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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마을 탐방[11] 가흥1동 서릿골

단산사람 2014. 7. 27. 18:07

‘족제비의 보은 이야기’를 간직한 마을
우리마을탐방[11] 가흥1동 서릿골
[472호] 2014년 05월 25일 (일) 10:13:21 영주시민신문 okh7303@yjinews.com
   
▲ 마을 전경

현재 37가구 80여명 거주
매년 정월 대보름 동제 지내

▲ 가흥1동 서릿골 가는 길 = 신영주 남부육거리에서 현대아파트 방향으로 얕은 고개를 넘으면 한정교를 만난다. 이 다리를 건너서 좌회전하면 바로 한정공원이고 우측 공원사이로 난 길을 따라가면 한정마을에 이르게 된다. 한정에서 연화산 가는 길로 가다가 우측 자락길로 1km 쯤 올라가면 길가에 ‘참 살기좋은 서릿골’이라는 표석이 나오고 10여m 뒤에는 ‘족제비의 보은 이야기’ 비가 있다. 이어서 500년 수령의 큰 동수나무와 호랑이 바위가 있고 오르막길 10m 간격으로 세 그루의 동수나무가 있는데 그 가운데 나무가 동제를 올리는 동수나무다.

동수나무에서 마을을 쳐다보면 덩그러니 반곡종택과 10여호의 집들이 보이고 그 보다 더 높은 곳에 또 마을이 두둥실 떠 있다. 이 마을이 재미나는 이야기를 많이 간직하고 있는 반남박씨 집성촌 서릿골이다. 아카시아 향기가 물씬 풍기는 지난 16일 마을 사람들로부터 서릿골의 내력을 들었다.

   
▲ 서릿골 표석

▲ 서릿골의 유래 = “서릿골이라고 부르게 된 유래는 마을 중간을 통과해 흐르는 작은 계곡이 마을 입구 동수나무 지점에서 급경사를 만나 얼기설기 얽힌 나무뿌리와 바위틈새를 굽이칠 때 용솟음 현상이 일어나 물보라가 서리니 ‘서리는 계곡’이라고 해서 ‘서릴곡’이라 불렀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발음하기 좋게 ‘서릿골’이라 부르게 됐다. 그 뒤 행정구역 개편 당시 고유지명에 한자어를 붙이니 서릴 반(蟠)자와 계곡 곡(谷)자를 써서 반곡이 됐다”고 반곡종택 박찬우 선생이 전했다.

   
▲ 반곡종택
       
▲ 박찬우 선생

▲ 후손들이 복원한 반곡종택 = 반곡종택 입구에는 마을의 역사를 짐작할 수 있는 500년 수령의 은행나무가 버티고 서서 종택을 지켜주고 있다. 그 앞에는 높이 3m 가량 되는 자연석에 ‘반남박씨반곡종택’이라고 새긴 표석이 있다.

종택 마당에 반곡종중 박찬우(9대손) 도유사가 쓴 중건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정구 선조가 1748년 하한정(夏寒亭)에서 이곳으로 살림을 나서 1758년에 종택을 지었다. 1779년 아들 사표가 행랑채를 증축하고 손자 시원(時源)이 화재로 소실된 곳 일부를 개축했다. 오랜 세월 풍상을 겪으면서 건물 곳곳이 훼손되어 더 지탱이 어렵게 되자 종인들이 종택 중건의 뜻을 모으자 돈서가 터를 내놓고 완서와 찬성이 밑돈을 내놓았으며, 많은 종인들이 힘을 합쳐 2008년 옛 모습을 다시 살리게 되었다"라고 적혀 있다.

   
▲ '족제비의 보은 이야기' 비

▲ 족제비의 보은 이야기 = 조선 정조 때 진사 박문엽(朴文燁:소고공의 손자, 삼락공 박종무의 아들)의 둘째아들 정구선비는 한정마을에서 서리골로 살림을 나면서 그 백씨(형님)에게 문안을 드리기 위해 매일같이 한정마을 큰댁을 오르내렸다.

이른 봄 어느 날이었다. 정구선비가 동구 느티나무 아래를 지나는데 갑자기 커다란 족제비가 달려들어 선비의 도포자락을 물고는 기를 쓰고 끌어당기는 게 아닌가? 선비는 필시 무슨 곡절이 있음이리라 짐작돼 족제비가 끄는 대로 따라갔더니 웅덩이에 새끼 족제비들이 빠져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옳거니!” 선비는 곧 바지를 걷고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새끼 족제비들을 모두 건져내어 옷자락으로 물기를 말끔히 닦아주고 돌아섰다.

그리고 몇 해가 지난 뒤 어느 날 커다란 족제비 한 마리가 선비의 집 헌함마루에 와서 죽어 있었다. 이 족제비는 지난 날 정구선비에게 구원을 받은 바로 그 족제비였다. 생명을 다하게 된 족제비는 자신의 황모를 선비에게 바쳐 은혜를 갚으려 함이었다.

