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사랑/우리마을 탐방

우리마을 탐방[15] 순흥면 석교2리(돌다리)

단산사람 2014. 7. 27. 18:23

동방에 성리학을 전래한 안향(安珦)의 고향 마을
우리마을탐방[15] 순흥면 석교2리
[476호] 2014년 06월 19일 (목) 12:06:27 영주시민신문 okh7303@yjinews.com
   
▲ 석교2리 마을 전경
   
▲ 마을표지석
   
▲ 석교리 느티나무

순흥안씨 시조 자미(子美)가 터를 잡고 세거한 마을
안향은 옛 흥주 학다리마을(석교2리)에서 태어나

▲석교2리(돌다리) 가는 길
순흥면 석교2리로 가는 길은 영주 서천교에서 회헌로를 따라 순흥 방향으로 향한다. 회헌로는 서천교사거리에서 순흥면 읍내리까지 가는 길이다. 이 길은 회헌 안향을 기리기 위하여 선생의 호를 따서 회헌로(晦軒路)라 정했다. 회헌로에는 역사의 뒤안길에서 많은 이야기를 간직한 길이다.

장수고개는 장수왕과 관련이 있다는 전설도 있고, 옛 나루터가 있던 곳으로 장사와 관련이 있다는 설도 있다. 동촌고개를 넘으면 충절의 고향 피끝마을이다. 피끝 이야기는 정축지변 때 순흥안씨들이 큰 타격을 입은 사건이기도 하다. 이어지는 마을이 조개섬이다. 마을모양이 조개를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순흥면 지동리에 이르면 죽계천을 따라 난 길 좌우에는 제법 넓은 들이 나타난다. 죽계 서편 들녘 가운데 덩그러니 서있는 봉서루가 오가는 손님을 맞이한다. 여기서 부터가 석교2리다. 마을 입구에는 높이 4m 가량 되는 큰돌에 ‘석교2리 돌다리’라고 새긴 표석이 있다. 개망초가 지천으로 피어나 들판이 온통 하얀 물결로 일렁이는 지난 11일 안향의 고향마을 석교2리에서 그의 흔적을 찾아봤다.

▲‘安터’와‘학다리’는 어디인가?
약 8백여년 전에 순흥안씨 시조 호군공 자미가 순흥에 터를 잡고 ‘순흥안씨’라는 본관을 얻은 곳이 ‘安터’다. 즉 순흥안씨 세거 터전이란 뜻이다. 이곳은 안향의 탄생지이고 순흥안씨가 집거(集居)했다는 뜻에서 나온 말로 짐작된다. 송학산과 학교(鶴橋.학다리마을) 그리고 세연지가 있던 곳의 돌틈 사이를 흐르던 샘은 지금도 그대로다.

지역주민들에 의하면 학다리는 풍기에서 순흥으로 들어오는 입구 근교 일대를 말하며 학다리는 당시 마을의 이름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학다리마을은 현 읍내리사거리에서 석교2리로 이어지는 마을로 옛날에는 기와집이 삼십리나 이어졌었다고 하나 지금은 농가 몇 채가 띄엄띄엄 자리 잡고 있다. 순흥안씨 문중과 지역 사학자들은 “문헌 고증과 지역민의 구전, 현장 실사 등을 통해 볼 때 석교리 북쪽 지역 일대가 ‘安터(학다리마을)’이고 안향의 본가는 샘 인근 지점일 것으로 추정한다”고 전했다.

   
▲ 안향 유물관
   
▲ 안향의 샘

▲안향, 그는 누구인가?
안향은 순흥안씨 시조공(安子美)의 증손(4세)으로 1243년(고려 고종 30년) 흥주(지금 순흥면 석교리) 학다리 옆 본가에서 태어났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독서를 즐겼다. 당시는 고려가 몽고와 전쟁이 치열했던 때라 공부할 곳이 없었다. 그래서 안향은 숙수사(宿水寺)를 왕래하면서 유교 경서를 독학으로 수학했다. 지금 소수서원에 가면 당간지주를 볼 수 있다.

이것은 안향이 공부하던 숙수사의 옛터임을 알려주는 것이다. 그렇게 공부한 결과 일찍 문장을 이루었고 이후 글솜씨를 더욱 닦아 1260년(고려 원종 1년) 18세의 이른 나이에 문과에 급제하여 교서랑이 된다.

   
▲ 향려비각
   
▲ 향려단유허비

▲동방에 성리학을 최초로 전래한 안향
성리학은 중국 남송의 주희가 유학의 여러 갈래를 한데 모아 체계를 이룬 것으로 자식은 부모에게 효(孝)도하고, 신하는 임금에게 충성(忠)하며, 예(禮)로서 집안을 다스리고, 신의(信)로 사람을 대하고, 스스로를 경(敬)으로 닦으며, 모든 일은 정성스럽게 행(行)하라는 학문이다.

안향은 1290년 충렬왕을 모시고 원나라를 방문하여 연경에 머물면서 주자서를 손수 베껴 쓰고 공자와 주자의 초상화를 본떠왔다. 안향의 호 회헌(晦軒)도 주자의 호 회암(晦庵)에서 따왔다. 선생은 고려 조정의 최고 관직인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의 품계와 국무총리격인 도첨의중찬(都僉議中贊) 수문전태학사(修文殿太學士)라는 최고위 벼슬을 받았다.

