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 영주지 편찬한 이여빈의 고향 ‘감실마을’ | ||||||||||||||||||||||||||||||||||||||||||||||||||||||||||||||||||||||||||||||||||||
우리마을탐방[14] 부석면 감곡1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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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석면 감곡1리 가는 길 조와삼거리에서 우회전해 오르막길을 오르다보면 봉화군 봉화읍 표지판이 나온다. 봉화땅을 밟고 갈가리재에 오르면 대마산목장이 있다. 이곳은 신라와 고구려가 대치할 당시 고구려 군사가 과현(진우재)을 넘어 신라땅 영주를 침공했을 때 말(馬)을 조련했던 장소로 추정하는 곳이다.
감곡1리 본 마을인 감실로 가기 위해서는 낙하암천(落霞岩川)을 건너야 한다. 최근에 새로 놓은 감곡교를 건너면 넓은 들이 나타나고 동쪽 산자락 아래로 마을이 띄엄띄엄 자리 잡고 있다. 감실마을을 기준으로 아랫쪽으로 옷반, 새마, 석남이, 윗쪽으로는 내 건너 선바우가 있다. 지난 4일 감실마을 이갑선(77, 전 순흥향교 전교) 선생의 안내로 옛 감호가 있던 자리도 살펴보고 취사 선생의 흔적들을 둘러보고 왔다.
이곳은 마구령에서 근원한 임곡천(林谷川)과 미내재(美乃嶺)·자개봉(紫蓋峰)에서 근원한 사문천(沙文川)이 부석에서 합쳐져 낙하암으로 흐르니 이 내(川)의 이름을 낙하암천이라 이름 지었다. 낙하암천이 남으로 흘러 감곡에 이르러 평탄하고 온유한 감곡들을 적시니 이곳이야말로 선비들이 터전을 잡을만한 곳이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부석면 감곡리가 됐다. 원래 감곡은 거울 감(鑑)자에 계곡 곡(谷)자를 썼으나 일제의 민족말살 정책에 따라 달 감(甘)자 감곡(甘谷)으로 창지개명됐다고 전해진다.
취사는 이곳 감곡 마을의 입향조이고 한우(韓佑)의 문인이다. 취사는 1591년(선조 24) 진사시에 합격하고 1605년(선조 28)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이듬해 벽사찰방(碧沙察訪)에 임명됐으나 병중의 늙은 어머니를 생각해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 후 1610년(광해 2) 성균관 전적에 승진 등용됐다가 정인홍과 이이첨이 국정을 문란하게 하므로 이에 맞섰다. 이 때 정인홍 등이 이언적과 이퇴계의 문묘 종사를 반대하자 이를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고 그 뒤에 벼슬을 단념하고 감곡에 은거하며 후진 교육에 힘을 쏟았다.
취사는 만연에 영주의 향토사 연구에 뜻을 두어 여러 분야에 걸쳐 자료를 모으고 다듬는 등 「영주지」 편찬에 심혈을 기울였다. 편찬이 완성 단계에 이르러 1625년(인조 3) 이산서원에서 향내(鄕內) 관계 인사들의 심의를 거치고 이름을 「영주지」라 했다. 취사는 서문까지 써 놓았으나 간행은 보지 못했다. ▲감실 선비들이 남긴 흔적들
1613년(광해5년) 이이첨 등이 영창대군을 강화도에 귀양을 보내고 죽이려고 했던 계축화옥(癸丑禍獄) 때, 서슬 퍼런 그들에게 외롭게 그 부당성을 꾸짖다가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은거했다고 하니 선비 중에 선비라 할 수 있다. 취사는 이 정자의 이름을 인수(因樹, 나무에 기대어 집을 짓다)라 했으니 숨어산다는 뜻이기도 하다. 백은당은 생원 이진만이 서재(書齋)로 건립했다. 백은당은 자는 맹능(孟能)이고 호는 백은당(白隱堂)으로 부호군(副護軍) 기정(基定)의 아들로 취사의 현손이다. 현재 건물은 조선 후기에 중건된 것으로 산 중턱에 있었으나 인수정보다 높다고 해 현재 위치로 이건했다고 후손 이창선(81) 선생이 설명했다. 우계이씨 별묘는 정면 3칸, 측면 칸반으로 구성돼 있고 취사 종택은 감실마을 북쪽 산자락 끝에 동남쪽을 향한 안채와 사랑채, 동북쪽을 향한 옆채가 전체적으로 ㄷ자형으로 놓여있다. 취사의 묘역은 종택에서 동으로 약 200m거리 야산 중턱에 있다. ▲조상의 숨결을 느끼며 살아온 취사 종가 사람들
15대 종손인 남편(珽善)은 17년 전 세상을 떠나고 종부는 일찍이 가장이 됐다. 슬하에 아들 삼형제를 두었으며 지금은 장성해 대기업 임원으로 있다. 종부의 할 일은 참으로 많다. 4대 봉사에 불천위까지 5대 봉사를 해야 하니 그의 노고는 이루 말할 수 없다. 종부의 솔직한 심정은 “제사도 줄이거나 통합하고 묘제도 생략했으면 좋겠지만 취사가의 어른들은 아직도 떡짐을 지고 이 산 저 산 다니면서 조상을 섬긴다”면서 투정 섞인 자랑을 털어놨다.
시집을 온 후 한 번도 감곡을 떠나지 않았다는 김 종부는 이곳에서 농사를 주업으로 하면서 자식들 공부시키고 조상을 섬기며 40년 넘게 살아왔다. 그는 자식들을 훌륭히 교육시킨 장한 어머니이고, 농촌을 지킨 영농인이며 조상을 지성으로 섬긴 종부이다.
마을 앞 도로는 1980년 확장 포장됐으며 그 후 경지정리가 됐고, 2000년대 들어서 논둑밭둑 포장공사도 이루어졌다”고 했다. 김 이장의 부인 권순남(65)씨는 “석남에 살다가 20년 전 안산으로 이사왔었다”며 “저 앞산이 안산이다. 양팔을 벌려 마을을 안고 있는 형상이라고 해서 마을이름이 안산이 됐다”고 했다. 안산 마을 출신 권태영(66, 전 초등교장)씨는 “어릴 적 석남에 살았는데 6·25전쟁 전 소개령에 의해 안산으로 이주해 왔다”고 했다.
취사종택 가는길 고추밭에서 만난 이장춘(68)·최옥매(66) 부부는 “벼농사를 중심으로 콩(부석태), 수박, 고추, 가지 등 채소류 재배를 많이 한다”고 했다. 옷반 논에서 만난 신주균(58)씨, 석남들 모판에서 만난 임순희(58)씨, 감실들에서 만난 권영철(50)씨 등은 ‘농자는 천하지 대본’이요 ‘농지는 농자가 삶을 가꾸어 가는 터전’이라 믿으며 땅에 정성을 다하고 있다. 이원식 프리랜서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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