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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마을 탐방[12] 평은면 천본리(멀래)

단산사람 2014. 7. 27. 18:11

옛 선비들의 흔적을 간직한 평은면 천본1리
마을탐방 [12] 평은면 천본1리
[473호] 2014년 05월 29일 (목) 16:21:55 영주시민신문 okh7303@yjinews.com
   
▲ 멀래 마을 전경

영주댐 수몰마을, 제2의 보금자리 공사 한창
오계서원, 만대정, 원천정에서 후학 양성

▲평은면 천본1리 가는 길 = 영주 시내에서 영주중학교 방향으로 남간재를 넘고 술바우사거리에서 직진해 영봉로로 접어든다. 이산면 용상리 어실마을에서 좌회전해 조금 내려가다가 달래삼거리에서 또다시 좌회전하면 두월교를 만난다. 괴헌고택 앞을 지나 두월삼거리에서 평은·천본 방향으로 우회전하면 천상로로 접어든다. 덕현고개를 넘어서면 이곳 사람들이 ‘큰골’이라 부르는 골짜기가 나오고 조금 더 내려가면 평은리로 가는 길과 원천으로 가는 삼거리에 다다른다. 여기가 천본1리의 중심인 ‘멀래마을’이다. 멀래는 영주댐 수몰지로 사람들은 대부분 떠나고 신설 다리공사가 한창이다. 지난 18일 찔레꽃 향기가 물씬 풍기는 날, 천본1리에서 마을 어르신들로부터 마을의 내력과 오늘을 사는 이야기를 들었다.

   
▲ 외두들 마을
   
▲ 서부럼 마을
   
▲ 짐진골 마을

▲ 마을의 지명유래 = 천본리는 조선시대 영천군 천상면 지역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말천동·망월동·우천동·본리 일부를 병합해 말천과 본리의 이름을 따서 ‘천본리’라 하고 영주군 평은면에 편입됐다. 천본리는 1·2리로 나누는데, 1리는 외두들, 멀래, 서부럼, 짐진골이고 2리는 내매, 망월이다.

멀래(마을)는 원천(遠川)이라고도 한다. 봉화군 상운면 토일리에서 발원한 토일천이 녹전면 구봉천을 만나 흐르다 상운천과 합류해 이곳에 이르렀다가 내매로 흘러가 내성천과 만난다. 옛 선조들은 멀리서(遠) 온 시내(川)가 멀리로 흘러간다고 하여 ‘먼내’라 부르다 ‘멀래’로 발음하게 됐다고 한다. 외두들은 ‘와뚜들’ ‘윗두들’ 등 여러 가지로 표기하고 있는데 옛날 이곳에 기와를 굽던 굴이 있어 와평(瓦坪)이라 불렀다고 하며 기와(瓦)와 관련해 ‘와뚜들’이라 부르다 ‘외두들’로 불렀다고 한다. 기와굴은 조선 후기에 없어졌다고 한다.

   
▲ 멀래 3인방(김충섭, 송명선, 권형택)

▲ 교통이 불편했던 오지마을 = 멀래에서 60년대에 태어나 80년을 전후해 내명국민학교를 다닌 올해 마흔일곱 살 김충섭, 송명선, 권형택 삼총사는 어릴 적 이야기를 이렇게 전해줬다.

“오솔길 따라 산을 넘고 나들길 따라 학교(내명초)에 다녔다. 달광재를 넘고 내를 몇 개 건너고 굴부내재를 넘고 또 내를 몇 개 건너야 학교에 갈 수 있었다. 비가 많이 오는 날이면 선생님이 빨간 깃발을 꽂아 놓는다. 물이 깊으니 집으로 돌아가란 뜻이고, 파란깃발이면 물을 건너라는 신호”라고 추억했다.

       
▲ 송재극 한학자

평은면에서 옥편이라고 할 정도로 한학에 밝은 송재극(72, 전 평은면 재직)씨는 “천본리는 영주시의 가장 동쪽에 위치한 마을로 영주시, 안동시, 봉화군의 삼군 경계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면서 “사람들의 왕래가 드물고 외진 곳이어서 교통과 전기, 통신 등에서도 발전이 늦고 문화의 혜택이 더딘 오지마을이었다. 전기가 79년에 들어왔고 전화는 90년에, 98년에 다리가 놓였고 버스는 2005년에 들어왔다”고 했다.

 

 

       
▲ 우갑원 원로

▲ 퇴계 선생이 다니던 길 = 이 마을 우갑원(85) 원로는 “안동에 가면 ‘여왕의 길’이 있다. 영주에는 ‘퇴계의 길’을 만들었으면 좋겠다”고 하면서 “퇴계 선생은 도산에서 이산서원과 소수서원, 죽령으로 이어지는 길을 수없이 다녔을 것이다. 그 옛날 도산을 출발한 퇴계 선생은 이곳 외두들과 멀래 앞를 지나 덕현고개를 넘고 내성천을 건너서 또 박봉산 동창재를 넘어 영천(영주)으로 갔다. 이 길이 도산에서 영주로 가는 가장 지름길”이라고 했다.

