초 등으로도 유명하다.
우리가 함께 찾아가 볼 소수서원(紹修書院)은 이 풍기읍에서 약 10분 거리의 순흥면(順興面) 내죽리에 있다. 이 서원은 1542년 풍기군수 주세붕이 이곳 출신의 유학자 안향(安珦)을 추모하기 위하여 사당을 세운 데서 출발한다. 이듬해 유생들의 교육을 겸비한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설립하게 되는데, 이렇게 하여 우리 나라 최초의 서원이 세워지게 되었던 것이다. 1548년에는 풍기군수로 부임한 이황(李滉)이 서원을 공인화하고 나라에 널리 알리기 위하여 백원동서원에 대한 사액(賜額)과 국가의 지원을 요청한다. 이에 1550년 백운동서원이라는 이름 대신에 소수서원이라는 명종의 친필 현판이 내려지고 사서오경 및 ?성리대전? 등의 책과 함께 다양한 지원을 받게 된다.
실록에 의하면 ‘서원’이란 용어는 전라도나 평안도 등지에서 세종 때부터 이미 쓰이고 있었다. 그리고 경상도 단성의 도천서원(道川書院), 성주의 천곡서원(川谷書院), 전라도 부안의 도동서원(道洞書院)에서는 각각 문익점, 김굉필, 김구 등을 배향해 놓고 제사지내기도 했다. 그러니까 주세붕이 세운 백운동서원 이전에도 서원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 서원은 일반적인 서원의 세 기능, 즉 △ 유생들이 공부하는 곳, △ 선현을 모신 곳, △ 향촌 사회의 도서관을 만족시키지 못했다. 소수서원 이전의 서원은 이 중 한 가지만의 역할을 하며 존재했다는 것이다.
소수서원은 여느 다른 서원과 다른 점이 있다. 소수서원의 옛터가 바로 통일신라시대의 사찰인 숙수사(宿水寺)가 있었던 곳이기 때문이다. 경내에 보물 제59호인 당간지주(幢竿支柱)가 있는 것은 이를 증명하기에 족하다. 당간지주는 절의 깃발을 세울 때 쓰이는 버팀 기둥을 말한다. 숙수사가 언제 그 법통이 끊겼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다만 안향이 숙수사에서 수학하여 18세에 과거에 급제하였고, 그의 아들과 손자도 여기에서 수학하였으며, 1543년에 안향이 공부하던 옛터에 주세붕이 사당과 강당을 세웠다고 하니 고려 말기까지 내려오다가 조선 초기 어느 때에 법통이 끊겨진 것이 아닌가 한다. 사람들은 금성대군(錦城大君)과 이보흠(李甫欽)이 숙수사에 모여서 단종 복위를 꽤 했고, 이들이 처형당하면서 절도 함께 부셔졌다고 전하기도 한다.
1457년(세조 3년) 세종의 여섯째 아들인 금성대군은 순흥부사 이보흠과 함께 단종의 복위를 모의하다 처형된다. 수양대군이 정권 탈취의 야심을 가지고 왕을 보필하던 김종서를 죽이자 금성대군은 형의 행위를 반대하고 조카인 단종을 보호하기로 결심한다. 이 때문에 금성대군은 수양대군에 의해 삭녕으로 유배되었다가 다시 광주로 이배된다. 이후 수양대군은 결국 단종을 핍박하여 왕위를 강제로 물려받고 이에 반발하는 성삼문, 박팽년 등 사육신을 처형한다. 단종 또한 노산군으로 강봉하여 강원도 영월로 유배시키고 마는데, 이 때 금성대군은 삭녕에서 다시 이 지역, 즉 순흥으로 유배지가 옮겨졌다. 여기에서 이보흠과 함께 군사를 모으고 사족에게 격문을 돌리는 등 단종 복위를 계획하였으나 관노의 고발로 실패하고 말아 결국 반역죄로 죽임을 당한다. 금성대군을 추모하기 위하여 세운 금성단이 소수서원에서 얼마되지 않는 거리에 있는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다.
소수서원 옆으로는 소백산에서 발원하는 죽계천이 흐른다. 퇴계는 이를 보면서 ‘소백산 남 쪽 빈 터 옛 순흥고을, 흰구름 쌓인 곳에 죽계가 흐르네.’라고 노래한 적도 있다. 솔 바람이 푸르게 일어 물결을 일으키고 죽계천 암벽에는 주세붕이 썼다고 알려져 있는 붉은 ‘경(敬)’자가 음각되어 있다. 그리고 그 위에는 퇴계의 글씨로 백운동도 하얗게 새겨져있는데, 이 ‘白雲洞 敬’이란 단아한 글씨가 맑은 물에 비치고 있었다. 그 사이로는 물고기들이 유유히 ‘경’의 의미를 음미하며 흐르고 있다. ‘경’은 유학자들이 중요한 지표로 삼았던 심성용어이다. 대체로 이는 공경함, 엄숙함, 또는 삼가함 등으로 풀이되나 유학에 있어서의 학문과 생활을 총괄한 정신적 바탕을 의미한다. 이같은 생각이 조선조 성리학자들에게서는 더욱 철저히 인식되었다. 즉 외부적으로 엄숙 단정하면 자연히 정신이 하나로 집중되고 사물을 접함에 있어서도 바르며, 언어와 동작 또한 예에 어긋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이로써 유학자들은 성인의 심적 상태뿐만 아니라 그 행동을 본받을 수 있을 것이라 믿었던 것이다.
소수서원에 와서 죽계천 암벽에 새겨져 있는 ‘경’자를 보면서 그 의미를 이해하게 되면 소수서원의 내용을 모두 읽은 것이 된다. 이 서원에 배향되어 있는 안향 역시 ‘경’이 심성을 수양하는데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생각했다. 이 때문에 「유국자제생(諭國子諸生)」이라는 글에서 “성인의 도는 일상생활을 정확히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자식은 부모에게 마땅히 효도하고 신하는 임금에게 마땅히 충성하며, 예로써 집안을 다스리고 믿음으로 벗을 사귀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을 닦음에는 반드시 공경(敬)으로 해야 하며, 일을 할 때는 마땅히 정성을 다해야 한다.”고 했던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안향이 ‘경’을 강조하고, 주세붕이 이것을 커다랗게 써서 바위에 새겼으며, 이황이 그 위에 백운동이라는 글씨로 써서 존경을 표했던 역사적 의미를 알 수 있게 된다.
소수서원의 정문을 들어서면 바로 이 지방 선비들이 공부하던 강당이 나타난다. 이어서 재실과 사당, 영정각 등을 만나게 된다. 특히 영정각에는 현재 국보 제111호로 지정된 안향의 영정이 보관되어 있다. 두루 알다시피 안향은 원나라로부터 성리학을 수입하여 우리 나라에 전했던 인물이다. ‘회암(晦庵)’이라는 주자의 호를 따서 ‘회헌(晦軒)’이라 자호할 만큼 주자를 사모했다. 정치적 이유로 인해 숙수사가 부서졌지만 그 위에 유교적 정신을 가르치던 대표적 건물인 서원이 들어섰다는 것은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즉 불교의 퇴장과 유교의 등장이라는 사상사적 교체를 여기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영정각에 모셔진 안향에게서 그 시발점이 마련되며 그의 제자들이 조선의 정신을 주도했다는 점에서 성리학을 배우려는 사람이면 누구나 소수서원 뜨락에 조용히 앉아 솔잎사이로 흐르는 저 차단한 겨울 빛살의 의미를 되새겨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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