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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마을 탐방[16] 풍기읍 수철리(무쇠다리)

단산사람 2014. 7. 27. 18:29

죽령 옛길의 길목에서 희방사 전설을 담다
우리마을탐방[16]풍기읍 수철리
[477호] 2014년 06월 27일 (금) 10:27:51 영주시민신문 okh7303@yjinews.com
   
▲ 수철리 전경
   
▲ 1960년 죽령고개
   
▲ 1960년 죽령마을토담집
   
▲ 죽령옛길

‘죽령옛길’의 길목, 옛 정취 담은 마을
추억의 간이역, 초가주막 등 볼거리

▲ 풍기읍 수철리 가는 길
영주 사람들은 ‘죽령옛길’ 가는 길은 잘 알지만 ‘수철리’에 대해서는 모르는 사람이 많다.

영주시내에서 영주교(영일초 근처)를 건너 자동차전용도로를 타고 죽령 방향으로 향하면 안정면을 지나고 풍기읍을 통과해 풍기읍 백리 앞에 다다른다. 여기서부터 국도를 타고 조금 더 올라가면 풍기읍 창락리에 도착한다. 이곳에는 주유소와 인삼시장, 식당, 인삼박물관, 풍기온천, ㈜ 비트로시스 등이 있어 제법 큰 마을이다. 이곳 창락리를 벗어나면 곧바로 수철리 땅이다.

요즘 수철리는 죽령옛길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 늘 붐비는 마을이 됐다. 지난 14일 소백산역 마당에 있는 정자에서 이 마을 서재홍 이장을 만나 무쇠다리 전설과 죽령 이야기 그리고 마을 사람들이 살아 온 이야기를 들었다.

   
▲ 수철리 골목길

▲수철리의 작은 마을들
수철리는 소백산역이 있는 무쇠다리(수철)마을을 중심으로 도솔봉 계곡과 연화봉 계곡에 산재해 있다. 도솔봉 계곡에 있는 시맥골(深花谷)은 골이 깊고 험해 예로부터 산삼이 많이 나던 곳으로 유명하다. 죽령옛길은 원골(遠谷)이라고도 했는데 골짜기가 깊고 거리가 멀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원골에는 촉령대가 있어 퇴계가 형 온계를 마중하고 시주(詩酒)를 즐긴 곳으로 원님들이 많이 드나들었다 하여 원님골이라 불렀다는 설도 있다. 희방사계곡 입구 가기 전 우측에 있는 계곡이 대미골이다. 계곡이 길고 아름다워 대미곡(大美谷)으로 불렀다고 한다. 계곡을 따라 십여 가구 주민들이 드문드문 자연부락을 이루고 산다. 수철(희망사역) 남쪽에는 용바우골(현 용바우산장)과 갈리지골, 옥녀봉, 우람골, 주전골 등 곳곳에는 화전민들이 살던 흔적이 남아있다고 한다.

‘죽령옛길’은 1910년까지만 해도 사시사철 번잡했다. 지체 높은 양반네나 천하디천한 백성들도 구슬땀을 서말은 흘려야 넘을 수 있는 고개였다. 1934년에 죽령로 국도가 열리면서 옛길도 주막도 점차 사라지게 됐다.

   
▲ 무쇠다리옛집

▲무쇠다리의 전설
수철리에는 삼국시대의 고적 무쇠다리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신라 선덕왕 12년(643) 서라벌 호장(戶長) 유석(兪碩)이 호랑이에게 잃은 딸을 구해 준 두운조사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희방사를 창건하고 나서 절로 통하는 개울에 무쇠로 다리를 놓은 사실이 희방사지에 전하고 있다.

       
▲ 서재홍 이장

무쇠다리는 이미 없어진지 오래인 듯하며 근래까지 둑다리로 이어 오다가 1940년대 초 중앙선 철도가 나면서 그나마 없어져 버렸다. 이곳은 순흥고을 지경이었기에 옛읍지에 이곳 촌명이 순흥부 창락면 수철교리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풍기면 수철리에 속했으며 속칭 ‘무쇠다리’라고도 한다.

서재홍 이장에 의하면 “수철리는 2014 농림수산부 ‘경관개선마을’로 선정되어 20억원의 사업비를 지원받게 됐다”며 “죽령옛길 길목에 옛 무쇠다리를 복원하고 옛 정취를 담은 전통마을로 가꾸어 나갈 계획”이라고 하니 기대가 크다.

   
▲ 희방사역

▲추억의 간이역 ‘희방사역’
희방사역은 1942년 중앙선이 개통된 후 간이역으로 문을 열었다가 1951년에 역사를 준공하여 정식 영업을 시작했다. 최근 이름을 소백산역으로 바꿨으나 정식 명칭은 희방사역이다. 현재 3명이 근무하는 소규모 간이역인데 곧 문을 닫을 것이라는 예상도 있다.

       
▲ 염태환 소백산역장

대부분 열차들은 그냥 통과하지만 하행선 오전 두 열차와 상행선 오후 두 열차만 사람이 타고 내린다. 수도권 지역 소백산 등산객을 위한 배려인 듯하다. 염태환 소백산 역장은 “간이역 문화프로젝트 사업에 따라 역사 외관을 보수하고 2층에 전망대를 조성했다.

