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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마을 탐방[24] 단산면 병산1리

단산사람 2014. 9. 12. 22:55

조상을 우러러 그리워(瞻慕)하며 학문에 힘쓴 마을
우리마을 탐방[24] 단산면 병산1리
[486호] 2014년 08월 28일 (목) 10:33:11 이원식 기자 lwss0410@hanmail.net

   
▲ 병산1리 마을전경
고려 공민왕 때 황승후가 개척한 청원황씨 집성촌
정월보름날 수호목(갈참나무)과 수호석(허장군석)에 동제

서천교에서 회헌로를 따라 순흥 방향으로 향한다. 동촌2리 조개섬마을 앞 회전교차로에서 단산방향으로 우회전해 백산서원과 구고서원이 있는 사천리 마을을 감아 돈다.

무궁화 꽃길을 따라 가다보면 우측으로 구구교(다리)가 나오고 좌측에는 홍유한유적지 표지판도 보인다. 바우(파회동)마을을 지나 나만골(남동) 산모롱이를 돌아서면 옛 단산초등학교 건물이 나타나고 그 뒤로 덩그러니 갈참나무가 보인다. 여기가 창원황씨 집성촌 병산1리이다.

   
▲ 옛 단산초등학교
옛 학교 운동장엔 연록색을 띤 키 큰 플라타나스가 서 있다. 마을 앞 들에는 삼포밭이 넓게 자리 잡았고 사과원과 포도원도 있다. 넓은 들녘에는 추석을 앞 둔 벼이삭이 바람에 일렁거리고 개울가에는 버드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다.

지난 16일 병산1리 마을 입구에 있는 소산정에서 황화식 이장과 황충식 노인회장으로부터 마을의 역사와 문화재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 황화식 이장
   
▲ 황충식 노인회장

병산리의 유래
병산은 조선시대 때 순흥도호부 일부석면에 속했다. 이때 병산은 병(甁) 병자 ‘甁山’이라 했다.(참고:순흥지에 甁山이라 기록되어 있음) 이 마을에서 대지곡(옛날 순흥방향에 있던 마을)으로 이어지는 마을의 지형이 병 주둥이와 병목처럼 생겼고 병의 넓은 부분에 큰 마을이 있어 흡사 병(甁) 모양과 같아 甁山이라고 불렀다.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 개편 시 마을 뒤편 좌우로 옥녀봉과 군자봉이 솟아 있고 앞산이 병풍을 두른 듯 아늑하게 마을을 감싸 주고 있다 하여 병산(屛山)으로 개칭했다.

   
▲ 숭보사(사당)
이는 일제가 우리 고유의 마을 이름을 없애려는 속셈에서 나온 민족문화 말살정책의 하나로 강제로 일본식 지명으로 강요당한 것이다. 우리의 전통마을 이름을 되찾기 위해 병산을 한자로 명기할 때는 원래대로 甁山이라고 쓰는 게 옳을 것 같다.

   
▲ 한계순 부녀회장
병산 입향조
창원황씨가 이곳에 터를 다진 것은 고려 공민왕(1357) 때 중랑장(中郞將)을 지낸 황승후(黃承厚)가 그의 본향인 창원으로부터 순흥부 병산(甁山), 지금의 단산면 병산리에 옮겨 살면서부터 시작됐으니 정착 연대가 매우 오랜 뿌리 깊은 가문이다.

아들 황처중은 조선 초에 영일감무를 지냈으며, 황승후의 손자 황전은 통례원봉례(通禮院奉禮)의 벼슬에 올랐다.

황전의 손자 황희성(黃希聖)이 그의 고숙(고모부)되는 사직(司直) 노계조(盧繼祖)가 사는 희여골로 옮겨 자리 잡게 된 것은 고숙이 자식이 없어 시양(侍養)을 하려고 함이었다. 창원황씨들이 희여골에 정착하자 인물이 쏟아져 문운(文運)을 크게 떨치게 됐다.

봉례공의 후손들은 14세까지는 병산을 중심으로 백동, 문단, 대룡산, 서울·충주, 남양주 등지에 많이 살고 있으며 연2회(3·9월 초정일) 이곳에 모여 숭보사(崇報祠)에서 향사를 지낸다.

   
▲ 첨모당(영주시문화재 제315호)
황전이 조상을 우러러 후학을 기르던 첨모당
마을 안쪽에 있는 첨모당(瞻慕堂,영주시문화재 제315호)은 황전(黃전, 1391〜1459)이 세종 11년(1429)에 학문을 연마하고 지방 유생들을 가르치기 위해 세운 건물이다.

   
▲ 황규식 할머니
앞면 3칸, 옆면 1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의 단아한 건물이다.

창호 수법이 오래된 법식을 잘 지니고 있는데, 특히 마루방 전면에 외여닫이 굽널 세살문과 외여닫이 울거미 띠장널문이 함께 달려 있는 것이 특징이다.

첨모당이란, 선조들의 학덕과 업적을 우러러 사모하는 집이라는 뜻이다. 황전은 1458년(세조4)에 사직하고 순흥 병산에 내려와 은거했다.