정구선비는 그 털로 붓을 만들었다. 정조 22년(1798) 손자 시원(時源)이 그 붓을 가지고 과거에 응시해 당당히 갑과에 장원급제하였으니 실로 희한한 인연이었다. 이렇게 맺어진 서리골 반남박씨와 족제비와의 사이는 지금에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서릿골 수십 가구는 거의 정구선비의 후손으로 한결같이 족제비를 보호한다고 하니 진실로 훈훈함이 감도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 동수나무와 제단

▲ 마을의 평안을 기원하는 동제(洞祭) = 서릿골은 해마다 정월대보름날 마을 앞 동수나무에서 동제를 지낸다. 이 마을이 생긴 후 매년 동제를 지내오다가 6,25를 전후해 몇 년간 동제를 지내지 못해 마을 사람들이 큰 피해를 입었다. 그 후 마을사람들은 더욱 정성을 모아 동제를 지내고 있다. 동제는 정월 열하루날 마을 사람들이 회관에 모여 제관1명과 집사 1명을 선정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제관은 생기복덕과 오행을 맞추어 흠결이 없고 깨끗한 사람으로 선정한다. 제관으로 선정되면 정월 열사흘부터 동제가 끝날 때까지 아침저녁으로 마을우물에서 목욕하고 부부생활도 금하며 도가에서 생활한다. 제물은 맑은 술과 삼실과를 비롯한 과일, 문어를 비롯한 어물을 제수로 한다.

정월 열사흘날부터 도가에 금줄을 치고 장을 봐서 제수를 장만한다. 정월 열사흘날 밤 자시에 제를 올린다. 목욕재계하고 의관정제한 제관 2명만 동수나무 아래 마련된 제단에서 제를 지낸 후 마을의 안녕과 풍년농사를 기원하는 소지를 올린다. 이튿날 마을 사람들은 도가에 모여 음복을 나누며 마을의 화합축제를 연다.

   
▲ 우물
   
▲ 호랑이 바위

▲ 오래된 우물과 호랑이 바위 = 마을 초입에는 옛 모습 그대로를 보존하고 있는 우물이 있다. 옛날에는 이 물을 길러다 식수로 사용했을 것으로 보여지나 지금은 마을 동제를 지낼 때 성수로 사용되기도 하고 제관들의 목욕수로 사용된다고 박찬우 선생이 알려줬다.

이 우물은 우리고장에서 현존하고 있는 우물 중 가장 오래되고 원형이 잘 보존된 우물로 손꼽히고 있다. 우물에서 조금 올라가면 첫 번째 동수나무 아래 호랑이 바위가 있다. 오래 전부터 그 자리에 있었으나 ‘호랑이 바위’로 이름 지어진 것은 최근이라고 한다.

2011년 봄 마을을 방문한 김주영 영주시장이 이 바위를 보고 호랑이 형상과 꼭 닮았다고 하여 그 때부터 ‘호랑이 바위’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박영서 통장이 전해줬다.

   
▲ 권경로당
       
▲ 박영서 통장

▲ 서릿골 사람들 = 이 마을 박영서(63) 통장은 여기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이곳에서 살고 있는 ‘터줏대감’으로 벼농사 120마지기 등 대농을 경영하고 있는 억대 영농인이다.

박 통장은 “서릿골은 도심 인근 농촌마을로 가흥1동 14통에 속하며 현재 37호에 80여명이 살고 있다. 대부분 65세 이상 고령이며 재래식으로 소규모 농사를 짓고 있다. 50-60대 젊은이 10여명은 벼농사을 비롯 고추, 수박, 생강, 약초(하수오), 축산 등 복합영농으로 고소득을 올리고 있다”고 했다.  

       
▲ 박연서 씨

40년 넘게 담배농사를 지었다는 박연서(77)씨는 “마을 앞 문전옥답은 1960년대 중반 경북선 철도부지로 많이 들어가고 계단식 논과 구렁(산골짝)에 있는 밭농사로 생계를 유지하고 아이들 공부시키며 살았다”고 했다.

       
▲ 김정자 씨

박씨의 부인 김정자씨는 “마을에 우물이 있었는데 두레박으로 물을 퍼 올려 식수와 생활용수로 사용했다. 빨래는 동구 밖 샘가에서 가서 하는 등 고생이 많았다”고 말했다.

 

       
▲ 장계홍 할머니

 

문수면 한쟁이에서 서릿골로 19살에 시집와서 6.25를 맞이한 장계홍(83) 할머니는 “그 해(1950년) 4월에 결혼하고 6월에 전쟁이 터져서 남편과 생이별하게 됐다. 기다리고 기다린 세월이 60년이 넘었다”고 하면서 “한 많은 서릿골”이라고 했다.

이날 마을회관에 모인 김병순(76) 노인회장, 이춘성(79)할머니, 박학서(80)씨, 박찬호(75)씨 등은 세월호 참사 이야기를 나누며 다시는 이런 끔찍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 김병순 노인회장
   
▲ 이춘성 씨

 

 

 

 

 

 

 

 

   
▲ 박찬호 씨
   
▲ 박학서 씨

 

 

 

 

 

 

이원식 프리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