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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마을 탐방[22] 평은면 강동1리

단산사람 2014. 8. 26. 13:48

공민왕 몽진길에 ‘왕머리’란 지명 남긴 마을
우리마을탐방[22] 평은면 강동1리
[484호] 2014년 08월 14일 (목) 18:16:20 영주시민신문 okh7303@yjinews.com

   
▲ 왕유마을-전경
바위에 뿌리내린 불가사의한 느티나무(금계)
기독교상인가 불상인가... 논란의 석상이 있다(왕유)

평은면 강동1리 가는 길 = 영주시내에서 자동차전용도로를 타고 평은면사무소가 있는 금광리로 간다. 면사무소 앞을 지나 버스정류소와 평은우체국 사이로 난 길을 따라 기프실마을을 통과하여 구마이재를 넘으면 옛 평은역 자리가 나온다.

   
▲ 금계마을-전경
멀리 우측으로 금강마을을 바라보면서 좁은 길로 직진하여 낮은 언덕을 넘으면 눈앞에 내성천과 송리원철교터가 내려다보이고 영주댐 수변도로공사가 한창이다. 덤프트럭이 분주히 다니고 있는 가운데 우측 산꼭대기에는 출렁다리 건설을 위해 높은 콘크리트 구조물이 세워져 있다.

송리원철교는 지난해 6월 철거되었으나 송리원교는 아직 그대로 남아 있다. 송리원교를 건너 100여m 쯤 올라가면 금계·왕유 표지판이 나타난다. 강동1리는 금계와 왕유로 나눈다. 좌측으로 가면 금계마을이고 우측으로 직진하면 왕유동으로 갈 수 있다. 길가에 금계국이 활짝 핀 지난달 27일 강동1리에 가서 전하집 이장님의 안내로 마을 곳곳을 둘러봤다. 참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은 마을이다.

   
▲ 신기한 느티나무
불가사의한 느티나무 = 금계마을은 옛날에 금광산이 있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마을 안쪽 가장 높은 곳에 불가사의한 느티나무가 있어 보는 사람마다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느티나무는 틈도 없는 바위에 뿌리를 내리고 바위와 한 몸이 되어 살아가기 때문이다.

바위에는 '금계옥대 공이산좌(金鷄玉垈 公李山座)무자소춘(戊子小春)'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이 마을 이종성 선생에 의하면“지금으로부터 70여년 전 공주이씨 선조께서 글씨를 쓰고 석공이 바위에 글씨를 새겼다”고 했다.‘옥같이 좋은 터인 금계마을은 공주이씨가 터를 잡고 살아 온 자리다’라는 뜻으로 무자년 음력 시월에 썼다고 전해진다.

이곳에 수백년동안 집성촌을 이루며 살아온 공주이씨들의 자부심을 엿볼 수 있는 글귀라 할 수 있다. 영주의 공주이씨들은 공숙공파로 이명덕(1373-1444)의 후손들이다. 이명덕의 손자 진(畛, 43세)은 한양에서 나고 자라다가 36세(1455)되던 해 전라도 임피 현감으로 있을 때 세조의 왕위찬탈의 불의을 보고 관직을 버리고 영천(영주)으로 이거하여 은둔한다.

진이 영주에 입향 후 아들 대에서 영천, 순흥, 풍기로 흩어져 세거하였고 다시 손자 대에 이르러 대부분 예천으로 이거한 가운데 겸(겸)과 함(함)이 영주에 뿌리내려오다가 후대에 겸의 후손은 타지로 이거한 반면 함의 후손은 대대로 영주에 세거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진의 증손자인 석간(碩幹, 1509-1574)은 천하명의로 팔도에 이름을 떨친 바 있다.

   
▲ 금계왕유표지판
공민왕이 머물다 간 마을 왕유동(王留洞) = 1361년 홍건적이 침입해 개경이 함락될 위기에 놓이자 공민왕은 몽진(임금의 피난)을 해야 했다. 고려 조정은 여러 가지를 고려한 끝에 피란지로 결정한 곳이 흥주도호부(순흥)였다. 공민왕 일행은 그 해 11월19일에 개경을 출발하여 충주를 거쳐 소백준령을 넘어 12월에 순흥에 도착했다.

영주에는 부석면 남대리, 단산면 마락리 인근에 어래산, 행재소(行在所), 행궁터 등 공민왕의 어가행렬이 지난 자취마다 지명을 남겼다. 이로써 공민왕은 죽령을 넘지 않고 고치령이나 마구령을 넘어 순흥으로 왔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공민왕은 순흥의 날씨가 너무 추워 안동으로 다시 옮기게 된다. 공민왕 일행은 안동으로 가는 가장 지름길인 송리원역 방향으로 길을 잡아 두문재를 넘게 된다. 공민왕 일행은 높고 긴 고갯길을 오르다가 고갯마루 아래에 우물이 있어 말에서 내린다.

   
▲ 공민왕이 마신 우물
공민왕은 바가지 물을 한 모금 마신 후 노국공주에게 권한다. 노국공주는 지친 모습이었으나 감로수를 마신 후 힘을 내어 두문재를 넘었다고 전한다. 이 일이 있은 후 왕이 머물다 간 곳이라 하여‘왕머물’이라고 부르다가 왕머리가 됐다.

지금도 공민왕 일행이 머물다가 간 우물이 그대로 남아 있다. 그 후‘왕머리’라는 고유지명에 한자를 붙이면서 왕유동이라고도 부르게 된다. 당시 공민왕이 순흥에 머물 때 영주지역에 몇 점의 현판 글씨를 남겼다. 그것이 바로 부석사 무량수전 현판과 순흥 봉서루 현판 등이다.

