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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마을 탐방[8] 장수면 화기1리

단산사람 2014. 7. 27. 17:32

일제 개명 마을이름 ‘花岐’를 ‘花溪’로 바로잡다
우리마을 탐방[8] 장수면 화기1리 꽃계마을
[469호] 2014년 05월 02일 (금) 18:30:28 영주시민신문 okh7303@yjinews.com
   
▲ 꽃계들과 마을 전경
   
▲ 500년 수령 느티나무

충신과 선비와 열부가 살았던 마을
현재 60가구 100여 명 거주

▲ 화기1리(꽃계)마을 가는 길 = 경북의 북쪽 끝자락 마을. 맑은 물과 공기라는 천혜의 자연환경을 가진 장수면 일대의 너른 들은 지금까지도 풍족한 곡창지대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는 곳이다.

화기1리(花岐1里)는 장수면사무소에서 예천방향으로 낮은 고개를 오르면 천하대장군 장승이 왼쪽으로 보이고 이어서 영주IC 네거리가 나온다. 여기서 직진해 200m쯤 가서 ‘장말손유물각’이라는 표지판 방향으로 좌회전해 고속도로사무소 앞를 지나 고속도로 지하도를 통과하면 우측으로 ‘열부각’이 나오고 20여m 지나면 마을의 당목으로 쓰였음직한 500년 묵은 느티나무 한 그루가 떡하니 버티고 서 있다. 이어서 ‘인동장씨 종택’이 나오는데 이 마을이 유서 깊은 꽃계마을이다.

연둣빛 아기신록이 피어올랐던 지난 20일 꽃계마을을 찾아 옛 선비들이 남긴 흔적들을 찾아보고 마을사람들로부터 오늘을 사는 이야기를 들었다.

   
▲ 열부각
       
▲ 장일덕 원로

▲ 함창김씨 열부각 = 정절비각의 주인인 함창김씨는 1898년 단산면 파회리(병산리)에서 태어났다. 14세에 이곳 장이덕에게 시집 와 시부모를 극진히 공경하고, 병약한 남편을 위해 목욕재계하고 분향하면서 ‘남편을 살려 달라’고 하늘에 빌었다. 그러나 시집온 지 5년 만에 남편이 죽음에 이르자 피를 토하며 기절했으며 예를 다해 장례를 치뤘다. 그 후 남편을 따라 여러 차례 순절하려 했으나 시어른들의 만류로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잠시 친정 나들이 허락을 받아 간 때인 1919년 3월 22일 끝내 22살의 꽃다운 나이에 부군 곁으로 갔다.

이 마을 장일덕(88) 원로는 “당시 소수서원을 비롯한 지역유림에서는 이에 감탄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전하면서 “영주시는 2010년 정절비각’을 건립하고 2011년 5월에 고유제를 지냈다”고 했다. 절의를 지킨 열부의 숭고한 정신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올바른 윤리관과 가치관을 심어주는 인성교육의 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 인동장씨 고택
   
▲ 송설헌
   
▲ 추원사
       
▲ 장말손 초장(보물 제502호)

▲ 꽃계의 중심 인동장씨 연복군 종택 = 꽃계마을(花溪)의 중심에는 인동장씨 연복군종택이 자리하고 있다. 연복군 장말손의 호는 송설헌(松雪軒)이다. 세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성종 대에 이르기까지 활약했다. 세조 13년(1467)에 이시애가 반란을 일으키자 왕이 직접 문무(文武)의 선비와 장군 28인을 선발하여 토벌군을 조직했는데, 이때 여기에 포함돼 토벌에 참여했다. 반란이 종식되자 그는 변란을 제압한 공로로 정충출기적개공신(精忠出氣敵愾功臣) 2등에 책봉됐다.

지금의 종택은 영주 입향조인 응신의 손자 언상(1522~1566)이 사일마을에서 이곳 꽃계로 이주하면서 건립했다고 하니 이집의 역사는 450년이나 된다.

집안의 위세를 나타내듯 웅장한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영남에서는 보기 드문 넓은 마당이 펼쳐지고, 마당에서 시작된 높은 기단은 영남 반가(班家)의 상징인 ‘ㅁ’자형 정침을 받치고 있다. 정침의 뒤쪽 왼편 언덕 위에는 단아하게 사당이 자리잡고 있으며, 정침의 오른편에는 유물각이 있고 유물각의 왼쪽으로는 영정각이 자리 잡고 있다. 이들의 공간은 멋스런 담장으로 각기 생활공간인 정침과 유물각, 제향공간인 사당, 숭모공간인 영정각으로 구분돼 있다. 고택 안 마을로 들어가면 송설헌, 추원사, 추모제, 기은정 등 선현들이 남긴 사당과 정자가 있어 선비의 숨결을 흠뻑 느낄 수 있는 마을이다.

