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과 급제 6인(六印樹) 길러낸 학자의 마을 | ||||||||||||||||||||||||||||||||||||||||||||||||||||||||||||||||||||||||||||||||||||||||||||||||||||||||||||||||||
우리마을 탐방[10] 문수면 권선리(고랑골) | ||||||||||||||||||||||||||||||||||||||||||||||||||||||||||||||||||||||||||||||||||||||||||||||||||||||||||||||||||
| ||||||||||||||||||||||||||||||||||||||||||||||||||||||||||||||||||||||||||||||||||||||||||||||||||||||||||||||||||
난고서당 세워 인재양성 ▲ 문수면 권선리(고랑골) 가는길 여기서 좌회전해 서천강변로를 따라 2.5km 쯤 내려가면 소백산한우(육가공업체) 간판이 보이고 그 우측 도로변에 높이 2.5m 가량되는 권선리 표석이 나타난다. 표지석 방향으로 들어가면 좌측으로 문수농공단지가 나오고 단지가 끝나는 지점에 Y자 갈림길에서 좌측으로 조금 올라가면 큰 동수나무가 두 그루가 나타나는데 여기가 ‘고랑골’이다. 비스듬한 계단식 농토가 골짜기 안쪽으로 펼쳐져 있고 우측 얕은 산자락 아래로 집들이 길쭉하게 자리 잡고 있다. 신록이 산과 들녘을 온통 연둣빛으로 색칠하던 지난 9일 고랑골을 찾았다. 학자를 기리며 학문을 전수해 온 고랑골 어르신들로부터 참 선비들이 살아 온 이야기를 들었다. ▲ 마을의 유래 현재의 권선리는 고란골(皐蘭谷), 뒷골(후곡 後谷), 누루실(황곡 黃谷)로 이루어져 있다. 옛날 난곡(蘭谷) 박래길(朴來吉) 선생이 난고서당(蘭皐書堂)을 짓고 학문을 가르쳤다고 해 난고서당의 ‘고(皐)’ 자와 난고 선생의 ‘란(蘭)’ 자를 합해 ‘고란골’이라 했는데 지금은 ‘고랑골’로 부르고 있다.
▲ 육인수(六印樹) 유래비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마을 유래비와 육인수 유래기사비가 있다. 반남박씨 문중의 박한서(81) 원로는 다음과 같이 육인수의 유래를 설명했다. “고랑골의 입향 선조인 박래길과 처길은 후손들의 입신양명과 향내의 인문개발을 위해 8개 문중과 협력, 난고서당을 창설해 많은 인재를 양성했다. 이 때 우리문중에서 대과에 6명이 급제해 그 홍패(紅牌)를 동구의 큰 느티나무에 걸어놓고 천지신명에게 축하하는 고사를 올리면서부터 이 나무를 ‘육인수’라 부르게 됐다”면서 “이같은 성과는 전국에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발군의 위적(偉績)이라 할 수 있다”고 자랑했다. 육인수의 주인공은 무과에 급제해 무관을 지낸 박사용(1563년생), 문과에 급제해 흥양현감을 지낸 박사일(1664년생), 음죽현감을 지낸 박명세(1669년생), 옥구현감을 지낸 박숭고(1676년생), 결성현감을 지낸 박민고(1680년생), 성균관 직강을 지낸 박상진(1693년생) 등 6명이며 소과 급제자는 4명이다. 2009년 7월 7일 제막된 이 비는 후손 태서가 글을 쓰고 찬동, 한서, 찬석, 경서, 승대, 찬욱, 찬오가 세웠다고 적혀 있다.
▲ 연방정과 난곡정
이 마을 중간지점 산록에 남동향하고 있는 정자 하나가 우뚝서 있다. 이 정자의 내력을 알아보기 위해 이 마을 박찬석(79)씨를 찾아갔다. 박씨는 “이 정자는 조선 영조 때의 문인인 박숭고(1705년 문과급제), 박민고(1715년 문과급제) 선조의 유덕을 기리기 위해 문중에서 성금을 모아 1970년대 초에 건립한 연방정(聯芳亭)”이라고 하면서 “마을 초입의 난곡정(蘭谷亭)은 이 마을을 개척한 박래길의 높은 뜻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한 정자”라고 했다.
박씨의 부인 원종현(79)씨는 “연방정을 지을 때 목수가 하는 일을 제외하고는 문중 사람 모두가 힘을 모아 집을 지었다”면서 “조상을 섬기고 학문을 중시하는 정신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고 말했다.
