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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줄포마을 전경 | 400년 세거한 나주정씨 집성촌 벼농사와 축산으로 억대 부농 일군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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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줄포마을 표석 | 영주시내에서 서천교를 건너 풍기방향으로 향하다 나뭇고개(木峴)를 넘으면 넓은 안정들이 펼쳐지고 그 가운데로 왕복 8차선 비상활주로가 쭉 뻗어 단숨에 죽령을 넘을 기세다.
비상활주로 입구에서 OCI머티리얼즈 가는 길을 지나 200m쯤 더 올라가면 상줄동 필두길이 나오고 또 800m정도 더 가면 상줄동 줄포길이 나온다.
줄포마을로 들어서면 드넓은 줄포들이 연둣빛물결로 넘실거리며 바람을 이고 나른다.
소백산에서 뻗어 내린 주마산 지맥이 동남으로 이어진 매봉산과 송령산이 마을 뒤를 병풍처럼 휘두르고 있고, 마을 앞 들녘 한복판을 가로질러 흐르는 서천은 넓은 줄포평야를 기름지게 하고 있다.
줄포는 교회가 있는 솔안마을로부터 시작해 중간마을-서당마을-매름마을-너서리마을로 줄줄이 이어져 있다고 하여 줄포라는 농담도 생겼다.
무더위가 절정에 이른 지난 6일 줄포마을을 방문해 김성구 이장과 정진목, 정해창 선생을 만나 줄포의 내력과 자선과 구휼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줄포마을의 내력 줄포마을은 조선태종 13년(1413)에 영천군 가흥면 줄배방(茁排坊)에 속했으며 영주시내에서 풍기방면으로 10리 거리에 위치한 서북향의 마을이다. 조선시대에는 줄포마을을 영주관아의 서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서포리 또는 포상리라고도 불렀다. 마을 입구 도로변에 영주관아에서 10리 이정표인 장승이 있었는데 이곳을 이름하여 장승뱅이라 하였으나 지금은 그 이름만 남아 있다. 이곳은 지대가 낮고 늪이 많아 줄풀이 무성하여 줄밭을 이루고 있어서 마을이름을 줄포(茁浦)라고 했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풍기군 생현면 내줄동 일부를 통합해 상줄리가 되어 영주군 영주면에 편입됐다. 1940년 영주면의 읍 승격으로 영주군 영주읍 상줄리가 됐다가 1980년 영주읍이 시로 승격함에 따라 영주시 상줄동이 됐다. 상줄동은 법정동으로 행정동인 가흥2동 관할이다. 유적으로는 호암사, 검암정사, 봉강서당, 희현당 등이 있다.
줄포마을 입향조 이 마을은 나주정씨 검암공 정언숙(儉巖公 丁彦숙)이 안동부 판관 재임 시 영천(현 영주)땅을 경유하여 안동부로 귀로할 때 창보역사(현 창진동)에서 서포리를 망견하니 그 풍광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었다고 한다. 또한 근방에 지기(知己, 참다운 벗)도 많아 마침내 인조13년 을해(1635)년에 줄포에 교거(僑居, 임시거처)하게 되었고 그 후손들이 이어서 줄포 땅에 정착하게 됐다. 그 후 자손들이 번성하여 취락의 면모를 갖추었으며 나주정씨 종택을 중심으로 웃마을(속칭 매름마을), 아랫마을(속칭 솔안마을), 중간(中間)마을, 서당(書堂)마을, 여아동(汝兒洞) 또는 여서리(汝西里 속칭 너서리)로 마을을 이뤘다. 현재 90여 세대에 170여명이 살고 있으며 30대에서부터 70대까지 골고루 분포되어 있다. 노인회 등록회원은 60여명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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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검암정사 | 풍류 보다 교육에 힘쓴 검암정사 줄포마을은 나주정씨의 집성촌으로 그 후손들이 세운 검암정사(儉巖精舍)가 있다.
이 정사는 풍류 보다는 교육 활동을 많이 한 곳으로 널리 명성이 높고 나라의 인재를 많이 배출했다. 1635년 안동 판관으로 있던 정언숙은 원주로 오가는 도중에 영주를 지나다가 산천이 수려함에 이끌려 집을 빌려 살았다고 한다.
병자호란 후 벼슬에 뜻을 버리고, 영주의 서쪽 줄포에 집을 짓고 김응조·나이준 등과 교류하며 유연자적(悠然自適)했다. 그러다 1667년 원주로 이사하여 치악산 아래 검암리에 검암정사를 지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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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강서당 | 그 후 정사가 퇴락하여 후손들이 “옛 자리는 아니지만, 검암공이 애상하여 머물렀던 곳이고, 손수 심은 나무가 지금도 있으니, 치악산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라며 1925년 줄포로 이건하였다. 검암정사가 배출한 정태진은 이병호에게 글을 배우고, 자라서는 곽종석에게 사사받아 성리학에 일가를 이뤘다.
