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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희여골 마을전경 | 황사우, 황응규, 황섬 3대 등 문과 9명, 사마시 34명 급제 황설 국회의원, 황상구 변호사 등 판검사 16명 배출
풍기읍 백1리(희여골) 가는 길 영주시내에서 풍기방향 자동차전용도로(죽령로)를 타고 가다가 안정, 풍기를 지나 전용도로가 끝나는 지점인 백리교차로에서 풍기 방향으로 내린다. 풍기시내 방향으로 내려 곧바로 죽령방향으로 U턴하면 도로 우측에 백1리(희여골 → 900m) 표석이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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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을표석 | 희여골 방향으로 향하면 자동차 한 대가 다닐 수 있는 시멘트 포장도로로 접어든다. 도로 좌측은 논이고 우측은 과수원들로 이어진다. 조금 올라가면 들판을 가로지른 중앙선 철길 지하도를 통과하면 11시 방향으로 희여골이 보인다. 마을 앞 들녘에는 벼가 누르스럼하게 익어가고 마을 뒷산은 비로봉지맥에서 뻗어 내린 노적봉(露積峰)이 좌우로 팔을 벌려 마을을 감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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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인회관 | 마을은 비스듬한 경사지에 개울을 사이에 두고 좌우로 옹기종기 자리 잡았는데 층층 집들이 빼곡하고 돌담 골목길이 평화롭다. 현재 희여골에는 몇 채 안 되는 고택과 새마을 주택, 현대식 주택이 사과나무 숲에 싸여있다. 희여골 골목길에 백일홍, 분꽃, 나팔꽃이 정겹게 핀 지난 14일 백1리 회관에서 황병태 이장, 김정목(80)노인회장과 마을어르신들로부터 희여골의 유래와 창원황씨의 내력을 들었다.
희여골의 유래 ‘희여골’이란 마을이름이 참 정겹고 아름답다. 우리 선조들은 마을이름을 지을 때 자연의 모습을 그대로 불렀다. 옛날 이 마을 곳곳에 억새가 많았는데 가을이면 억새꽃이 지천으로 피어 허옇게 보였고 밤이면 허연 물결이 바람에 일렁거렸다고 한다. 그래서 마을 이름을 허옇다, 희다 하여 ‘희여골’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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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을골목길 | 또한 이 마을은 조선시대 때 풍기군 서부면 백야리(白也里)로 기록되어 있다. 지명유래에 의하면 마을 뒤에 호랑이 모양의 바위가 동서로 마주보고 있어 그 바위의 이름을 동호암과 서호암이라 하고, 이 한 쌍의 백호가 서동부서(壻東婦西)의 형상으로 혼례식을 올렸다는 전설에 따라 백호의 백자를 따서 백야리라 하여는데 지금은 이 바위들이 없어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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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락당(정자) | 또 다른 전설은 이 마을에 창원황씨가 입향하기 전 백씨들이 많이 살았다 하여 백리로 정했다는 전설도 있다. 어느 것이 맞는지는 알 수 없으나 억새가 많아 ‘희여골’이라 불렀다는 전설이 가장 잘 어울리는 이름 같다. 지금도 마을 앞 안골들 논둑이나 길가에는 억새가 활짝 피어 옛 희여골의 정취가 물씬 묻어나온다.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 개편 시 풍기군이 영주군으로 편입되면서 백야동의 가운데 ‘야’자를 버리고 영주군 풍기면 백1리로 개칭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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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숭덕사(사당) | 창원황씨 세거 내력 풍기 희여골에 창원황씨가 세거한 것은 조선 성종(1469~94 재위) 때의 일이다. 창원황씨의 본향은 경남 창원이다. 영주 지역 창원황씨 입향조는 고려 공민왕 때 중랑장을 지낸 황승후가 당시 순흥부 병산(甁山, 현 단산면 병산리)에 터를 잡으면서부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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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암(정자) | 황승후의 아들 황처중은 조선 초에 영일감무를 지냈으며, 처중의 아들 황제가 서승을, 둘째 황전이 통례원봉례를 지냈다.
황전의 손자 황희성이 그의 고모부 되는 사직(司直) 노계조가 사는 희여골로 가게 된 것은 고모부인 노계조가 자식이 없어 시양(侍養)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황희성이 희여골에 정착한 후 아들, 손자, 증손 대에서 큰 인물들이 쏟아져 나와 창원황씨의 명성을 크게 떨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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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병태 이장 | 인물의 보고 수락당 사람들 수락당은 희여골 창원황씨 문중을 상징하는 건축물(종가집 정자)이다.
창원황씨가 희여골에 들어오고 나서 황희성의 아들 황사우는 1514년(중종 9) 별시 문과에 갑과 제2인으로 급제하여 충청도사·좌승지·도승지·대사간 등을 거쳐 호조·예조·병조 판서를 거쳐 우찬성에 올랐다.
