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전용사로, 교육자로, 각계지도자로
한 점 부끄럼 없는 선비의 삶을 살다 간 故 권상목 선생
6.25참전, 현리전투서 중공군에 포로, 포로교환 때 귀환
영어교사, 항소장학회 이사장, 도교육위원, 상공회의소 회장
무공수훈자회장, 소수서원장, 영주향교 전교 등 역임
고 권상목 선생(영주시민신문 한절마 마을탐방 때 2016)
2020년은 6·25전쟁이 발발한 지 70주년이 되는 해이다. 해마다 6월이면 6.25 특집기사를 준비했던 기자는 지난 1월부터 권상목 선생께 뵙기를 청했다. 6.25 전쟁담을 듣기위해서다.
그러나 행사일정상 또는 건강상 이유로 다음 달로 또 다음 주로 미루다보니 4월이 되었고, 어느 날 선생께서 타계하셨다는 비보를 듣게 됐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그날 이후 선생의 지인들과 가족들로부터 6.25 전황을 취재하는 과정에서 6.25 이 외의 미담(美談)들도 속속 드러나기 시작했다. 선생께서 각계각층 지도자로 활동하면서 보여준 열정의 리더십이 곳곳에 남아 있고, 한 점 부끄럼 없는 선비의 삶을 살다 간 그를 칭송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래서 이 또한 간추려 싣게 됐다.
가흥동 한절마에서 태어나
죽마고우, 좌로부터 순창병원장, 권상목, 최현우, 박형진 선생
선생은 일본의 군국통치가 극에 달하던 1928년 전통적 유교가문인 안동권씨 검교공파 11대 주손으로 태어났다. 선생이 남긴 글에 보면 “9살 때 참봉벼슬을 지낸 증조부로부터 천자문을 배우면서 어린시절을 보냈다. 지금은 냇바닥이 된 한절마(가흥리) 상당히 큰 골기와집에서 살았다. 비교적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덕에 중고등 교육을 받는 행운을 얻었다”고 썼다.
소년 권상목은 영주서부공립국민학교(현 영주초)를 졸업하고 대구로 가서 1946년 대구계성중학교(중학교과정)를 졸업하고, 1948년 대구대륜중학교(고등과정)를 졸업했다.
선생의 딸인 권정희씨는 “아버지께서 국민학교 다니실 때 순창병원 원장님, 최현우 학장님, 박형진 교수님과 절친하셨다”며 “네 분이 성인이 되어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영주 발전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하셨다”고 말했다. 1948년 3월 대구대학(현 영남대) 영문학과에 입학하여 대학생이 됐다. 그러고 1950년 2월 무섬마을 선성김씨에 장가드니 그 때 스물두 살 신랑이었다.
6.25 참전, 현리전투서 포로
1951년 9월 현리전투 상황도(회고록 참조)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발발하자 대학생(3학년) 권상목은 그해 8월 학도병으로 자원입대한다. 입대하자마자 가산·영천·안강·기계지구 전투에 투입됐다. 그리고 가을 육군종합학교 제7기(포간 제4기) 수료와 동시 소위로 임관(50.12.9) 육군 제7사단 포병 제16대대에 배속된다.
포병장교로 최전선에 투입된 권 소위는 1951년 5월 19일 중공군 대규모 춘계공세 때 현리·인제지구전투에서 중공군에 포로가 된다. 그리고 북한 지역으로 끌려가 28개월 동안 포로수용소생활을 하게 됐다.
선생의 둘째 아들 권하균씨는 “1950년 2월에 결혼하셨고, 8월에 학도병으로 종군하여 51년 5월에 포로가 되셨다”며 “북한으로 이송될 때는 수십 명씩 포승줄에 엮여 먹지도 자지도 못한 채 끌려갔다는 이야기를 아버지께 들었다”고 했다.
딸 권정희씨는 “수용소에 있을 때는 똑똑해 보이거나 대학생인줄 알면 몰래 불러내 어디론가 데려가곤 했기 때문에 바보처럼 행동했다고 하셨다”며 “어느 날 동료 포로들과 나무하러 갔다 온 사이 수용소 건물이 폭삭 무너져 그 안에 있던 포로 수십 명이 죽었는데 천운으로 살았다는 이야기도 들었다”고 했다.
