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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마을 탐방[9] 이산면 신암2리

단산사람 2014. 7. 27. 17:36

내성천을 앞마당으로 둔 선비의 마을
우리마을 탐방[9] 이산면 신암2리(우금·머름)
[470호] 2014년 05월 08일 (목) 12:30:51 영주시민신문 okh7303@yjinews.com
   
▲ 우금들과 마을 전경
   
▲ 600년 수령의 느티나무
       
▲ 석암교회

▲ 이산면 신암2리(우금·머름마을) 가는길 = 이산면사무소와 흑석사, 이산초등학교를 거쳐 내성천 석포교를 건너자 마자 좌측으로 난 길을 따라 언덕길을 오르면 솔숲에 둘러싸인 옛 이산동부초등학교를 만나고 조금 더 가면 시골에서나 볼 수 있는 작은교회(석암교회)가 나타난다. 여기서부터 신암2리이다. 마을로 향하는 길을 따라 500m 정도 가면 우금마을에 이른다.

마을 앞에는 높이 10m 가량 되는 느티나무 두 그루가 600여 년 동안 마을의 흥망성쇠를 함께 하며 수명을 이어오고 있다. 오랜 풍상 속에 지친 모습이 역력한 이 나무들 뒤로 우금촌 두암고택이 모습을 살며시 드러내고 있다. 마을 앞은 넓은 들이고 집들은 골짜기 안으로 살짝 숨어있다.

못자리가 한창인 지난달 29일 신암2리 우금·머름 마을을 방문해 마을 사람들로부터 마을의 유래와 살아 온 이야기를 들었다.

 

   
▲ 우금 골목길
   
▲ 고향집 쪽마루
       
▲ 이우기 이장

▲ 한 마을 두 동네 = 신암2리는 한마을이지만 우금촌과 머름마을로 구분된다. 이우기(67) 이장은 마을의 내력에 대해 “두암고택이 있는 마을이 우금촌이고 만취당이 있는 마을이 머름마을”이라며 “우금은 선성김씨 집성촌이고 머름은 연안김씨와 진성이씨가 많이 살고 있다”고 했다. 이 이장에 의하면 옛부터 ‘실내머름 반서울’이란 말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머름에서 실내까지 굴뚝길 십리길을 비 안 맞고 갈 수 있을 정도로 기와집이 많았다”고 했다. 정말 그랬는지는 알 수 없다.

       
▲ 김종억 씨

현재 이 마을에 사는 원로들에 의하면 50년 전 까지만 해도 종가집만 기와집이고 모두 초가집이었다고 하니 옛 이야기는 전설로만 전해질 뿐이다. 이 이장은 이어서 “신암2리에는 현재 50여 호에 100여명이 살고 있으나 독거노인이 많고 만65세 이상 노인인구가 절반이 넘는다”고 했다.

머름마을 앞 비닐하우스에서 만난 김종억(67)씨는 “우리마을은 벼농사를 주로하고 수박, 고추, 단호박 등 밭농사를 많이 짓는다”며 “사과는 묘목을 심고 시도해 봤지만 토질이 안 맞는지 실패했다”고 했다.

▲ 마을의 유래 = 우금(友琴)은 한성부 부윤을 역임한 김우익(서윤공)이 마을을 개척할 당시 마을의 지형이 거문고를 치는 형상이므로 거문고를 벗으로 삼는다는 뜻에서 우금(友琴)이라 했다고 전한다.
머름은 우금마을에서 삼봉골 마을 방향으로 약 100m쯤 가면 산아래 큰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머럼 또는 머름’이라고 불러오고 있다. 이는 우금과 삼봉골 사이 논둑 가에 작은 바위가 하나 있는데 옛날부터 이 바위가 말(斗)을 닮았다하여 마을 이름을 두암(斗岩)이라 불렀는데 발음이 말암 또는 머럼으로 부르다가 지금은 머름으로 발음하게 됐다고 한다.

   
▲ 두암고택
   
▲ 만감암

▲ 두암고택과 만취당이 있는 마을 = 우금촌 두암고택(友琴村斗巖古宅)은 20여 호의 민가가 산재한 마을 중간에 있다. 뒤쪽으로는 나즈막한 야산에 의지하고, 앞쪽으로는 내성천을 따라 넓게 펼쳐진 들판을 바라보고 있다. 그 우측에 만간암(晩看菴)이 있어 좌우 대칭과 균형미가 더욱 돋보인다. 솟을삼문을 지나면 넓은 바깥마당이 있고, □자형 정침을 중심에 두고, 우측으로 사당을 좌측으로 함집당이 자리잡고 있다. 정침은 김우익이 20세로 분가할 때인 선조 23년(1590)에 건립했고 함집당은 진사 김종호가 건립했다. 김우익(1571〜1639)은 광해군 4년(1612)에 문과에 급제하고 영원군수, 인조 16년(1638)에 한성부 서윤, 해미현감 등을 역임했다.