벼슬에서 물러난지 2년 뒤인 1306년 9월 12일 64세의 나이로 숨을 거둔다. 장례 때는 칠관(관학) 십이도(사학) 유생들이 소복을 입고 제사를 지냈다니 당시 그의 유학자로서 명성이 어떠하였는지 짐작할만하다. 회헌 선생이 말씀하시기를 “성리학의 최고 경지에 이르면 미워하는 사람이 없는 단계에 이른다”고 하였으니 동방의 성인으로 추앙받아 마땅하다.

       
▲ 세연지비

▲세연지(洗硯池)가 궁금하다
세연지란 「安터」서남방 약 50미터 지점에 존재하는 작은 연못으로 회헌 선생이 공부할 때 벼루를 씻던 곳이라고 전해진다. 이곳은 송학산 바위틈 사이에서 맑은 물이 솟아오르는 샘이 있었고 샘 아래 네모진 연못이 있었다고 했다.

이 옹달샘과 연못은 사라호 태풍(1959년) 때 산사태로 매몰되었다. 마을사람들은 옹달샘을 본래 지점에 5m 정도 앞으로 옮겨 복원했으나 세연지는 복원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 샘은 지금도 약수터로 사용하고 있다. 세연지 자리에는 아래와 같은 비문이 그 옛날의 흔적을 전해주고 있다.

「順興西南 松鶴山下 鶴橋村 有石間小泉 下有半畝方池 卽我晦軒先生 少時 洗硯池 古傳 晦軒先生胎室在 其傍 先生舊第及洗硯」 「순흥 서남쪽 송학산 밑에 학교촌이 있고 바위 사이에 작은 샘이 있는데 그 밑에는 네모진 못이 있으니 회헌선생께서 소시에 벼루를 씻던 못이다. 전해 오기를 회헌선생의 태실이 그 옆에 있었고 옛날 사시던 집도 여기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세연지비는 1935년 김동진(貞山 金東鎭, 근세 유학자) 선생이 비문을 지어 학다리마을 언덕 위에 세웠다고 한다.

▲마을 전체가 유적지인 돌다리마을

       
▲ 권오수 씨

석교2리 입구에서 농로를 따라 마을로 들어 가다보면 2010년에 조성한 안향유적지가 있다. 이 유적지에는 후손 안응창공이 1656년(효종 7년) 안향이 탄생한 곳을 기리기 위해 세운 향려비와 안자(안향)사료관, 영정각, 향려단 유허비 등이 있다.

권오수(64)씨에 따르면 “어릴 적 이 자리에 높은 대가 있고 주변에는 소나무가 있어 마을 아이들의 놀이터였다”고 했다. 세연지 우물 근처에서 만난 배완선(70)씨는 “여기가 안향 선생이 마시던 샘이고 그 앞에 세연지가 있었다. 그렇다면 안향의 본가는 바로 이 근처일 것”이라고 했다.

       
▲ 최행복 씨

이 마을 최행복(58)씨는 송학산 자락을 가르치며 “저 밤나무 안쪽 대나무숲에 정자가 있었고 40년 전에는 사람이 살았다”고도 했다.

       
▲ 손주호 씨

옛 정자를 찾아가던 중 길을 안내해 준 손주호(59)씨는 “우물 앞에 세연지가 있었고 조금 높은 산 중턱에 정자인지 재사인지 있었다”고 했다. 마을 사람들은 “안향 선생이 붓을 씻은 곳이 세연지라면, 저 멀리 집에서 공부하고 여기까지 와서 붓을 씻었겠냐?”며 “안향의 본가는 샘 근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옹달샘이 있는 송학산 중턱에서 비봉산을 바라보면 순흥안씨 추원단이 바로 눈앞에 보이고 그 옆으로 최근 발견된 석교리고분, 향려단 유허비, 오산단 유허비 등이 한 눈에 보인다.

   
▲ 김원기 씨
   
▲ 김숙한 씨

마을길에서 만난 김원기(77)씨와 김숙한(71)씨 등 마을 원로들은 “천년 역사를 간직한 곳으로 마을 전체가 유물관이고 땅을 파면 어디라도 기왓장이 나온다”고 했다.

   
▲ 복숭아농장

▲부농의 꿈을 키우는 석교리 사람들

       
▲ 이금필 이장

석교2리 이금필 이장은 “석교2리는 현재 65호에 100여명이 살고 있다. 대부분 70대 고령자들이 많으며 50대 중반이 제일 젊은 층”이라고 했다. 이 이장은 “옛 흥주시대에서부터 순흥부를 거쳐 오늘에 이르는 장구한 세월 동안 논농사 중심 농업이었으나 지금은 부농의 꿈을 키우는 대농경영, 과학영농으로 탈바꿈 했다”고 말했다.

       
▲ 권영숙 씨

마을 주변 농토가 예전에는 모두 논이었으나 지금은 복숭아 과수원으로 변했다. 삼각지주대가 세워진 복숭아 농장에서 봉지를 씌우고 있는 권영숙(62)씨를 만났다. 권씨는“현대화 된 복숭아 농장은 약치기와 물주기 등이 모두 기계화·자동화 되어있다”고 했다.

       
▲ 권오규 씨

이 마을 권오규(80) 어르신은 “벼농사는 식량으로 서너마지기만 짓고 나머지는 모두 사과나 복숭아를 심어 소득을 올리고 있다”고 했다.

       
▲ 유관희 씨

복숭아농장에서 약을 치다 기자를 만난 유관희(65)·임화자씨 부부는 “복숭아 농사를 시작한지는 20년 가까이 된다. 작년(2013)에는 복숭아 값이 좋아 억대 수익을 올린 농가가 많다”고 말했다.

이원식 프리랜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