 

   
▲ 화계교

▲ 꽃계마을의 유래 = 김태헌 이장에게 마을현황을 들었다. “화기1리는 인동장씨와 의성김씨가 집성촌을 이루고 있으며, 현재 60가구에 100여명이 살고 있다”고 했다. 김 이장은 “마을 입구와 끝에 800여m 간격을 두고 500년 묵은 동수나무가 두 그루 있는데 선조들은 이 나무사이에 집을 짓고 살자고 약속하고 마을을 이루었다”고 전했다. 김 이장은 마을의 유래에 대해 “고려 때 구(具)씨가 개척했다고 하며 그 후 민(閔)씨가 살았다고 전해진다. 조선조 세조 때 장말손의 현손 언상이 500년 전 이주해 마을 이름을 화계(花溪)라 불렀다”고 했다.

       
▲ 김태균 씨

김 이장은 또 “농경사회 때는 벼농사가 제일이어서 부자마을이었으나 지금은 밭농사에 밀리고 있는 실정이다. 현재 이곳은 벼농사를 중심으로 생강, 고추, 오미자 생산이 주를 이루고 있다”고 말했다. “선친의 고향이 이곳”이라고 말한 김 이장은 IT사업에 종사하다 뜻한 바 있어 20여년전 이곳에 정착해 현재 벼농사 25마지기, 특용작물 25마지기 등 대농의 꿈을 키워가고 있다.

경로당의 막내라고 밝힌 김태균(71)씨는 “화계(花溪)를 화기(花岐)라고 부르게 된 것은 일제가 화계의 ‘화’자와 마을 뒷산인 기산의 ‘기’자를 따서 ‘화기’라 불렀는데 이는 전통문화 말살을 위해 ‘창지개명’시킨 것”이라 며 “꽃이 자라려면 물이 있어야 하는데 꽃이 자라지 못하도록 ‘계’를 ‘기’로 바꾼 일제의 만행이다”고 말했다.

 

       
▲ 이정자 부녀회장

▲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 = 봄볕이 따사한 날. 기자가 이 마을을 찾았을 때 마을 사람들은 마당이나 비닐하우스에서 생강씨눈을 따는 모습이 여러 곳에서 보였다.

고택 앞 왼편 비닐하우스에서 생강씨눈을 따고 있는 이정자(63, 부녀회장)씨는 “전에는 논농사만 지었지만 소득이 없으니 지금은 생강, 오미자 등 밭농사에 기대를 걸고 있다”고 했다.

이 씨는 또 “이 마을은 오랜 전통을 고수하는 농업에서 과학영농, 대농(大農)으로 부농의 꿈을 키우는 농업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말했다.

       
▲ 이필호 할머니

호문리 녹동에서 꽃계로 시집와 60년 넘게 이곳에서 살았다는 이필호(83) 할머니는 “옛날에는 모두가 살기 어려웠고 얻어먹는 사람이 많았지만 나보다 더 어려운 사람을 돕고 살았다”고 하면서 “먹을 게 없어 젖이 안 나오는 이웃 아낙에게 시어머니 모르게 쌀을 퍼다 주기도 했었다”고 했다.

       
▲ 박필교 할머니

그는 또 “그렇게 어렵게 살다가 통일벼가 나와 2-3가마 먹던 논에서 5-6가마가 나오는 바람에 쌀밥을 먹을 수 있었고 보릿고개가 없어졌다“고 말했다.

서릿골에서 17살에 시집와 선비의 아내가 되었다는 박필교(85) 할머니는 “우리 영감 장 선비는 문필로 이름 높았었다. 서원이나 향교 출입시는 도포, 두루막 등 의관을 갖추어야 했기에 선비의 아내는 바느질과 다림질이 중요한 일과였다”고 말했다.

 

   
▲ 화계경로당
       
▲ 김화섭 원로

▲ 선비정신 이어 온 화계경로당 = 행정구역상 ‘화기1리’이지만 마을 사람들은 경로당의 이름과 다리(橋)이름 등 모든 명칭을 화계(花溪)로 쓰고 있다. 일제가 강제로 화계를 화기로 개명했기에 바로잡은 것이다. 이는 어느 마을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당당함이요 선비의 기상이라 할 수 있다.

화계경로당 앞에는 범죄없는 마을이란 표석이 있다. 모두가 합력한 증표이다. 오랜 세월 살아온 마을 사람들은 모두 경로당으로 모여 협력하고 화합하고 있다. 경로당은 쉼터의 역할을 넘어 나눔과 배려의 장소로, 노노케어(노인이 노인을 돌보는 일)가 있는 곳으로, 음식을 나누고 친교의 장으로 널리 사용되고 있다.

이 마을 태생으로 장수국민학교 해방 2회라고 밝힌 김화섭(81) 원로는 “옛날 이 마을은 매우 큰 마을로 150호가 살았으며 사람수는 500명이 넘었다”고 회고 하면서 “이 마을은 충신과 선비가 많이 태어났고 현재도 국내외 석학들을 많이 배출한 마을”이라고 자랑했다. 이처럼 마을의 대소사와 소통과 배려가 경로당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이원식 프리랜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