▲ 난고서당 세워 인재양성에 진력 예산 확보를 위해 각 문중의 출자와 모곡이 이뤄졌으며 10여년 간 식리를 늘려서 1671년(현종14년)에 창건됐다. 건축 규모는 5간 겹집 학사를 건축하고 주소를 세웠다. 이어서 학전(學田)을 마련한 뒤 풍산류씨 서애 류성룡 선생 현손인 류희지를 초대 사부로 모시고 당원은 물론이고 향내의 현자제들을 모아서 경학, 도학, 예서 등을 교학했다. 인재양성에 진력한 결과 대과자 12명, 소과자 5명, 천관 2명, 유학자 1명, 항일사상가 2명 등을 배출해 국가에 공헌했다.
▲ 고랑골의 어제와 오늘의 이야기 박씨는 “이 못은 일제 때 농사용으로 판 저수지”라고 하면서 “예전에는 벼농사 중심 농업이었지만 지금은 벼농사는 조금만 하고 고추, 수박, 생강, 고구마 등 밭작물로 소득을 올린다”고 했다. 박씨의 안내로 마을 어르신 여러분을 한자리에 모시고 마을의 어제와 오늘의 이야기를 들었다.
6·25 참전유공자인 박대양(88) 어르신은 “오랜 세월 이곳에 살면서 조상의 은덕을 기리고 전통을 지키면서 살아왔지만 이제 변화에 적응하면서 살기좋은 마을을 만드는데 협조하고 동참해야 할 때가 됐다”고 말했다.
유만우(76) 노인회장은 “우리마을은 39가구에 90여명이 살고 있지만 대부분 70세 이상 노인들이고 젊은 사람은 몇 안 된다”고 했다.
박시우(84) 어르신은 “고요하던 고랑골에 농공단지가 들어오고 인근에 하수처리장, 쓰레기매립장과 분뇨처리장 등이 생겨서 조상님들이 걱정할 것 같다”고 하면서 우려의 뜻을 표하기도 했다.
박찬익(84)어르신은 “우리가 어렵게 살아온 이야기는 말로 다 못한다. 송구죽에 보리딩겨 먹고 살았다”며 “요즘 사람들은 그런 거 하나도 모를 것”이라고 했다.
서당가는 길에 만난 박찬동(87) 어르신은 “학교가 없을 때 이 서당에서 공부해 과거에 급제한 사람이 12명이나 된다. 작년에 서당을 수리하고 차량이 서당까지 들어 갈 수 있는 길도 닦았다”고 하면서 난고서당을 자랑했다.
고구마를 심다 만난 권영숙(84.여)어르신은 사진을 찍지 말라며 손사래를 젓는다. “오운 지곡이 친정이야, 젊을 때 고생은 모두가 같이 한 거고, 지금은 좋은 세상이 왔건만 잘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고 걸을 수도 없으니 이젠 다 살았어”라고 하면서도 “4남매 자식들 주려고 고추, 고구마 심었어”라고 말했다.
문수면 권선리 박찬진 이장(55) 마을탐방을 취재하면서 이장이 하는 일도 많고 수고도 많이 한다는 것을 알게 돼 진심으로 경의를 표하고 싶다. 권선리 박찬진 이장을 만나기 위해 전화도 여러번 하고 기다리는 시간도 길었다. 박 이장은 “1억 2천만원의 예산이 투입되는 농로 신설사업과 농기계창고 신축을 위해 오늘도 종일 바빴다”며 “귀향한지 24개월 됐고 28년만에 고향에 와서 이장을 맡아 무거운 책임감을 느낀다. 작은 행정이지만 투명하고 공개적으로 추진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박 이장은 또 “쓰레기매립장과 분뇨처리장 등과 관련해 주민복지사업에 신경을 쓸 예정”이라며 “수박, 생강, 고추 등 특수작물의 수익사업에도 힘쓰고 마을 어르신들의 복지에도 많은 관심을 가질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원식 프리랜서 기자 |
'책사랑 > 우리마을 탐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리마을 탐방[12] 평은면 천본리(멀래) (0) | 2014.07.27 |
---|---|
우리마을 탐방[11] 가흥1동 서릿골 (0) | 2014.07.27 |
우리마을 탐방[9] 이산면 신암2리 (0) | 2014.07.27 |
우리마을 탐방[8] 장수면 화기1리 (0) | 2014.07.27 |
우리마을 탐방[7] 안정면 용산2리 (0) | 2014.07.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