그 후 1535년 가선대부 공조참판에 증직되고 그 3년 후인 1538년에 고택을 중수하여 첨모당 현판을 걸었다. 첨모당 앞에 회화나무가 있고 그 옆에 신위를 모신 숭보사가 있다.

   
▲ 갈참나무(천연기념물 제285호)
병산리 갈참나무의 내력
우리나라에서 갈참나무가 천연기념물(제285호)로 지정된 것은 이 나무가 유일하고 갈참나무를 마을의 수호목으로 정한 것도 이 마을뿐이다.

병산리 갈참나무는 황전이 심은 것이라고 전한다. 1426년(세종8년) 조회와 의식을 담당하던 통례원봉례를 지낸 그가 낙향하면서 심었다고 하니 588년 전의 일이다. 황전은 왜 갈참나무를 심었을까.

아마도 흉년에 대비해 구황(救荒)의 의미로 심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옛부터 흉년이 들면 도토리가 많이 열린다는 말이 있다. 나뭇가지를 자세히 쳐다보면 구불구불하면서도 우산살처럼 퍼져있어 보는 사람들을 감탄케 한다.

   
▲ 월산방 백일홍길
백일홍의 집, 월산방(月産房)
병산리 갈참나무 옆에 백일홍의 집이 있다. 집으로 들어가는 길에 수만 송이 백일홍이 활짝 피어나 장관(壯觀)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 황영두 씨
이 집은 이 마을 출신 황영두(69)·한계순(64) 부부의 집으로 10여 년 전 고향으로 돌아와 옛 터에 황토방을 지었다.

두 부부는 자연에 묻혀 시와 음악으로 인생 2막을 아름답게 열어가고 있는데 황토방 입구에는 월산방(月産房)이란 당호가 걸려있다. 부인 한계순 씨는 시인이다.

2010년 문학세계 신인문학상 수상으로 등단하여 2011년 첫 시집 ‘또 하나의 나이테’를 출간했다.

생명체 하나하나를 어여삐 품으며 자연에 감사하고 자연을 노래하는 시인이다. 한 시인의 갈참나무 사랑은 남다르다. 다음은 한 시인의 갈참나무 시(詩)다.

“도도히 흐르는 세파에 굴하지 않고/육백년 인고를 빼곡히 채워/베풀고 가르치는/자랑스러운 문화재/병산 마을 터줏대감/장엄한 기상으로/믿음직한 서낭으로/아름드리 가슴을 덕으로 풀어헤쳐/사계절 풍경을 기꺼이 나눠주며/아린 옹이에 겨우살이 터를 주고/휘어진 가지로 텃새 둥지 품어주며/우리네 삶의 길을 길이길이 지켜주네”

   
▲ 마을수호석(허장군석)
허 장군이 던진 돌, 마을 수호석 됐다
아주 오랜 옛날 이 마을에 힘이 센 허 장사가 살았다고 한다.

   
▲ 김씨 할머니
하루는 젊은 장정들이 마을 뒤에서 제일 높은 시루봉에 올라 돌던지기 시합을 했는데 허 장사가 던진 돌이 10여리를 날아 마을 앞 논에 떨어졌다고 한다.

이후 마을 사람들은 허 장사를 ‘허 장군’이라 불렀으며 허 장군이 던진 돌을 신성시 하다가 마을의 수호석으로 모시고 동제를 올린다.

이 마을은 해마다 정월보름날 자시에 수호목(갈참나무)과 수호석(허장군석)에 동제를 지낸다.

정월 초에 제관(초헌관, 아헌관, 종헌관)과 축관을 정하고 도가를 정한 다음 제수를 정성껏 마련하여 서낭제를 올리고 풍년 농사와 마을의 평안을 기원한다.

   
▲ 권영 씨
   
▲ 임춘희 씨
병산리 사람들
마을 입구에 소산정이란 정자가 있다. 옛적에 소산서원이 있어서 그 이름이 지금까지 전해져 온다고 황충식 노인회장이 전해줬다.

소산정은 그늘이 좋고 바람이 시원하다. 소산정에서 김씨 할머니(81)와 권영(78)씨, 이병일(70)씨를 만났다. 세 분은 마을의 어제와 오늘의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전화부를 가지고 와서 마을 사람들을 소개해 줬다.

창원황씨 종가집 딸 황규식(85)씨는 “100칸도 넘는 창원황씨 종택이 10여 년 전 헐렸다”며 아쉬워 했다. 머리가 허연 임춘희(77)씨, 원두막에서 만난 정제극(72)씨 모두 병산리에서 50여 년 동안 살아오면서 마을의 역사가 된 사람들이다.

   
▲ 정재극 씨
   
▲ 이병일 씨

황화식 이장은 단산면 주민자치위원회 위원장으로 면발전을 위해 불철주야 매우 바쁘다. 황 이장이 경영하는 연이네포도원의 ‘단산포도’는 전국 각지 택배로 배달된다.

이 마을은 아랫마을 남동을 포함해 70가구에 140여명이 살고 있으며 창원황씨는 20여호만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