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희망은 배고픔을 면하는 것
대동아전쟁 때 강제징병, 살아서 고향 가는 게 희망
박수영, 그는 누구?
1963년 안정, 순흥, 단산, 부석면 교통의
요충지에 장수교(다리) 준공
1963년 군수 이태수, 경찰서장 김달조, 영
주여객 전운학과 협의하여 영주-
동촌간 경북 최초 미니버스(합승)
운행(이후 전역으로 확산)
1965년 안정, 순흥, 단산, 부석면까지 농어촌
전기공사 일시 점화 완공
1970년 죽계천 피끝마을 양수시설 및 경지
정리 완공 농업발전 기틀 마련
1973년 영주역 이전으로 부지 매각대금 시민
발전기금으로 전용 중간 역할
1978년 영주시민의 숙원사업이던 원당천 수로
변경사업 및 소백산 일대 저수지 건설
등 경제발전 5개년 계획에 반영
1980년 장수교 재 준공
1981년 영주에 종합대학 설립을 교육부에 건의
하는 등 추진 위원장으로 활동
1987년 안정, 순흥, 단산, 부석면민 일동으로
죽헌 선생 공덕비 동촌에 세움
“희망(希望)이란 지금보다 더 나아지는 것이고 또 더 좋아지는 결과를 바라는 것이다. 희망은 열렬한 소원이나 확신에 찬 기대감으로서 오직 미래를 향한 것이다.”
지난 24일 오전 일생동안 지역 발전과 나라를 지키는데 몸 바쳐 오신 죽헌(竹軒) 박수영( 朴受英, 92) 선생을 찾았다. 영주동에 있는 자택에서 박 선생을 만나 격동의 근대사 속에서 절망의 순간마다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살아 온 감동의 긴 이야기를 들었다.
▲ 청년 박수영, 잠견공출 1등으로 금강산 구룡폭포 보상 관광 |
어린 수영의 희망은 배고픔을 면하는 것
박수영은 1924년 3월 19일 안정면 동촌1리(피끝)에서 가난한 농부(부:박복신·모:백순이)의 아들(6남 2녀 중 3남)로 태어났다. 일제 강점기 중이라서 모든 것을 일제에 다 빼앗기고 교육의 기회조차 갖기 어려웠다.
소년 수영은 생각했다.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농업을 발전시켜야 하고 농업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공부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수영은 아버지 몰래 순흥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다. 아버지로부터 야단도 맞았다. 그러나 수영의 고집을 꺾을 수가 없었다. 순흥까지 먼 길을 걸어다니면서도 열심히 공부했다. 야구선수에다 씨름 선수도 됐고 나팔도 잘 부는 등 학교를 대표하는 학생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늘 우등상을 받았다.
우여곡절 끝에 심상소학교 6년 과정을 수료하고 졸업장을 받았다. 수영은 영주군 농회 지도원으로 들어가서 2년동안 대구에서 잠업연수를 받고 농회 기수보가 되었다. 성실과 열정을 인정받아 잠업기사로 승진해 풍기·봉현 주재 기수가 되었다. 그 후 영주군에 근무할 당시에는 잠견공출 경북1위(전국1위)를 차지해 보상으로 7박 8일동안 금강산 유람을 가기도 했다. 이 무렵 풍기에 살고 있던 송혜숙(86)씨와 결혼하게 된다.
청년 수영의 희망은 ‘대한민국의 독립’
1943년 청년 수영은 일본의 대동아전쟁(아시아 국가들을 점령하여 억압하고 침탈하려 한 전쟁)에 강제 징병되어 일본 구주로 가 국토수호병으로 복무하게 된다. 대한민국의 청년이 일본군이 되어 있다는 게 한없이 서럽고 야속했다. 일본군복을 입은 청년 수영. 그의 희망은 살아서 고향에 돌아가는 것이었고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는 것이었다.
거기서도 입소문을 통해 이승만·김구 선생이 상해 임시정부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이야기와 광복군의 활동 소식, 미중 연합군이 일본군과 대격전을 벌리고 있다는 소식, 일본군의 전황이 불리해 지고 있다는 소식도 듣게 된다. 그 때의 소원은 빨리 전쟁이 끝나고 무사히 귀국하는 것이었다. 강제 징병 2년째인 1945년 8월 15일 일왕의 무조건 항복으로 해방이 됐고 임시정부의 노력으로 무사히 고향으로 돌아오게 된다.
공산주의자들과 싸우기 위해 총이 필요했다
청년 수영은 해방 후 군농회에 복직되어 계속 근무하게 된다. 그러나 38선이 생기고 남과 북의 이념대결이 극에 달했다. 밤마다 빨갱이들이 마을에 내려와 만행을 저질렀고 이웃 친지가 빨갱이가 되고 이웃사촌을 살해하는 등 생존을 위협하는 사태에 이르게 되었다. 전국적으로 남조선노동당(남로당)이 무장봉기를 일으켰고, 군과 경찰이 진압하는 과정에서 많은 희생이 따르기도 했다.