손자인 황응규(1518~1598)는 신재 주세붕과 퇴계 이황의 문인으로 1569년(선조 2)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여러 고을의 수령을 역임하고 밝은 다스림으로 칭송을 받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양곡을 군량으로 바쳐 절충장군에 오르고, 1594년 동지돈령부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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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목 노인회장 | 황응규의 아들 황섬(黃暹)은 1570년(선조 3) 식년 문과 갑과로 급제하여 벼슬은 사간원 정언·동부승지·성주목사·병조참의·대사간·도승지·대사헌 등을 거쳐 참판(參判)에 이르렀으며, 임진왜란 때 왕을 호종하여 호성원종 1등 공신에 책록됐다.
황섬의 아우 황시도 문과에 급제하여 우승지·장예원 판결사를 지냈다.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유영경은 황응규의 사위이며, 효종 때 영의정을 지낸 이시백은 황섬의 손주사위이다.
황정흠(1889~1955)은 호가 후송이고 황섬의 11대 증손으로 1919년 3월 9일 풍기 장날 만세운동을 주도하다 구속되어 1년 만에 풀려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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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분홍 할머니 | 창원황씨 가문이 남긴 흔적 희여골에서 안쪽으로 더 들어가면 서재골이 있다. 이 곳에 중산서재(中山書齊)가 있었다고 옛 문헌은 기록하고 있다.
중산서재는 동지돈령을 지낸 황응규가 후진 양성을 위해 지은 건물로 오늘날로 치면 도서관이다. 당시는 20여 채의 건물이 있었고 원근 선비들이 책을 찾아 구름처럼 몰려들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현재 희여골에는 그리 많지 않은 고가들이 남아 있는데 숭덕사(崇德祠)는 우찬성 겸 이조판서를 지낸 황사우의 사당으로 철종4년(1853)에 창건한 건물이고, 마을 뒤 중덕에 있는 정암(正庵)은 동지돈령부사 황응규의 정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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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숙진 할머니 | 또한 수락당은 증 이조판서, 사헌부 대사헌을 지낸 황섬이 만년에 학문을 강구하던 곳이다. 이밖에도 경주 최씨 정려각이 있다. 수락당 뒷길 고택 앞에서 콩,팥 열매를 따고 있는 안분정(71)씨를 만났다.
안씨는 “이 고택은 황춘의 고택으로 사랑채는 옛 모습 그대로 보존되고 있으나 안채는 몇 차례 보수한 것 같다”며 “관리가 허술해 보기가 민망스럽다”고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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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옥래 할머니 | 희여골 사람들 마을 입구에 들어 설 무렵 유모차를 끌고 운동 중인 남분홍(91) 할머니를 만났다. 가을볕이 따가와 개울 건너 김옥래(83) 어르신네 마당 대추나무 그늘에 앉았다.
뒷집 사는 한둘선(78)씨와 앞집 원인호(58)씨도 자리를 함께 했고 윗골목 김숙진(86) 할머니, 안춘희(82) 할머니, 김득자(77) 씨도 모여 앉았다.
안동 임동에서 청원황씨댁으로 시집왔다는 남분홍 할머니는 “이 마을은 창원황씨 집성촌으로 예나 지금이나 벼슬한 사람이 많이 나온 동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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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춘희 할머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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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둘선 씨 | 한둘선 씨는 “우리마을은 옛날에는 벼 농사를 많이 지었으나 지금은 마을과 산이 전부 사과농장”이라고 했다.
안춘희 할머니는 “올해는 대추, 밤, 호두 등 과일이 풍년”이라며 사과와 밤, 호두를 가지고 와서 나누어 먹으면서 옛날 어렵게 살던 보릿고개 이야기도 하고 경로당 자랑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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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득자 씨 | 잠시 후 경로당에서 황병태 이장과 김정목(80) 노인회장을 만났다.
창원황씨 후손인 황 이장은 “지금도 숭덕사(사당)에서는 용헌 황사우의 불천위 제사를 지내고 있다”며 “황사우, 황응규, 황섬(3대) 선조에 이어 문과 9명과 사마시 34명을 배출하여 당시 영남의 명가로 명성이 대단했다.
근대에 와서도 황설 국회의원, 황상구 변호사 등이 희여골 후손이며 최근까지 판검사 16명을 배출했다”고 말했다.
김정목 노인회장은 “백1리 마을회관은 마을 사람들과 출향인들 100여명이 정성을 모아 2011년 8월에 2억원을 들여 새로 지었다(추진위원 황창원, 황병태, 김재남, 황명곤)”고 하면서 “회관에서 매월 9일 노인회를 여는데 이장과 부녀회장이 앞장서서 건강도 챙겨주고 소식도 전해주고 다함께 식사를 하는 등 과분한 경로에 마음 깊이 감사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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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분정 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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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인호 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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