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년 격동의 세월 속, 효와 선비정신이 이어졌다 | ||||||||||||||||||||||||||||||||||||||||||||||||||||||||||||||||||||||||||||||||||||||||||
우리마을 탐방 [7] 선비의 마을 안정면 용산2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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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숲과 솔숲 그리고 고택숲 안정면 용산리는 서천교에서 풍기방향으로 가다가 나무고개를 넘기 전 새희망병원 방향으로 좌회전해 얕은 산고개를 넘는다. 반지미삼거리에서 용암산 방향으로 우회전해 경북축산기술연구소를 지나 조금 더 올라가면 도로 우측에 ‘대용산(大龍山)’이란 큰 표석이 나타나고 이어서 용산삼거리가 나오는데 여기가 ‘선비의 마을 용산2리’이다. 마을 뒤에는 용의 형상을 한 용암산(해발 637m)이 있고 산자락 끄트머리에 솔숲과 대숲이 어우러진 야트막한 동산 아래에는 고택들이 숲을 이루고 있다. 이곳에는 순흥안씨 서파종택(西坡宗宅)과 만지정·서파정·죽림사 등이 층층누대를 이루며 자리 잡고 있다. 서파종택 좌측으로 10여 미터 올라가면 창원황씨(昌原黃氏) 용산강당이 있고, 그 안쪽으로 경덕사·귀암정·귀암종택 등이 있다. 다시 그 좌측 위쪽에는 창원황씨 농고종택·농고정사 등이 있어 고택의 숲 또한 무성한 마을이다. 현재 이 마을에는 65가구에 150명이 살고 있으며 최근 들어 귀농인구가 늘어나는 추세다. 솔숲이 푸른빛을 띠기 시작한 지난 11일 용산 2리를 찾아 500년 역사를 더듬어 봤다.
▲ 단종 때 안리(安理)가 개척한 마을 = 안리(1393~?)는 고려 때 대유학자 문성공(文成公) 안향(安珦)의 5대손으로 해주 목사를 지낸 안종약의 아들이다. 파주에서 태어났으며 호는 서파(西坡)이다. 그는 학문이 깊고 덕망이 높아 1453년(단종 1)에 외직으로 의령현감에 부임했다. 그가 의령현감으로 재직할 때 심한 흉년이 들어 고을 백성들이 굶주림에 지쳐 사방으로 흩어져 고을을 등지고 떠나는 이들이 많았다. 그러자 그는 자신의 봉록을 나누어 굶주린 백성들을 구휼하니, 흩어졌던 백성들이 사방에서 다시 모여들었다. 이듬해 안리는 예천 군수로 승진 발령이 내렸다. 그러나 얼마 안 되어 단종이 왕위를 빼앗기고 물러나자, 안리는 단호하게 벼슬을 버리고 물러나 고향인 순흥부 남쪽 30리 누암산(樓岩山) 아래 터전을 잡았다. 그는 그 산자락에 숲을 개척하고 그 아래에 마을을 이루었으니, 그로부터 동네 이름을 대룡산(大龍山)이라 했으며 그 산 이름도 용암산(龍巖山)으로 바뀌게 됐다.
▲ 창원황씨 대룡산에 큰 터전을 열다 = 황춘일 창원황씨 종손은 “황지헌의 5대손인 농고 황언주(黃彦柱, 1553~1632) 선조가 배고개에서 대룡산으로 터전을 옮긴 것은 그가 이곳 대룡산에 사는 순흥안씨 안윤금의 딸에게 장가를 들어 처가 마을로 옮겨 살면서 부터였다”고 전했다. 그는 대룡산에 터전을 잡은 후 그곳에 농고정사를 짓고 학문을 탐구했으며, 소고 박승임을 사사(師事)하여 꾸준히 학문 연구에 분발했다. 황언주는 목사 황흠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덕수이씨로 참의(參議) 이거의 딸이다. 황언주는 10세 때 조부 귀암 황효공을 따라 영주 관아에서 퇴계 이황을 만나 ‘중용’의 기(氣)와 리(理)를 공부했다.
