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도령(춘향전)의 실존인물 성이성의 고향마을 | ||||||||||||||||||||||||||||||||||||||||||||||||||||||||||||||||||||||||||||||||||||||||||||||||
우리마을 탐방[21] 이산면 신암3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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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전이 시묘살이 할 때 초막, 이 마을에 있고 이산면 신암3리 가는 길 = 영주시내에서 봉화통로로 나가 상망교차로에서 우회전한 다음 단운교차로에서 직진하여 봉화로 향한다. 시가지를 벗어나 36번국도(자동차전용도로)에 올라 조금만 가다보면 첫 번째 내리는 곳이 신암교차로이다. 여기서 내리면 바로 우측에 ‘봉화정씨시조공제단소(奉化鄭氏始祖公祭壇所)란 높은 안내표석이 길손을 맞이한다. 여기서부터 신암들을 지나 석포교까지 신암3리이다. 신암3리 가는 길은 또 있다. 영주고등학교 앞을 지나 이산면사무소, 흑석고개, 흑석사 앞, 이산초등학교 앞을 통과하여 석포교 직전에서 마애삼존불 방향으로 좌회전하면 바로 신암3리에 이르게 된다. 지난 20일 신암들은 검푸른 벼의 물결이 일렁이고 있는 가운데 수십 마리의 백로 떼가 이곳저곳에서 한가롭게 먹이를 찾고 있었다. 이날 김완식 이장의 친절한 안내와 자료협조로 신암3리 이곳저곳을 자세히 탐방할 수 있었다.
마을의 유래 = 신암3리는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시 영천군 말암면의 본리와 신천리가 합하여 신암리가 됐다. 이 마을은 내성천과 신암들을 앞마당으로 하고 얕은 산을 뒤로하고 있으며 골짝마다 작은 동네가 산재해 있는 마을로 영주에서 가장 넓은 면적을 가진 마을이다. 석포교 삼거리에서 마애삼존불 방향으로 1km 쯤 가다가 좌측에 만나는 동네가 ▶‘미륵데이’다. 길가에 보물 제680호 마애삼존불이 있는데 옛부터 마을사람들이 섬겨오면서 ‘미륵데이’라고 불러왔다. ‘미륵데이’ 마을에서 서쪽 골짜기로 500m 쯤 올라가면 산골짝에 ▶‘사금이(沙琴)’라고 불러오는 마을이 있다. 옛날 내성천이 범람하여 들판이 백사장으로 변했는데 청정백사장에서 풍류객들이 거문고를 즐기던 곳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마을 앞 넓은 들을 사금평이라 부르고 있다. 또한 마을 앞산에는 퇴계선생의 첫 번째 부인인 허씨부인의 묘소와 문창계 선생의 묘소 등 많은 묘가 있어 영남 제1의 명당터로 꼽고 있다. ▶속골(松谷)은 미륵데이에서 400m 쯤 올라가서 좌측으로 난 길을 따라 올라가면 골짝 좌우에 산재해 있다. 소나무가 많아서 송곡이라 부르다 ‘속골’로 굳어진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골짝 우측에 이도령의 실제 인물인 성이성의 묘가 있다. ▶새터(新基洞)는 마을노인회관이 있는 동네로 1783년 경 이인행이란 선비가 마을을 개척하였다 하여 그의 호 신야(新野)의 새 신자를 따 ‘새터’라 했다고 한다. ▶새마(新村)는 새터 북쪽 언덕 넘어 봉화정씨제단소 입구 인근에 있는 마을로 옛날 김안노라는 선비가 살았다고 하여 안노리라 불렀는데 오랜 세월 발음이 변하여 에노리라 부르다가 마을이 새롭게 변했다고 하여 ‘새마’로 부르게 됐다. ▶배진기(舟津)는 봉화통로 국도에서 영동선 철도건널목을 건너 오른편으로 들어서면 옛정미소가 있는 마을인데 옛날 나루터가 있었다 하여 배진기라고 부르게 됐다 한다. 300년 전 홍수 때 내성천 물길이 실내쪽으로 돌려지면서 넒은 들이 만들어 졌다. 이 외에도 솔고개, 갈매재, 피골, 제궁골, 말상골, 산능골, 상나무골, 긴밭골 등이 있었으나 지금은 사람이 살지 않는다.