포로교환 때 판문점서 헬기로…
선생이 남긴 글에 “포로가 되어 며칠 밤낮을 걸어가는 등 사선(死線)을 넘어야 할 때가 수없이 많았고, 절망과 좌절 그리고 극한 상황 또한 여러 번 겪어야 했다”고 회고 했다. 또 “귀환 (포로교환) 당시는 우측귀 고막 파열과 우측 대퇴부 파편상으로 걷지를 못해 판문점에서 헬기로 제3육군병원(현 서울수송초)으로 이송돼 1개월여 동안 수술·치료를 받았다”고 기록했다.
선생의 부인 선성김씨(김숙영)는 “전쟁이 나던 해(1950년) 8월에 전장으로 나간 사람이 해를 넘겨도 소식이 없고 또 한 해를 넘겨도 소식이 없자 가족들은 죽은 줄로만 알았다”며 “시조모님은 날마다 대문간에 나가 이제나저제나 손자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는데 끝내 보지 못하고 돌아오기 한 달 전 세상을 떠나셨다”고 말했다.
“언제 집에 오셨냐?”고 여쭈니, “죽은 줄만 알았는데 휴전되기 얼마 전(1953년 7월초) 포로교환자 명단이 신문에 난 것을 보고 살아 있는 줄 알았다. 그러고도 두어 달 뒤 집에 왔다가 광주포병학교로 복귀했다. 그 때 광주로 따라가서 신혼살림을 차렸다”고 했다.
장남 권하용씨는 “10여 년 전 가족 모두가 아버지 어머니를 모시고 6.25 전적지 순례를 갔었다. 오대산 근처를 지날 때 여동생이 ‘중공군에 포로 된 곳이 여기쯤 되나요?’라고 여쭈니, 아버지는 ‘인제군 현리의 어느 계곡으로 기억하고 있다’고 하셨다. 아버지는 그 때 그 ‘악몽의 전투현장’을 찾아보려고 내내 창밖만 내다보셨다”고 했다.
선생의 죽마고우 박형진 전 교수는 “6.25전쟁이 터졌을 때 우리 친구들은 대학생이었는데 우국(憂國) 학생들은 나라를 구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학도병 지원을 했다. 상목 친구는 포병장교로 종군했는데 중공군에 포로가 되어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기다가 포로교환 때 귀환했다”면서 “그 후 군에 복귀하여 포병학교 교관으로 복무하다 제대한 걸로 안다”고 말했다.
영어교사로 교단에 서다
선생의 선대는 대대로 지역유림을 선도해온 가문 중 하나였다. 1940년대 접어들면서 영주유림이 주축이 되어 중학교 설립을 추진할 때 선생의 조부께서 학교부지(현 제일고 뒷산)를 기증하여 학교설립을 적극 지원했다. 선생은 선대의 뜻에 따라 1956년 교사가 됐다. 봉화영주안동 고등학교에서 15년간 영어교사로 재직했다. 그리고 경북도 6-7대 교육위원(1984-1991)으로 활동하면서 밝은 교육상 구현에 힘쓰는 한편 낙후된 교육시설을 개축하는데 노력하여 영주중, 영주여고 등 교사 개축공사가 이 때 이루어졌다.
항소장학문화재단 설립 주역
항소장학재단 이사장 때(2010)
항소(恒素)장학문화재단은 금진호 전 국회의원의 선친 금교성(號 恒素) 선생의 유지를 받들어 1993년 설립됐다. 인재육성을 위한 장학사업을 펼쳐 매년 영주출신 고등(100만원)·대학생(400만원) 16~18명에게 장학금을 지급하여 지금까지 총 572명에게 9억4천200만 원을 지급했다.
초대 금진호 이사장에 이어 2002년부터 2010년까지 권상목 이사장이 장학회를 이끌었다.
장학회 조훈 이사는 “항소장학회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며 “금진호·권상목 두 이사장님은 영주를 이끌어 나갈 인재를 육성하고, 어려운 환경의 학생들에게는 공부의 길을 열어주는 등대의 빛과 같은 역할을 하셨다”고 말했다. 김의섭(순흥면 석교1리) 사무국장은 “설립자 금진호 이사장에 이어 그의 아들 금한태씨 또한 최근 10여 년간 4억 원을 출연하셨다. 대를 이은 장학사업에 경의를 표한다”고 말했다.
지역경제의 새로운 장을 열다
일본 홍진상공회 방영 환영식(1987)
선생은 1982년 12월부터 1988년 6월까지 영주상공회의소 7-8대 회장을 역임했다.
