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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마을 탐방[18] 안정면 동촌1리(피끝마을)

단산사람 2014. 7. 27. 18:37

피끝마을 아픔의 역사, 희망으로 부활하다
우리마을탐방[18] 안정면 동촌1리
[479호] 2014년 07월 11일 (금) 18:06:46 이원식 기자 lwss0410@hanmail.net
   
▲ 피끝마을 전경
   
▲ 뚜레박 샘

단종애사 관련 성황당·영모정 눈길
문학기행, 역사탐방 등 답사객들 줄이어

       
▲ 충절의 마을 표석

안정면 동촌1리 가는길
서천교에서 회헌로를 따라 순흥 방향으로 향하면 아랫귀내와 웃귀내 마을 앞을 지나게 된다. 여기서 조금 더 올라가면 장수고개(고현동)와 아지동을 지나게 되고 우측으로 덩그러니 판타시온을 바라보면서 오르막길을 오르면 좌측에 ‘忠節(충절)의 마을 동촌1리(피끝)’ 표석이 나오고 우측에 동촌자연묵집 간판이 보인다.

동촌으로 넘어가는 이 고개가 옛 순흥도호부로 들어가는 관문이다. 동촌은 옛날에 우음(雨陰)이라고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이 마을은 동쪽으로는 죽계천이, 서쪽으로 미궐봉, 남쪽으로 봉화봉, 북쪽으로 새내들이 인접해 있는 자연부락이다.

원래 풍기군 동촌면이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시 합도(조개섬)동, 우음(雨陰)동, 아지동 일부를 병합하여 동촌리라 명하고 영주군 안정면에 편입됐다. 지금은 55호에 100여명이 산다.

순흥도호부의 관문 동촌고개

       
▲ 박준훈 이장

주말과 일요일에는 피끝마을을 찾는 답사객들이 줄을 잇는다. 지난달 29일(일) 오전 동촌1리에서 박준훈이장과 박광훈 전 이장님을 만나 ‘피끝의 한’을 비롯한 역사와 전설 등을 듣고 태평초를 맛보기도 했다.

이날 정오 12시 경 한국방송대 문예창작 콘텐츠대학원생(대표 김명희) 30여명을 마을회관 앞에서 만났다. 손종흠(방송대국문학과) 지도교수가 직접 해설을 하고 있었다.

손 교수는 “동촌1리로 들어오는 이 고개는 순흥도호부의 관문으로 많은 군마가 오가던 길”이라며 “이 길에는 단종애사와 관련된 전설이 많이 남아 있다”고 했다. 손 교수는 또 “역사학과 학생이나 국문학과 학생들은 꼭 한 번 이상 여기를 다녀간다. (죽계천을 가리키며) 죽계천 피끝 지점에 차를 댈 수 있는 주차 시설이 필요하다”고도 했다.

피끝마을의 유래
세조의 왕위찬탈을 반대하다 눈 밖에 난 금성대군은 계속해 유배지를 옮겨 다니다가 사육신 사건을 계기로 순흥에 위리안치 된다. 금성대군은 순흥부사 이보흠과 뜻을 맞춰 거사를 준비하던 중 시녀 김련과 관노가 격문을 빼내 밀고하는 바람에 들통이 나버렸다.

당시 풍기 현감 김효급이 이 사실을 세조에게 알렸다. 이때가 세조 3년 1456년이다. 안동부사 한명진이 군사를 이끌고 와서 순흥도호부에 불을 지르고 사람은 물론이고 우마계견(牛馬鷄犬)까지 닥치는 대로 무참하게 죽였다. 그리고 다시 한양에서 철기군이 출동해 2차 학살을 저질렀다.

당시 순흥은 황폐화됐고 근방 30리 안에 산 사람이 없을 정도로 처참한 지경에 이르렀다. 이때 순흥에서 참살당한 피가 죽계천을 타고 십리나 흘러 멈춘 곳이 이곳 동촌1리 이다. 그래서 ‘피끝마을’이라는 이름이 생겼다.

       
▲ 박춘자 씨

동촌의 전통음식 태평초에 대해 이 마을 박춘자(70)씨는 “태평초는 우리마을의 역사적 의미를 간직한 먹거리”라며 “단종복위와 관련된 정축지변 이후 지역 사람들이 참수 당하고 흉년으로 민심이 음흉한 가운데 먹고 살기 위해 메밀을 심으면서 시작된 음식”이라고 했다.

메밀은 구황작물로서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고 또 2모작을 할 수 있는 작물이다 보니 식량이 부족했던 당시에는 가장 알맞은 작물 중에 하나였다. 특히 양반들은 메밀 자체가 큰 영양가가 없는 것에 착안해 메밀묵에 김치와 꿩고기, 토끼고기를 곁들여 영양가 높게 찌개를 만들어 먹었다고 전한다.

       
▲ 최옥선 묵집할매

이곳 출신인 동촌묵집 최옥선 사장할매는 “동촌묵집을 시작한지 15년이 지났다”며 “메밀묵에 돼지고기를 넣은 태평초가 맛도 좋고 값도 싸서 우리 지역을 대표하는 먹거리로 날로 찾는 사람이 많아지고 있다”고 했다.

