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자 이개립이 개척한 마을, 지금은 ‘효’ 시범마을 | ||||||||||||||||||||||||||||||||||||||||||||||||||||||||||||||||||||||||||||||||||||||||||||||||
우리마을탐방[19]장수면 갈산1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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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면 갈산1리 가는 길 = 영주시내에서 예천 방향으로 자동차전용도로를 타고 가다가 영주 IC(장수)에서 내리면 장수 네거리가 나온다.
마을 앞에는 제법 넓은 들이 있어 옛 선비들이 터를 잡고 학문을 논할 만한 곳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곳이 경주이씨가 500여년을 대대로 거주해 온 갈산리 즉 갈미마을이다. 지금 이 마을에는 48가구에 100여명이 살고 있으며 80% 이상이 노인들이다.
이 마을이장은 ‘근면’ ‘자조’ ‘협동’하는 마을이라고 자랑했다. 갈산이란 어떤 곳인가? = 갈산(葛山)이란 칡 갈(葛)자로 칡이 많은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장수면 갈산은 갈미(葛味)라고도 부른다. 아마도 옛 선비들이 자연을 개척하고 자연에 적응하면서 칡과 친해졌을 것으로 보이며, 그 맛(味)과 향(香)을 즐기면서 시를 쓰고 학문을 논하던 곳이라는 생각이 든다.
장수면 갈산리는 조선시대 때 영천군 두전면 지역으로 갈미 또는 갈산, 갈산방이라 했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파지동, 반구동 일부를 병합해 갈산리라 하고 영주군 장수면에 병합했다. 갈산리는 동으로 두전리, 서로는 성곡리, 남으로는 예천군 감천면 유리, 북으로는 안정면 여륵리를 접하고 있다. 갈산리 가운데 우뚝 솟은 산은 신라 때 축성한 갈산성으로 아직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용암산과 주마산에서 발원한 우곡천이 갈산리와 화기리를 지나 옥계천에 합류한다.
효자 이개립이 개척한 마을 = 갈미마을은 500여년 전 성오당 이개립이 개척한 마을이다. 이개립은 어려서부터 문장에 남다른 재능을 보여 소고 박승임을 비롯한 인근 선생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어려서 학봉 김성일의 문하에서 공부하면서 과거에 대한 뜻을 버리고, 성현들의 가르침이 담긴 경서의 연구에만 전념했다.
1567년(명종 22) 진사가 된 이개립은 이듬해 부친이 병들자 밤낮을 곁에 모셔두고 하늘에 빌고, 변(便)을 맛보아 증세를 가늠하며 정성을 다해 간호했다. 부친상을 당하자 슬픔에 잠겨 사흘이나 식음(食飮)을 끊었고 무덤 아래 여막(廬幕)을 짓고 3년동안 시묘(侍墓)살이를 했다. 부친상을 마친 뒤에는 홀어머니를 모시고 예천 금당골(琴堂谷)로 이사해 봉양에 정성을 다했다. 1586년(선조 19) 이개립은 탁월한 효행을 이유로 조정의 부름을 받아 재랑(齋郞)에 올랐지만, 홀어머니와 떨어져 지낼 수 없다는 이유로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특히 유형문화재 제329호로 지정된 이개립 문중 소장 문적(장수면 갈산리 877)은 이개립과 그 자손 이휘음 등의 유묵과 동도회첩 등이 보존되고 있다. 희망의 끈을 놓지 않은 갈미의 어머니= 문수면 잔도리에서 열일곱 살에 이곳(갈미)으로 시집 온 김귀임(85) 할머니. 그는 이 땅에서 살아 온 모든 어머니들의 고단한 삶을 대변하는 듯했다.
할머니의 집은 마을에서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해 있다. “마을 가운데 두레박 우물이 하나 있었는데 매일 물을 여다 먹느라고 무척 힘들었다”고 했다. “겨울에는 손이 다 얼어 터져 피가 나는데도 빨래를 한 방티 이고 개울가에 가서 빨래를 했다”고 했다. 비누도 없고 고무장갑도 없던 그 때. 얼음장을 깨고 빨래를 할 때 옹가지에 담아 간 따뜻한 물에 잠시 손을 녹이고 또 빨래를 하곤 했다고 한다. 그러다 6.25 난리가 나서 남편(이충호, 참전유공자)은 전장에 나가고 시부모 모시고 아이들 키우면서 고생스럽게 5년을 살았다.
옷도 집에서 만들어 입었다. 명을 자아야 옷을 지어 입을 수 있었고 의식주는 자급자족이었다. 이불도 없었다. 작은 이불 하나에 온 식구가 오글오글 잠을 자야만 했다. 모질게도 가난했던 그 시절이었지만 어머니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아이들을 굶주림에서 살려 냈다. 먼 길 걸어 학교에 보냈고 공부만이 살길이라고 가르쳤다. 김 할머니는 “그 아들딸들이 잘 사는 나라를 만들었다”고 하면서 환하게 웃는다. 이 마을 경주이씨 후손들은 가난했지만 효를 중요시 했다. 선조들의 ‘효’정신을 받들어 지금은 ‘효 시범마을’을 운영하고 있다. 가난했던 옛 이야기, 그게 60년 전 일이다.
그는 2012년 경상북도 선정 새마을여인상을 수상해 화제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다. 박 회장은 지난 4월 새마을중앙연수원에서 ‘살기좋은 마을 만들기’ 교육을 수료했다. “살기좋은 마을이란 어떤 마을이냐?” 란 질문에 박 회장은 “제2의 새마을 운동으로 나눔, 배려, 봉사하는 마을”이라고 말했다. 박 회장은 교육을 받으면서 태극기를 원 없이 보고 경례를 하는 동안 ‘마을 전체가 국기를 게양해 나라사랑을 실천하는 마을을 만들어야 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박 회장은 “누구에게도 도와달라는 요청하지 않았고, 면이나 시에 예산 지원을 요구하지도 않았다”며 “새마을 정신은 우리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라고 했다. “국기 예산을 어떻게 마련할 계획이냐?”는 질문에 박 회장은 “마을에서 폐비닐을 모아 얻어지는 수익금이 있다. 이 돈으로 ‘경로잔치’나 ‘효도관광’ 등으로 사용했는데 우리마을에서 이 돈으로 국기 게양대도 세우고 국기도 살 계획”이라고 말했다.
온 마을에 국기를 달고 마을 회관에는 대형 국기를 다는 기념식을 할 계획이라고 하니 ‘태극기 휘날리는 갈미마을’을 상상해 본다. 갈미마을 젊은 어머니들. 나라를 사랑하는 인재를 기르겠다고 하니, 여기에서 나라의 큰 인물들이 많이 탄생하기를 기원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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