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사랑/우리마을 탐방

우리마을 탐방[20] 문수면 만방1리

단산사람 2014. 8. 9. 12:15

‘종릉’의 전설, ‘한정’의 유래를 간직한 마을
우리마을탐방[20]문수면 만방1리
[481호] 2014년 07월 24일 (목) 15:17:31 영주시민신문 okh7303@yjinews.com
   
▲ 한천마을 전경

영주에 능(陵)이 있다. ‘종릉’은 누구의 능인가?
열부(烈婦)와 충복(忠僕)이 살던 마을

문수면 만방1리 가는 길

문수면 만방1리는 영주시내와 인접해 있는 마을로 평은 방향으로 2.5km 지점에 있다. 국도를 따라 운문 고개마루에 이르면 ‘고려골재’공장이 있는데 여기서부터 만방1리 지역이다. 조우골(照谷)앞을 지나 100여m 올라가면 우측에 ‘종릉’ 표석이 나온다. 종릉로로 우회전해 지하통로를 통과하면 우측 골짜기에 제법 큰 마을이 있다. 이 마을이 만방1리에서 제일 큰 마을인 한천(한정)마을이다.

한천에서 남서방향으로 1.5km 쯤 가면 ‘종릉고개’에 이르고 고개에서 100여m 내려가면 우측으로 자만동 표석이 보인다. 이곳에서 북쪽으로 700여m 내려가면 사방이 야산으로 둘러쌓인 자만동이 자리잡고 있다. ‘종릉마을’은 자만동 입구에서 100여m 더 내려가면 소쿠리형 골짜기에 옹기종기 집들이 자리잡고 있다.

       
▲ 민병림 이장

‘종릉’은 마을에서 버드내 방향으로 더 내려가서 버드내 입구에서 좌회전해 종릉산 유릉골로 500여m 쯤 올라가면 종릉과 재사가 있다.

      
▲ 주성옥 씨

만방 1리는 반경 1km 내에 한천(35호), 자만(15호), 종릉(20호) 등 세 마을과 외딴집(10호) 등에 100여명이 살고 있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지난 13일 오전 만방1리에 가 민병림 이장과 민석기 노인회장, 주성옥(59)씨로부터 마을의 역사와 열부각의 내력를 들었다.

   
▲ 한정(샘)의 현재 모습

한천(한정)마을의 유래

한천(寒泉)마을 뒤 계곡에 ‘한정(寒井)’이라는 샘이 있다. 찬물이 솟는다고 하여 한정이라 했고 차가운 물이 흐른다하여 한천이라 했을 것이다. 예전에는 마을 이름을 한천이라 불렀는데 일제가 한정으로 창지개명한 것으로 확인됐다. 최근에는 다시 ‘한천경로당’ 등 한천으로 쓰고 있다.

이 마을에는 여흥민 씨가 400여년 간 세거한 마을이다. 여흥민씨 시조는 민칭도(閔稱道, 고려말 ‘상이붕어’를 지냄)이고 영주입향조는 9세 민혁(閔奕, 해관지후공파)이다. 민혁은 고려말 세상이 어지러워지고 나라가 위태로워지자 자식들을 거느리고 소백산 아래 이곳 영주에 은거하게 된다. 처음에는 영주 휴천동에 살다가 11세 민의(閔毅)가 이곳 한천에 터를 잡아 이주함으로써 한천의 입향조가 된다.

       
▲ 민석기 노인회장

민석기(75) 노인회장은 “한천에 정착한 정확한 연대는 기록이 없으나 약 400여 년 전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고 말했다. 민의가 개척한 한정은 마을의 유일한 샘으로 오랜 세월 사용했으나 펌프와 수도가 나온 이후 현재는 농업용수로만 사용하고 있다.

   
▲ 자만동 전경

산속에 숨은 마을 자만동

   
▲ 우승구 씨
       
▲ 권옥화 씨

이 마을로 들어가는 길이 없다. 임진왜란 때도 6.25 전쟁 때도 적의 총칼이 피해 간 마을이라고 한다. 십 수년 전까지만 해도 지겟길만 있었다고 하니 도심 인근에 있는 오지마을이다.

지형적인 잇점으로 임진왜란 때 은거지(隱居地)였다고 하며 그 후 인근에 산재해 살던 난민들이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피난처로 적지’라며 이곳에 모여 들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모여들어 골에 집들이 꽉 차게 되었다 하여 자만(自滿) 또는 자만(者滿)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 마을 우승구(65)·권옥화(64) 부부는 “1970-80년대 까지만 해도 학생들이 많았고 그 아이들이 학교 갈 때는 이 마을 뒷산을 넘어 문수중부초에 다녔는데 버드레이, 종릉 학생들까지 이 길로 다녔다”고 말했다.

   
▲ 종릉마을 전경

종릉마을의 지명유래

       
▲ 장사윤 씨

‘종릉’이 위치한 정확한 주소는 문수면 승문1리이고 ‘종릉마을’은 만방1리에 속한다. 

       
▲ 정숙자 씨

옛날부터 종릉이 있다 하여 마을 이름을 ‘종릉’이라 하고 이곳의 개천을 버드내(柳川)라고 불렀다. 아마도 종릉의 주인이 류(柳)씨 라서 ‘류씨의 내’라 하여 생긴 지명이 아닐까 추측해 본다.