   
▲ 미궐봉 성황당

미궐봉 성황당( 薇蕨峰 城隍堂) 

   
▲ 김동촌 할머니

성황당을 찾아 미궐봉 등산로 까지 갔으나 길이 없어 마을로 내려와 김동희(76) 할머니의 안내를 받아 다시 올라갔다. 마을 뒤 유가사로부터 500m 쯤 떨어져 있어 찾기가 어려웠다. 성황당 옆에는 다음과 같은 유래가 있다.

「이곳 미궐봉 정상에 있는 성황당은 피끝의 ‘한’과 ‘단종애사의 참극’을 담고 있는 당집이다. 1711년 이곳 무녀 “고씨”가 피의 원한을 풀어주기 위해 미궐봉 정상에서 원혼을 달래는 제사를 지냈다. 그 후 소실과 중수를 반복하다가 6.25 전란으로 완전 소멸되자 마을에 우환이 자주 일어나므로 다시 재건하니 마을이 평온을 되찾았다.

       
▲ 안우준 씨

이후 건물이 낡아 허물어지게 되자 이 마을 출신 박헌출(대구·청기와) 씨가 고향을 사랑하는 마음에 성황당 건축 경비를 지원하고 마을 전 주민이 힘을 합해 2006년 10월 새롭게 중수됐다」라고 적혀 있다.

산에서 내려오는 길에 만난 안우준(69)씨는 “미궐봉 성황당은 마을의 정신적 중심체로서 자리매김 하고 있다”고 말했다.

   
▲ 영모정

영모정(永慕亭)마을 가운데에 단종애사와 관련이 있는 영모정이 있다. 이 마을 원로이고 선비인 박수영(92) 선생은 “영모정은 단종 때 명신인 박심문(朴審問)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이 마을 밀양박씨 후손들이 100여년 전에 세운 정자”라고 했다. 박심문은 1408년 경기도 장단 구화(九化)에서 태어나 1436년(세종 18년) 문과에 급제해 김종서가 육진을 개척할 때 종사관이 되었다. 성삼문 등이 단종 복위를 꾀할 때 서로 왕래하며 함께 모의했다.

1456년 세조의 명에 의해 질정관(質正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오다가 의주에 이르러 성삼문 등이 장렬히 순절했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사육신(死六臣)과 단종임금의 복위를 위해 생사를 함께 하기로 했는데, 이제 나만 살아 있으니 죽어 지하에서 무슨 면목으로 선대왕과 그들을 뵙겠는가?” 라고 말하고는 순절했다. 후세 사람들은 사육신에 그를 합해 사칠신(死七臣)으로 일컫고 있다.

   
▲ 새마을 옛집

지역 발전의 선구자 죽헌(竹軒) 박수영(朴受英) 선생

       
▲ 박수영 선생

박수영(92·영주군 통일주체국민회의 제2대 대의원)은 박심문의 후손이다. 박 선생이 살고 있는 영주동 자택 거실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사진과 ‘총화유신 민족중흥’이란 빛바랜 액자 두 개가 걸려 있다. 현재 거동이 불편하지만 정신만은 또렷했다.

박 선생은 “낙후된 우리고장에 전기를 넣고 도로를 건설하기 위해 손으로 비비고 발로 뛰었었다”며 “당시(1970년대) 김창근 국회의원, 이태수 군수, 김달조 경찰서장을 대동하고 상경해 정부 지원 약속을 받아 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영주의 숙원 사업이었던 원당로 수로변경 등을 위해 순흥의 남종철, 풍기의 장진탁, 단산의 구정서 등과 강경식 경제기획원 차관을 방문하고 예산 지원 약속을 받아냈다”고도 말했다. 박 선비는 지역 발전의 선구자로 헌신하였을 뿐만 아이라 신라 아사달 왕릉 참봉으로 임명되기도 했고 후손들에게 인간의 도리와 삼강오륜을 강론하는 등 이 시대의 마지막 선비로 추앙 받고 있다.

   
▲ 녹색체험마을

공동체 녹색농촌체험마을 운영
동촌1리에서 옛 오계초(오계동) 쪽으로 좌회전해 조금 올라가면 낮은 야산계곡에 이 마을 사람들이 공동으로 운영하는 ‘녹색농촌체험마을’이 있다.

   
▲ 고연희 씨
       
▲ 박무웅 씨

들어가는 입구에서부터 벼농사를 비롯한 인삼·사과·채소·축산·옥수수·감자·고구마 등 농촌의 모든 것을 체험할 수 있는 농장이 있다.

기자가 찾은 이날도 박무웅(73)·고연희(70) 부부가 체험마을 농장에서 오이를 따고 깨를 심고 있었다.

 

       
▲ 박광훈 녹색체험마을대표

박광훈 추진위원장은 “우리 녹색농촌체험마을은 예쁜펜션에서 숙식과 농촌체험을 함께 할 수 있는 곳”이라며 “자연과 더불어 아늑한 휴식과 농촌체험 및 산림치유를 할 수 있는 곳으로 각광받아 대구의 신암성당 등 전국 각지에서 여러 단체가 다녀갔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