역사의 창고는 무쇠달마을(수철리) 주민들이 사용하던 가마솥 등을 이용해 옛날 부엌으로 꾸몄다. 소백산역은 단순히 기차를 타고 내리는 곳에서 어릴 적 향수에 젖을 수 있는 추억의 간이역으로 탈바꿈시켰다”고 설명했다.

▲권점녀 할머니와 죽령마을

       
▲ 권점녀 할머니

권점녀(88) 할머니는 현재 수철리에 살고 있지만 아이 낳고 기르며 살 때는 죽령 고갯마루에서 살았다. 단양이 고향이 권할머니는 19살에 이곳으로 시집왔다고 한다. 남편은 군대 제대 후 죽령 검문소에 근무했고, 권할머니는 옥수수, 감자 등 농사를 지으며 어렵게 살았다고 한다.

아들만 사형제를 두었는데 죽령에서 삼십리길을 걸어 창락초등학교(풍기읍 창락리, 1937년 개교, 1990년 폐교)에 다녔다고 한다. 학교 갔다 온 아이들이 밥 달라고 졸랐지만 줄 것이 없어 같이 울었다고 한다. 그 후에도 가난은 계속되었다. 1978년 소백산 천문대가 생긴 후 군인들이 항고에 쌀을 담아 오면 밥도 해 주고 빨래도 해 주면서 가난하게 살았다고 한다.

       
▲ 김남이 씨

권 할머니는 “배골면서 자란 사형제가 보란 듯이 성장해 이제 아들들의 보살핌으로 배고픔을 모르고 살게 되었으니 참으로 좋은 세상이 됐다”고 했다.

이 마을 김남이(여, 70)씨도 죽령에 살았었다고 한다. “죽령재에 다섯집이 살았고 귀틀집 같은 초가에서 옥수수, 감자, 약초, 고랭지채소 등 농사를 지어 놓으면 장삿꾼들이 사러 왔었다”고 했다.


   
▲ 초가집주막
   
▲ 소백산전통된장

▲지금 수철리는 

마을 뒷산 중턱에는 절벽 끝에 지은 백룡사(白龍寺)라는 절이 있다. 이절은 본래 죽령 마루턱에 있었는데 1948년 이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이 마을 서재홍 이장은 마을 현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수철리에는 97호에 127명이 산다. 무쇠달에만 48호가 사는데 대부분이 70~80대 노인들이 많고 60대 초반이 7~8명 정도 산다고 했다.

   
▲ 김춘복 씨
       
▲ 조찬호 노인회장

조찬호(75)노인회장과 부인 김춘복(75)씨는 요즘 수철리에 대해 “조용하던 마을에 중앙고속도로가 개통(1995-2001)되고 죽령옛길이 명승지로 지정(2007)되면서부터 사람들이 북적이기 시작했고 주말이면 수백 명이 이곳을 찾아온다”며 “10여년 전 부터 땅값이 오르기 시작하더니 지금은 평당 50만원이 넘는다고 하니 금싸라기 땅이 됐다”고 말했다.

       
▲ 조옥래 초가집대표

역으로 들어가는 입구 오른쪽에 죽령옛길 초가집 주막(2011, 대표 조옥래)이 있다. 초가 3동과 물레방아, 연못 등을 조성해 전통 먹거리와 자연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선비들이 한양으로 과거보러 가던 길목으로 옛부터 있어 온 객주와 주막을 재현한 것으로 새로운 명소가 됐다.

역에서 희방사 옛길 방향으로 오르다보면 소백산희방전통된장이 있다. 우리 전통의 옛 맛을 살린 전통된장은 국산 콩만을 사용하여 만들고 있다. 소백산 맑은 물로 담은 된장독 300여개가 옛맛을 우려내고 있다.

▲화전민의 아들 김노인

       
▲ 시맥골 김노인

무쇠다리 옛터 표석 앞에서 이 마을 김노인(85)을 만났다. “정정하시네요”라고 했더니 “아니야, 적은 나이는 아니지만 지금은 구십이 넘어도 진짜 정정한 사람이 많아”라고 했다. 김노인은 시맥골에서 화전민의 아들로 태어나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하고 부모님을 따라 옥수수, 감자, 콩 등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고 했다.

김노인은 “당시는 도솔봉과 옥녀봉으로 오르는 골짝마다 사람이 많이 살았는데 움집 같은 초가집을 짓고 원시적으로 살았다”고 했다. 김노인은 “논이 없으니 쌀밥은 먹지 못했고 주식이 옥수수와 감자였다. 아침에 옥수수 먹고 저녁에는 감자 먹고 살았다”고 하니 당시의 화전민들의 삶을 현재로서는 짐작하기조차 힘이 든다.

       
▲ 박광식 씨

김노인은 또 “풍기장날이면 장작을 한 짐 지고 풍기장에 가서 팔아서 그 돈으로 성냥도 사고 비누도 사왔다”고도 했다.

       
▲ 이춘심 할머니

이 마을 박광식(60)씨는 “어릴 적 아버지를 따라 소를 몰고 죽령까지 올라가서 밭을 갈고 농사를 지었다. 요즘은 산돼지, 너구리, 오소리 등 온갖 산짐승이 다 내려와 난리를 치니 농사짓기가 어려워 사과농사만 짓는다”고 했다.

이춘심(85)할머니는 “선비 남편은 문중 일보러 다니기만 하니 먹고 살길이 없어 산나물 뜯어다 팔고, 남의 집 일 다니면서 팔남매를 먹여 살렸다”고 했다.

 이원식 프리랜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