   
▲ 의문의 부처상
횡성조씨 집성촌 왕머리 = 왕머리는 횡성조씨 집성촌이다. 입향조가 누구인지 입향 시기가 언제인지 정확한 기록은 없다. 이 마을 원로들에 의하면 횡성조씨 한사공파 후손들이 수백년 동안 세거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 전하집 이장
한사공파의 분파조는 조석붕(趙錫朋, 1585-1657)이다. 조석붕은 횡성조씨 시조 조익(趙翌)의 21세손으로 퇴계 선생의 수제자인 조목의 둘째 아들이다.

조석붕은 1615년(광해군 7) 문과 식년시에서 갑과(甲科)로에 급제하여 봉상사주부(奉常寺主簿)를 역임하였으나 광해군이 폐륜을 범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예안)으로 돌아왔다. 한사(寒沙) 선생이 몰한 후(1657년) 그 후손들이 왕머리(평은면 강동리와 옹천면 두산리)에 정착하여 최근까지 60여 가구가 세거해 왔다고 한다.

   
▲ 이재영 노인회장
이 마을 출신 조동진(67)씨는“횡성조씨가 이곳에 정착한 것은 1700년 이후로 보고 있으며 왕머리 고개 넘어 두산리 문중산에 남향한 한사정(寒沙亭)이 있다. 이 정자는 조석붕을 추모하기 위하여 후손들이 건립한 정자”라고 설명했다. 현재도 왕머리 고갯마루에 횡성조씨 20여 가구가 산다.

‘도마상’이 왕머리에 있다? = 왕유마을에서 당곡골로 넘어가는 산기슭에‘강동리 마애보살입상이 있다.

그런데 이 석상은 기독교 관련 도마상이란 주장도 있고 불상이란 주장도 있어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가운데 기독교 신자들의 순례가 끊이지 않고 있다.

   
▲ 이종성 선생

이 암각상은 1987년 8월 관악고 유우식(집사) 교사의 꿈에 예수님이 나타나‘영풍군 평은면 강동리에 있는 바위를 찾아 역사를 바로 세우라’고 해 발견하게 됐는데 기독교 관련 도마상 이라고 알려져 당시 흥분을 불러 일으켰다고 한다.

바위 면 좌측의 한 면에 네모꼴로 네 자의 도마(도마의 손과 눈)라는 히브리어 글자가 있다. 여기에 새겨진‘도마’는 히브리어 글자가 틀림없고 도마는 예수의 12제자 중 한 분의 이름이다.

   
▲ 이하종 반장
반면 우리나라의 경우 불상이 있으면 자연스럽게 기도하는 불자들이 많이 모이기 마련인데 여기는 기도하고 불공드리는 행위를 일체 볼 수 없었다는 것이 이상하다.

도마박물관 조국현 관장은 전화통화에서“도마(석수·목수, AD 41-49 가야국에 왔음)는 예수의 뜻을 좇아 이스라엘을 떠나 이역만리 떨어진 가야국(한국)에 왔으며 실크로드를 따라 낙동강 상류(영주)까지 와서 복음과 신기술을 전했다”며 “이 석상은 도마상이 100% 확실하지만 도마가 직접 조각했는지 그 후 누군가가 조각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고 했다.

   
▲ 전하식 씨
조 관장은 또“이 도마상의 보존 관리를 위해 꼭꼭 숨기고 있으며, 외부에 더 이상 알리는 것을 막고 있다”고 하면서“도마상이 확실하다고 공식 입증되면 엄청난 관광수요가 있을 것으로 본다”고도 말했다.

강동1리 사람들 = 금계마을에 갔던 날 전하집 이장을 비롯한 이종성(82) 선생, 이재영(69) 노인회장, 전하식(71)씨, 이승희(63)씨, 이하종(67)반장, 전하철(53)씨 등을 마을회관에서 만났다. 이들로부터 마을의 옛 이야기와 오늘을 살아가는 이야기를 들었다.

   
▲ 정해복 씨
   
▲ 이승희 씨
이 마을에 귀촌한지 5년차 되는 이훈구(67)·정해복(63) 부부는 농사지은 거라며 자두를 가지고 와서 나누어 먹었다. 금계에는 모두 23가구가 산다.
   
▲ 김용남 할머니

그 중 귀농·귀촌 가구가 11집이라고 하니 절반이 귀농가구로 타지에서 보기 드문 현상이다. 마을 입구에는 평은역 낚시터가 있다.

심삼보(64) 사장이 10여년 전 이 터를 사서 경영하고 있는데 좌대가 60여개나 있었다. 낚시터 건너 자두밭에는 귀촌한 이이출(73)·허귀자(67) 부부가 산다.

왕유동으로 이동하여 마을 전경을 찍을 장소를 찾고 있을 때 양문석(70)씨의 안내로 제일 높은 곳에 있는 과수원에 가서 사진을 찍었다.

   
▲ 김난이 할머니
   
▲ 권순탁 참전용사
왕머리마을로 내려와 공민왕이 마셨다는 샘을 찾고 있을 때 이 마을 김용남(92) 할머니와 권순탁(82) 어르신, 김난이(81) 어르신께서 샘의 유래와 마을의 옛 이야기를 들려줬다. 모두 친절하고 정겨운 고향 사람들이다.

이원식 프리랜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