 

       
▲ 남오진 씨

원래 이 마을에는 영월엄씨가 세거해 온 마을이라고 한다. 조선 태종의 명으로 류빈의 능(묘)을 여기에 쓰려하자 그 바로 앞에 영월엄씨 묘 2기가 있어 그 후손들이 안장을 적극 반대했다. 어명이라고 설득하였으나 듣지 않으므로 2명을 처단하고 나서야 능을 쓰게 됐다고 한다.

       
▲ 노옥순 씨

그 후 영월엄씨들은 이 마을 떠나고 인동장씨들이 400여 년간 집성촌을 이루어 살고 있다. 이날 마을회관에서 장사윤(78)씨, 정숙자(66)씨, 남오진(71)씨, 노옥순(72)씨로부터 종릉에 얽힌 여러 이야기를 들었다.

   
▲ 종릉(류빈의 묘)

문수면 만방리에 능(陵)이 있다?
종릉(種陵)은 조선조 명신 영흥대도호부사를 지낸 류빈(柳濱)의 묘소이다. 전설에 의하면 태종이 진사 동갑계원인 공을 예장한 후 ‘종릉’이라 명명했다고 한다.

군주가 아닌 사인의 무덤을 능(陵)으로 봉해진 이야기는 조선조 초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조선 3대 태종(이방원)은 태조 이성계의 5남으로 정몽주·정도전을 살해하고 왕위에 오른 인물이다. 이방원이 어릴 적 동문수학한 20인의 동갑계원이 있었는데 이들은 모두 조선 개국의 1등 공신으로 녹훈(錄勳)되었고 태종은 계원들에게 교지를 내려 ‘후손들에게 징병과 부역을 면하게 하고 그의 묘는 임금과 똑 같이 능으로 하라’고 명했다.

류빈(전주류씨)이 죽자 태종은 국풍지관을 전국 명산에 보내 터를 잡게 한 다음 한양에서 500리나 떨어진 이곳 태·소백이 위호하는 아늑한 명당(옥녀탄금형)에 운구하여 능을 쓰고 매년 나라에서 제사를 지내도록 했다. 당시 관군이 운구해온 상여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상여로 기록되고 있으며 상여 장식품 일부는 영주시에서 보관 전시되고 있다고 한다.

   
▲ 열부각과 충복각

열부(반남박씨)의 억울한 누명 벗긴 충복 고만석
문수면 만방1리(한천) 마을입구에 반남박씨(박소사, 민조현의 처) 열부각과 고만석의 충복각이 있었다.

2006년 4차선 확장공사 때 도로로 편입되는 바람에 더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2002년 10월 선비촌으로 이건했다. 200년 전 열부 박씨는 17세에 한천마을 민조현에게 출가하였으나 신행 전에 사별하고 청상(靑孀)으로 시부모를 봉양하고 살던 중 이웃의 김조술이란 자가 박열부를 범하려는 것을 완강히 거부하였다. 조술은 이에 반감을 가지고 박씨가 아이를 가졌다고 하면서 허무맹랑한 말을 유포하여 열부의 체면을 손상했다. 열부는 자신의 결백을 밝히기 위해 관아에 가서 호소하였으나 조술의 금력에 의해 불리한 상황이 되자 열부는 억울함을 참다못해 자결하게 된다.

한편 노비 고만석은 마님의 억울한 누명을 벗겨 주려고 상경하여 6년간 우여곡절 끝에 임금을 만나 신원을 회복하게 된다. 그 후 소수서원이 주체가 되어 두 사람의 가상한 뜻을 기리고자 나라에 상소하여 순조22년(1822)에 열부박씨에게 정려(旌閭)가 내렸고, 철종 14년(1863) 고만석에게 정려를 내려 열부각과 충복각을 세우게 됐다.

짚신에 꽃물들여 신고 시집 온 15살 신부

       
▲ 황미분 할머니

열 다섯 살 어린 신부가 여든여덟 살의 할머니가 되었다. 황미분(88) 할머니는 지금 혼자 산다. 6남매 키워 시집 장가 다 보내고 고향집에 혼자 사는 게 가장 편하고 행복하다고 했다. 일제 강점기말인 1944년 문수면 전닷에서 가마타고 한천으로 시집 올 때 신발이 없어 짚신에 꽃물들여 신고 왔다고 한다. 그 때는 모든 것을 일제에게 다 빼앗기고 가장 어렵게 살 때다.

당시 딸아이들은 대부분 일찍 시집을 보냈다. 정신대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서 그렇게 했고 또 한 가지 이유는 시집가서 밥 굶지 않고 잘 살라는 부모의 간절한 소망이 담겨 있었다.

황 할머니는 “그 때는 모두가 가난했다. 물자도 귀하고 신발이 없어 맨발로 물을 여 날랐고 농사일도 맨발로 했다”면서 “지난 50년 동안 세상이 너무 많이 변했다. 농사가 기계로 발달하고 농약, 비료가 나와서 먹을거리가 풍족해 졌다. 또 이렇게 좋은 집들이 들어서고 있으니 살기 좋은 세상이 됐다”고 말했다. 한천마을 역시 새마을 집은 사라지고 현대식 양옥집으로 개량되고 있는 중이다.

이원식 프리랜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