이도령의 실존 인물 성이성의 고향 = 춘향을 성춘향이라고도 한다. 성이성의 성을 춘양 이름 앞에 갖다 붙인 것이다. 계서 성이성은 1595년(선조28년) 임진왜란 중 선성김씨 집성촌이었던 이곳(신암리 또는 문단으로 추정) 외가에서 태어났다. 정확한 집터는 알 수 없으나 계서정과 성이성의 묘가 있는 것으로 봐서 계서정 인근에 살았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성 도령(13-16세)은 부친(성안의)이 남원부사를 지내던 시기인 1607년부터 3년여 동안 남원에서 부친과 함께 살았다. 이 때 성 도령과 어떤 처녀(또는 춘향)와 만남이 있었다. 성이성은 나중에 암행어사가 되어 호남에 여러 차례 갔다. 암행을 풀고 강한루에서 늙은 기생을 만나 긴 이야기를 나누며 옛 추억을 더듬었으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를 바탕으로 어떤 유능한 작가가 사실을 절반으로 하고 구전 등을 조합하여 춘향전을 창작한 것으로 보고 있다. 신암교차로 인근에 계서정이 있다. 성이성이 말년에 이곳에 초당을 짓고 학문 증진과 후학 양성에 힘썼다고 한다. 계서정은 임금이 사직한 성이성이 하도 그리워 몰래 찾아와 하룻밤 묵고 갔다는 전설이 전하기도 하는 곳이다. 선생의 묘는 외가 인근에 있었다고 전해지며 현재 신암3리 속골에 있다. 특히 선생의 다섯째 아들 문하(文夏)는 젊은 나이에 도산서원 원장을 역임하기도 하는 등 학문이 뛰어난 집안이다. 성이성 묘를 찾을 때 길을 안내 해준 유정수(78. 속골) 어르신과 계서정 입구를 몰라 헤맬 때 길을 가르쳐 준 우진영(66. 새마)씨와 박윤희(80) 할머니께 감사드린다.
정도전이 시묘살이 하던 곳 = 정도전(1342-1398)은 영주 구성공원 아래에 있는 삼판서 고택에서 태어나 10대 중반이 되었을 때 아버지(정운경. 1304-1366)가 개경으로 벼슬을 옮기자 아버지를 따라 개경으로 갔다. 정도전이 24살 때인 1366년 1월에 부친(정운경)상을 당해 영주로 내려왔다. 1개월이 넘도록 산소자리를 구했으나 길지를 얻지 못했다. 하루는 한자나 되는 눈이 왔는데 이산면 신암리 선영 구내에만 한 점의 눈도 없으므로 그 자리에 장사 지내니 사람들이 모두 이상하게 여겼다고 한다. 같은 해 12월에 또 모친(영천우씨)이 돌아가시니 전후로 3년간 시묘(侍墓)살이를 했다. 정도전은 아버지 묘소 앞에 초막을 짓고 시묘살이를 하는 상중에도 학문에 전념하는 열정을 보여 줬다. 이 때 영남의 학동들이 배우러 왔으므로 그들을 잘 가르쳐서 모두 등과시켜 좋은 벼슬에 오르게 했다. 신암리에 있는 봉화정씨제단소에는 정운경의 묘와 모현사(慕賢詞), 문천서당(文川書堂) 그리고 봉화정씨추원제단이 있다. 문천서당은 정도전의 행덕을 추모하기 위해 후학들이 세웠다고 전한다.
퇴계의 부인 김해허씨의 묘 = 김완식 이장의 안내로 사금 앞산에 있는 허씨부인 묘를 찾아갔다. 이 묘는 퇴계 이황(1501-1570)의 첫 번째 부인인 김해허씨 묘이다. 퇴계는 20살이 되던 1521년에 당시 영주 초곡(草谷, 현 조암동 사일마을)에 살던 진사 허찬의 맡 딸에게 장가를 들었다. 허찬은 원래 의령에 살았는데 청풍군수를 지낸 문경동의 사위가 되면서 영주로 이거했다.
문경동은 성종 때 생원·진사 양시에 모두 합격한 후 문과 급제까지 한 인물로 당시 인근에서 제일가는 석학으로 추앙받았다. 또한 대대로 벼슬한 집안으로 가세가 매우 부유하였다. 이에 퇴계가 처가에서 공부하며 대학자로 성장하는데 경제적 뒷받침이 되었다. 허씨부인은 혼인한지 이듬해인 1522년 장남 준(寯)을 낳고 5년 뒤인 1527년 차남 채(寀)를 낳은 후 산독을 풀지 못해 향년 27세로 돌아가셨다. 이날 사금마을의 옛 모습을 설명해 준 유인수(75,사금)씨와 미륵데이 마을의 옛 이야기를 전해 준 이희선(72, 미륵데이)씨께 감사드린다.
신암3리 사람들 = 김완식 이장은 “신암3리는 현재 105가구에 230명이 살고 있다”며 “벼농사가 제일 많고 수박, 고추, 약초 등을 많이 재배하고 있다”고 했다. 김 이장은 또 “농가 소득을 올리려면 전통농업만으로는 성공할 수 없다”며 “경험에 의한 전통영농과 학문에 의한 과학영농이 조화를 이룰 때 농업이 발전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요즘 젊은 농업인들은 고구마 작목반을 조직하여 1천마지기의 농사를 지어 대형백화점에 연중 납품하는 등 새로운 농업경영시대를 열어가고 있다”고 덧붙였다.
24일 오전 마을사람들이 회관에 모인다기에 두 번째 이 마을을 찾았다. 한방 무료 검진이 있어 면사무소로 가는 길이라고 한다.
이상국(75, 새터)노인회장, 이옥희(63, 새마)부녀회장, 열여덟 살에 새마로 시집와 70년을 살았다는 권수춘(87) 할머니, 마을의 지킴이로 살아 온 김종우(78, 새터)씨 등 20여명이 모여 마을표석을 가운데 두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마을 사람들은 “농사는 3합이 맞아야 한다. 즉 하늘(바람과 비)과 땅(토지와 시설)과 사람(기술과 노력)이 합력해야 풍년 농사를 지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이원식 프리랜서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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