1910년 나라를 잃자 만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하였으며, 1919년 파리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보낼 때 대표로 참석하였다가 대구감옥에 갇히게 됐다. 출옥하여 검암정사를 중수하고 학문에 전념하자 원근의 많은 학도가 모여들어 후진 양성에 이바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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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협고택 | 영남의 명가 안협고택(安峽古宅) 안협고택은 나주정씨 23세손 도정공(都正公, 義轍,1791-1871)이 처음 지었다. 공은 일찍이 원주에 있던 종숙부 해좌공(풍기군수, 형조판서)에게로 가서 학문을 깊이 익힌 다음 줄포로 돌아와 낡은 집을 헐고 와옥을 신축하여 당호를 ‘희현당(希賢堂)’이라 했다. 희현이라 한 것은 ‘선비는 현인(賢人)의 경지에 이르기를 바란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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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암종택 | 도정공은 안팍으로 효도, 우애, 화목, 구휼 등에 힘을 쏟는 한편 봉강서당(1856)을 지어 풍부한 학식으로 자제들을 교육함으로써 향리의 번영을 도모하는 등 명실상부한 향토 선비로서 역할을 다했다. 또한 도정공의 손자 대직(大稙, 1847-1933)은 1882년 2월에 희현당을 완성하고 택호를 안협택이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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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성구 통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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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목진 선생 | 대직은 사마시에 급제(1892)하여 의금부 도사, 안협 현감을 지냈다. 명성황후 시해사건 후 낙향하여 희현당 뒤 언덕에 정자를 지어 송오대(松梧臺)란 편액을 걸고 자선(慈善)을 너그럽게 베풀어 원근 각지로부터 칭송이 자자했다.
어느날 옹기장수가 안협댁 앞을 지나다가 그만 발을 헛디뎌 넘어짐으로써 옹기를 모두 깨트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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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해창 안협고택 주손 | 대식은 옹기장수를 불러 “오늘 운수가 나빠서 그랬지만 우리집 앞에서 당한 낭패(狼狽)이니 어찌 나에겐들 연관이 없다하겠소”라며 옹기값 전부를 보상해 주었다.
그 무렵부터 안협댁은 가문의 명성이 널리 전해져 영남의 명가로 자리 잡았다. ‘안협’이란 택호는 대직의 임지였던 안협(현, 강원도 철원군 산하)에서 얻어진 것이다.
그로부터 130년의 세월이 흘러 안협택은 낡고 허물어졌다. 이를 안타깝게 여겨오다가 정해창(丁海昌) 주손의 힘으로 원형이 보존된 목조 와가를 2011년 중수 완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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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동숙 씨(너서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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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영애 씨(아랫마) | 줄포마을 사람들 줄포 아랫마을에 줄포경로당이 있다. 15년 전 1억원을 들여 지었다고 한다.
이날 경로당에서 김성구 이장과 윤동숙(77), 문영애(79), 김봉순(80), 이연희(77), 손남순(77), 허옥순(79) 할머니 등 여러 어르신들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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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남순 씨(솔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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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봉순 할머니(매름) | 어르신들은 “우리마을은 오랜 옛날부터 힘들고 어려운 일은 품앗이로 협력했고 헐벗고 굶주린 사람을 만나면 ‘십시일반’으로 구제하며 살아왔다”고 입을 모았다.
줄포마을을 바라보면 옛적에 선비들이 터를 잡을만한 곳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들이 넓다. 역시 지금 줄포의 주력 농업은 벼농사이고 최근에는 축산이 크게 일어났다.
요즘은 기계화 과학영농으로 100마지기가 넘게 벼농사를 짓는 농가가 세가구나 되고 100두 이상 축산농가도 여럿 있다고 하니 이들은 40~50대 농업경영인들로 억대소득 농가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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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연희 씨(솔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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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규희 씨(너서리) | 이 마을 김성구 통장은 20년째 마을 통장을 맡고 있다. 김 통장은 “우리마을의 자랑은 수백년동안 전통으로 이어오고 있는 효도정신과 구휼정신”이라며 “어른을 공경하고 어려운 사람을 돕는 일을 최우선 실천하는 마을”이라고 했다.
김 통장은 또 “나주정씨 안협고택에서는 해마다 1천만원 상당의 쌀을 영주시에 기증하여 저소득 가정, 독거노인 가정, 소년소녀 가장, 모자가정을 돕고 있다”고 말했다. 노인정을 나와 마을 문화재를 둘러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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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금이 씨(너서리) | 아랫마에서 너서리까지 걸었더니 참 덥고 땀이 줄줄 흐른다. 이 때 시원한 음료수를 한 병 건네면서 길을 안내해 준 김금이(49. 축산)씨와 최윤희(52)씨께 지금 다시 감사드린다.
이원식 프리랜서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