이 마을에 버스가 다니기 전에는 영주로 갈 때 퇴계가 다니던 길로 걸어서 다녔다고 한다.

   
▲ 오계서원

▲ 오계서원은 퇴계의 수제자 간재를 모신 서원 = 오계서원은 평은면 천본리에 있다. 이 서원에 배향된 간재(艮齋) 이덕홍(李德弘, 1541〜1596)은 장수면 녹동 외가에서 태어나 19세에 퇴계 문하에 들어가 선생의 수제자(首弟子)가 된다.

30세 때 스승의 명으로 선기옥형(璿璣玉衡, 천구의)을 제작해 천리를 연구했으며 임진왜란을 대비해 거북선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구갑선도(龜甲船圖)를 제작하는 등 당시 조선 제1의 유학자요 과학자였으며 시인이었다.

퇴계는 간재가 늘 옆에 있기를 원했고 간재도 스승을 가까이에서 모시는 것을 하늘이 내린 행운이라 여겼다. 퇴계가 세상을 떠나던 날은 눈발이 쳤고 그의 마지막 말은 “매화에 물주라”는 당부였다. 매화에 물을 준 제자가 간재였고 퇴계 선생을 사모한 두향의 단심(丹心)이 매화가 되어 임종을 함께하고 있음도 그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 만대정
   
▲ 원천정
       
▲ 송하영 유학

▲ 옛 선비들이 남긴 흔적들 = 외두들 마을 뒤편에는 만대정과 원천정이 좌우로 나란히 마을을 내려다 보고 있다. 이 마을 송하영(78) 선생은 만대정과 원천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만대정은 생원 송복원(宋福源, 1544~ ?) 선생이 자연을 벗삼아 학문을 탐구하고 선비들과 교류하던 정자로 건립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본래 마을의 맞은편 야산에 위치해 있었으나 약 30여 년 전에 현재의 위치로 이건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했다.

또한 원천정(源泉亭)은 근세 학자인 송주환(宋胄煥, 1587-1954)이 강학(講學)하던 곳이다. 평은면 금광리에서도 이곳까지 공부하러 오는 학동이 있을 정도로 인근 각처에서 인재들이 몰렸으며 1950년까지 서당이 열렸다고 한다.

       
▲ 허대홍 교감

멀래 출신 허대홍(영덕초) 교감은 “교통이 불편한 오지마을에서 살면서도 부모님들의 교육열은 대단했다”며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모두 열심히 공부해 우리나라 각계각층의 지도자가 된 출향인들이 많다”고 전했다.

 

 

 

       
▲ 이병기 어르신

▲ 시냇물 길러다 먹고 송구로 연명하며 살았제 = 외두들 이병기(86) 원로는 “우리 마을은 언덕위에 옹기종기 모여 살고 있다. 새마을 사업을 하기 전에는 모두 초가집이었고 샘이 없어서 시냇물을 길러다 먹고 살았다”고 했다.

       
▲ 우영화 할머니

안정면 오계가 고향인 우영화(83) 할머니는 “보통학교 3학년 다니다 15살에 시집와서 여태 이곳에서 살았다. 당시에는 우물이 없어 시냇물을 길러다 먹었는데 깨끗한 물을 길러오기 위해 새벽에 물을 길렀다. 언덕빼기를 오르내리기가 힘들었고 네댓 버지기(옹기) 이고 나면 날이 훤해진다”고 했다.

       
▲ 우인복 씨

짐진골에 사는 우인복(79)씨는 15살에 6.25가 일어났는데 밤에 산봉우리에 올라 불꽃놀이 같은 죽령전투 광경을 구경했다고 했다.

우씨는 “일제 말엽에 모든 것을 수탈당하고 어려운 처지에 전쟁이 또 일어나 먹을 것이 없어 송구 벗겨 먹고 살았는데, 그 당시 산에 소나무가 하나도 없을 정도로 송구로 연명하며 보릿고개를 넘겼다”고 했다.

 

   
▲ 멀래 옛집

▲ 영주댐 수몰로 마을 모습이 달라지네 = 천본1리에는 40여호에 100여명이 살고 있다. 내성천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만 영주댐 만수 시 수몰지역이다. 그래서 다리 이설, 도로 확장·포장공사가 한창이다.

       
▲ 임병태 노인회장

멀래 주민들은 보상을 받아 큰골쪽 높은 지대나 외두들쪽으로 이주했고 타지로 떠난 사람도 있다. 현재 두 집은 아직 떠나지 못하고 있다고 우연목 이장이 전했다.

임병태(75) 노인회장은 “마을 경로당도 수몰지역으로 보상을 받아 20여m 높은 곳으로 옮겨 지었다. 노인회원은 50명쯤 되는데 외두들 경로당을 새로 지어 한 마을에 경로당이 두 개”라고 했다.

       
▲ 우점수 반장

 

       
▲ 이희순 할머니

외두들 마을회관은 지난해 현대식으로 새로 지었는데 열 집 사람들이 회관에 모여 점심과 저녁을 함께 먹으며 한집 식구같이 지낸다고 우점수(67) 반장이 자랑했다.
 

 

 

이원식 프리랜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