수영은 공산주의자들과 맞서기 위해 총이 필요했다. 그게 희망이고 목표가 되었다. 그래서 육군헌병대에 아는 사람이 있어 그를 찾아 서울로 갔다. 헌병대 입대를 부탁하고 기차를 타고 내려오는 길에 죽령 굴 안에서 열차사고(기관고장)를 당하게 된다. 굴속에서 질식한 수영은 의식을 잃었으나 구조대에 의해 영주 향산병원으로 후송됐다. 겨우 목숨을 건진 수영은 1개월여 간 입원치료 후 퇴원하게 된다. 수영은 또 다시 공산당과 싸울 수 있는 방도를 고민하게 된다.
대한민국 경찰이 되다
청년 수영은 헌병의 꿈은 접고 총을 가질 수 있는 경찰이 되겠다고 마음먹었다. 마침 경찰 채용시험이 있어 응시하여 합격했다. 경찰전문학교에서 6개월 간 교육을 받고 순경이 됐다. 경찰이 된 수영은 빨갱이들을 몰아내고 평화로운 세상을 만드는데 앞장서 활동했다.
이 때 6.25 전쟁이 일어났다. 경찰인 수영은 낙동강 다부동전투에 참전하는 등 군을 지원하고 공산당을 물리치는데 많은 공을 세웠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과 서울수복이 있은 후 경찰의 임무로 돌아 온 수영은 예천·봉화 등 경찰서에서 사찰형사로 13년 간 복무하다 1960년 4.19 후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下野)와 함께 퇴직하여 고향으로 돌아오게 된다.
▲ 1963년 장수교 준공식, 갓쓴 노인은 박수영의 아버지, 박수영은 뒷줄 가운데 |
농업이 희망이다
1961년 고향 동촌으로 돌아 온 수영은 농촌 계몽과 농업 발전을 위해 마을 동장이 된다. 마을 동장을 하면서 농업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 이모작 연구와 비료와 거름을 사용한 농업 발전에 몰두했다. 수리시설을 군에 건의하고 농민들의 어려움을 호소하기도 했다.
당시 군은 쌀 1가마를 대여해 주고 가을에 1가마 반을 거두어들이는 제도가 있었다. 동장 수영은 대여미의 부당한 관행을 건의하고 시정해 줄 것을 요청하여 바로 잡는 등 농촌 살리기에 앞장섰다.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동장 대표로 선도적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고 군민의 대표자로 우뚝 서게 된다. 이러한 과정은 후일 통일주체국민회의대의원이 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게 된다.
▲ 죽헌제, 밀양박씨 문중에서 죽헌 선생 공덕을 기리기 위해 1990년에 세운 정자 |
▲ 참봉 박수영 |
지역 발전의 선도자 박수영 선생
박수영(영주군 통일주체국민회의 제2대 대의원)은 충정공 청재 박심문(忠貞公 淸齋 朴審問)의 15대 손이다.
박 선생이 살고 있는 영주동 자택 거실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사진과 ‘총화유신 민족중흥’이란 빛바랜 액자 두 개가 걸려 있다. 현재 거동은 다소 불편하지만 정신만은 또렷하다.
박 선생은 옛날을 회상하면서 “낙후된 우리고장에 전기를 넣고 도로를 건설하기 위해 손으로 비비고 발로 뛰었다”면서 “당시 김창근 국회의원, 이태수 군수, 김달조 경찰서장을 대동하고 상경하여 정부예산 지원 약속을 받아 냈다”고 말했다.
▲ 안정, 순흥, 단산, 부석면민들이 1987년에 동촌에 세운 죽헌 선생 공적비 |
그는 또 “당시 영주의 숙원 사업이었던 원당로 수로변경 등을 위해 순흥의 남종철, 풍기의 정진탁, 단산의 구정서 등과 강경식 경제기획원 차관을 방문하여 예산 지원을 요청하고 확답을 받아 냈다”고도 말했다.
박 선생은 지역 발전의 선도자로 헌신하였을 뿐만 아니라 신라아사달 왕릉 참봉으로 임명되기도 하였고 후손들에게 인간의 도리와 삼강오륜을 강론하는 등 이 시대의 마지막 선비로 추앙 받아왔다.
원로 박수영은 벽에 걸린 박 전 대통령 사진을 바라보면서 “박정희 전 대통령은 농업을 장려하고 산업화에 성공했다. 그래서 지금 잘 사는 나라가 되도록 발판을 마련한 것”이라며 “이제 나의 마지막 희망은 통일을 보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요즘은 돈이 흔하고 물자도 풍부하다. 또한 공짜도 많고 복지가 지천이다. 이럴 때일수록 국방을 튼튼히 하고 과학을 발전시켜야 한다. 그래야 전쟁을 막을 수 있고 통일을 기약할 수 있다”고도 말했다.
이원식 프리랜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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