   
▲ 만취당

만취당은 형조·공조·예조정랑을 거쳐 강원도사, 충청도사, 옥천군수를 지낸 바 있는 만취당 김개국(金蓋國, 1548~1603)이 후학양성을 위해 40세(1587) 때 건립했다고 한다.

기록에 의하면 1587년(선조 20)에 살던 집 곁에 학문을 강론하기 위해 건립하였고 1729년(영조 5)에 1차 중수, 1777년(정조 1)에 2차 중수, 1964년 3차 중수를 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 김재옥 할머니

▲ 일제강점기와 6,25를 겪으며 = 두암고택 앞을 서성이다 옆집에 살고 있는 김재옥(의성김씨. 87) 할머니를 만났다.

“처녀공출이 겁이나 일찍 시집왔다”는 할머니는 18살에 선성김씨 가문에 시집 와 70년을 이곳에서 살았다고 했다. 김 할머니는 “옛날 단오날이면 이 느티나무에 그네를 매고 아이들이 온종일 놀았고 여름철에는 놀이터가 돼 아이들이 버글버글했다”고 한다.

그는 또 “두암고택 윗대 종부가 살았을 때는 마을사람들에게 후하게 대하고 음식도 나눠줘 친하게 지냈는데 지금은 종가집이 텅 비었고 돌보는 사람이 없어 허술하기가 그지없다. 가끔 관광객들이 찾아오는데 그 사람들 보기에 부끄럽다”고도 했다.

 

       
▲ 황병은 유공자

 

우금마을 입구 석암교회 옆에 살고 있는 황병은(88) 어르신 방에는 대통령 표창, 6,25 참전용사증서 등 액자가 벽에 가득 걸려 있다.

황 어르신은 “1948년 경찰에 투신해 덕유산 공비토벌, 영양 일월산 공비토벌, 태백산지구 공비토벌, 지리산 중봉 공비섬멸작전 참가 등의 공로를 인정받아 1960년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면서 국가유공자임을 자랑했다.

   
▲ 정선 할머니

 

 

 

▲호롱불 켜고 외나무다리 건너며 살았지 = 옛날에는 우금으로 혼인한다고 하면 양반집으로 시집간다고 남들이 부러워했다고 한다. 마을 앞에는 넓은 들이 있어 부자마을이고 고래등 같은 기와집이 있어 양반집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이 마을로 시집와 양반집 며느리로 선비의 아내로 살아 온 정선(82) 할머니는 당시 이야기를 이렇게 전했다.

“시조부, 시부모 모시고 선비의 아내로 살기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며 “다행인 것은 자식들이 선조의 뜻을 받들어 열심히 공부하고 덕을 쌓아 아들 손자 모두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육자로 성장했다”고 말했다.

 

       
▲ 박화자 씨

 

50년 전 마을의 모습을 전해 준 박화자(73) 씨는 “지금은 제방이 있지만 예전에는 버드나무가 제방이었다. 그래서 비가 많이 오면 마을이 물에 잠겼다. 마을 앞에 외나무다리가 있었는데 추수가 끝난 후 날을 정해 다리를 놓았고 봄이 되면 철거해 보관했다가 다음해에 사용했다”고 했다.  

 

       
▲ 김금자 씨

이곳에서 태어나 출가해 서울에서 살다가 최근 어머니(93)를 모시고 우금에 살고 있는 김금자(74)씨는 이릴 적 추억이 많았다.

“어릴 적 가난하게 살았지만 친구들이 많았고 추억도 많았다. 동네에 전기가 들어온 시기는 1970년대 중반으로 그 이전에는 여느 곳과 마찬가지로 호롱불을 켜고 살았다. 호롱불도 기름을 아끼느라 일찍 끄고 자야만 했었다. 또한 마을에는 우물이 세 군데 있었는데 어머니들은 하루종이 물 긷는 게 큰 일이었다”고 기억했다.

       
▲ 전예진 씨

김 씨는 이산초등학교 출신으로 그 때도 교실 앞에 소나무가 있었고 운동회 때 교가를 불렀는데 ‘800건아 모인장터 우리 이산교’라고 불렀을 정도로 학생이 많았다고 했다.

이 마을 전예진(74)씨는 “당시는 모두 살기가 어려웠는데 종갓집은 어떤지 가보니 종갓집도 보리밥에 감자먹고 살더라“고 했다.

       
▲ 우덕순 씨

 

우덕순(77)씨는 “21살에 시집와서 누에치고 명주 짜고 논일, 밭일 안 해본 일이 없고 물 길러오기, 나무하기 등 요즘 사람들은 상상도 못할 정도로 고생을 많이 했다”고 말했다.

 

일제강점기 때 태어나 일제의 강탈과 6,25 사변을 겪었고 보릿고개를 넘어야 했던 70-80대 원로들, 그들은 “살기 좋은 세상이 왔지만 이미 나이가 이 만큼 먹었다”며 씁쓸한 웃음을 짓기도 했다.

 

이원식 프리랜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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