▲ 이영순 할머니의 대룡산 65년 = “19살에 대룡산 공주이씨 가문으로 시집와서 이 집에서만 65년째 살고 있어요”라고 말하는 이영순(84) 할머니의 이야기는 격동의 현대사를 살아 온 ‘어머니들의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1949년 가을. 단산면 병산리(젓돌)에서 가마타고 이곳으로 출가한 이 할머니는 사계마을 작은 초가집에서 살았다고 한다. 이 할머니는 “당시는 대가족이 한집에서 살았는데 시부모, 시조부모, 시누이 둘과 시동생 형제 등 모두 열 식구가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고 했다. 6·25 사변이 일어나던 1950년 여름. 당시 학생 신분이었던 남편은 ‘학도병으로 지원한다’는 말만 남기고 집을 떠났다. 신혼이었던 아내에겐 아무 말도 남기지 않았고, 아내도 떠나는 남편의 뒷모습만 바라볼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듬해 남편 없이 아들을 낳았고 ‘전쟁이 끝나면 돌아오겠지?’ 기다렸지만 남편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보릿고개를 넘어야 했던 1950~60년대 가장(家長)이 된 이 할머니는 농사와 길쌈과 바느질로 가계를 꾸려 나가야만 했다. 당시 유학자(사계서당)였던 시조부의 영향을 받아 시동생 둘과 아들은 학업에 열중하고 덕망을 쌓아 아들 종대(63, 부산교회 장로)는 사업가로, 시동생 만규(66, 서울교회)는 담임목사로, 작은 시동생 상규(64, 부산고신대)는 대학교수로 성장했다. 이영순 할머니. 그는 전쟁의 아픔과 가난을 이겨낸 인간 승리자요. 이 시대에 보기 드문 효부(孝婦)였으며, 맹모 같은 어머니셨다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 500년 만에 빗장 연 선비의 마을 = 장수 꽃계에서 대룡산으로 출가했다는 우분남(87) 할머니는 “우리 또래들의 젊은 시절의 고생은 말로 다 못한다”면서 “영주장날이면 감이며 곡식이며 머리에 이고 30리 길을 걸어서 갔는데 그 땐 서천교 다리도 없어서 신발을 벗고 건너야 했어”라고 했다. 그는 또 “배가 고파 굶주릴 때 박정희 대통령이 좋은 나락씨(통일벼)를 보급해서 쌀밥을 먹을 수 있도록 해줬는데 요새 사람들은 그런 거 다 모르지”라고도 했다.
마을 원로 황병일(80)씨는 “마을이 개척된 후 500년 동안 유학과 농업으로 살던 마을이 2000년대부터 큰 변화를 맞이했다. 고속도로가 마을을 갈라놓았고 학교가 폐교되고 된장공장이 들어왔으며 인삼시험장, 축산기술연구소, 보건소 등이 들어왔다”고 말했다.
이 마을 이영숙(78)씨는 “30년 전엔 이 자리에 학교(안정남부초)가 있었는데 학생수가 300명이 훨씬 넘었다. 지금은 마을에서 아이들 보기 어렵다”고 했다.
이 마을 황영문(70)씨는 된장공장을 가리키며 “경북에서 제일 큰 된장공장이 여기에 있다. 된장단지가 1천개가 넘고 매일 일하는 사람이 10여 명씩으로 지역경제에 크게 도움을 주고 있다”고 말했다. 용암산으로 오르는 곳곳에는 현대식으로 지은 별장 같은 양옥집들이 보인다. 멀리 문수산도 보이고 학가산도 보여 전망이 좋다는 소문이 나면서 탐내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최근에는 용수사와 월은사가 자리 잡았고 인삼포 옆에는 태양광 발전시설도 여러 곳에 들어섰다. 이 곳 역시 사과농장이 새롭게 조성되고 있고 골짝마다 축사들이 늘어나고 있다. 마을 사람들은 용암산 등산로를 개발해 ‘용암산바위공원’이라는 새로운 관광명소를 만들어 찾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
공동체의식 함양과 효 실천 중심될 것 15년째 이장을 맡고 있는 안우석 이장은 순흥안씨 후손으로 서파 종택에서 어린시절을 보냈다. 지금까지 종택을 지키면서 ‘선비란 무엇인가?’에 대한 의문과 ‘효교육을 어떻게 할 것인가?’ 에 대해 고민해 왔다. 안 이장은 선비정신에 대해서는 “선비란 학문을 숭상하고 청렴과 결백을 실천하는 사람”이라고 하면서 “인성교육은 성장과정과 배움의 과정이 중요하다. 나만 생각하고 내 아이만 잘 하면 된다는 사회풍조 때문에 교권침해, 자살, 왕따, 폭력 등이 발생하고 있다”고도 했다. 이어서 그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효마루’ 체험학습프로그램을 계획하게 됐고 이를 통해 공동체의식 함양과 효의 실천에 중점을 둘 것”이라고 밝혔다. 용산2리에는 2013년 11월 ‘효마루체험센터’가 완공됐다. 이제 안 이장이 꿈꿨던 효의 실천이 여기에서 꽃피워지길 기대하고 있다. 이원식 프리랜서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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