선생의 회고록에 보면 “당시 소백산국립공원 지정을 위해 위원회를 구성하여 동분서주한 덕에 1987년 국립공원으로 지정됐다. 또 적서농공단지, 가흥농공단지를 최초로 지정받았고, 몇 개의 공장을 어렵게 유치한 것이 큰 보람”이라고 적었다.
송병권 사무국장은 “권상목 선생께서 5년 6개월 동안 회장으로 재임하시면서 지역경제 발전의 새로운 장을 만들어 주셨다”며 “상공인들의 한일교류가 최초로 추진되었고, 농공단지가 최초로 지정되어 중소규모의 공장을 유치하게 된 때가 바로 이 무렵이었다”고 말했다.
무공수훈자회 전적지 순례(2011)
무공수훈자회 영주지회장
무공수훈자회는 국가수호유공단체로 영주에는 60여명의 회원이 있다.
선생은 2009.12~2017.5까지 8년간 무공수훈자회 영주지회장을 역임하면서 회원들의 건강과 복지를 위해 동분서주했다. 김종규 사무국장은 “권상목 회장님께서 본회 회장으로 재임하는 동안 세계정세와 남북관계에 따른 안보 걱정을 많이 하시는 한편 회원들의 건강과 복지증진에 깊은 관심을 보이셨다”며 “2010년 명품병원, 2011년 청하요양병원과 MOU를 체결하여 회원들의 건강관리를 도왔으며, 호국안보연찬회 및 전적지순례 등을 통해 사기앙양에도 크게 힘쓰셨다”고 말했다.
소수(紹修)의 정신은 ‘인재양성’
선생은 한국의 서원을 세계유산으로 등재 신청할 무렵인 2015년 소수서원 원장에 취임했다.
그해 춘향 때 권 원장은 “소수서원은 우리나라 대표서원으로서 그 가치를 세계인이 공유할만하다고 판단된다”며 “소수의 정신은 ‘학문장려’와 ‘인재양성’에 있다. 이 소수의 정신이 세계로 미래로 전파되길 진심으로 기원한다”고 말한 기사가 남아 있다. 서승원 소수서원 도감은 “권상목 원장님께서 원장으로 계실 때 소수서원 세계유산 등재 분위기가 한 참 무르익을 때였다. 2016년 등재 철회의 아픔을 겪기도 했으나 2019년 등재 결정이 났다. 그날 권 원장님께서 저에게 전화를 걸어 축하해 주시면서 매우 기뻐하셨다. 앉은 자리마다 인재양성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신 권 원장님은 영주유림을 대표하는 선비 중 한 분이셨다”고 말했다.
“6년간 명륜교육이 큰 보람”
영주향교 석전대제 음복례(2005)
명륜교육이란 교육을 통해 인간사회의 윤리를 밝힌다는 뜻이다. 선생은 2001년부터 2006년까지 6년간 영주향교 전교를 지냈다. 선생이 남긴 글에 보면 “서구문물의 무분별한 유입으로 사회생활의 기저가 되는 정신문화는 퇴조하고, 사회범죄는 나날이 늘어나 흉포화 되어가니 우리 사회의 지주역할을 할 정신문화교육(인성교육)이 절실하다. 재임 6년간 명륜교실을 개설하여 미력이나마 봉사한 일이 생애의 큰 보람으로 기억 된다”고 했다.
박찬극 영주향교 전교는 “권상목 전교님은 전통과 현대를 오가면서 자신을 꼿꼿하게 지켜온 현대의 선비이셨다”면서 “좌고우면 하지 않으셨고, 안 되는 것은 안 된다고 분명히 말씀해 주셨다. 일생동안 한 점 부끄럼 없는 선비의 삶을 고집하신 선비이셨다”고 말했다.
송상도기념사업회 발기인 추대(2013)
김숙진 전 전교는 “고인께서 6년 간 전교로 활동하는 동안 영주향교 역사상 최초로 ‘향교지’를 발간하였고, 명륜교육의 첫 단추를 꿰셨다. 또 기려자송상도기념사업회 발기인으로 추대되는 등 지역의 모든 행사를 자문하고 지도하셨다. 영주의 큰 선비 한 분을 잃어 안타깝다”고 말했다.
2014년 소수서원에서
결혼 67주년기념 축하연(2017)
국가유공자 위패 봉안식(2020.5.22. 충혼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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