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학교 이야기/소백산 이야기
순흥과 풍기
단산사람
2011. 12. 31. 12:35
大韓半島 白豆大幹 알프스 소백산 비로봉과 연화봉 죽령, 도솔봉 산골짜기에서 발원하여 세계적인 품질의 인삼과 사과의 고장 풍기를 감돌아 내려오는 남원천과 비로봉과 국망봉. 상월봉, 형제봉 산골짜기에서 발원하여 순흥 선비촌 소수서원을 거쳐 내려오는 죽계천이 만나는 칠백리 낙동강 상류인 영주 서천은 물고기뜰이 지천으로 많아 청둥오리를 비롯한 겨울철 새들의 지상천국이랍니다. 가운데 봉우리는 소백산 비로봉입니다. 저 산 너머 단양에는 태고의 신비를 간직한 고수동굴, 천동굴과 노동굴이 있고 영춘 지역에는 사계절 아름다운 남천계곡, 천태종의 본산인 구인사와 온달산성, 온달동굴과 영월의 김삿갓 유적지와 백두대간 태, 소백 양백지간에서 발원하여 남한강으로 흐르는 청정지역 동강이 있습니다.
日本列島 동해안 부근 태평양 해저에 대지진이 발생한 여파로 거대한 해일이 일본 해안지역을 덮쳐 그 피해가 막심하다고 합니다.
일본열도는 지구 지형상으로 대한반도의 방파제 역할을 하기 때문에 피해복구에 우리도 전심 전력을 다해 동참해야겠습니다.
대한반도 영주 봉화 지역은 동해쭉으로는 백두대간 태백산맥, 서해쪽으로는 소백산맥이 분지형을 이뤄 태풍과 오염된 공기유입을 막아주기 때문에 초강력 지진 및 수백미터 해일이 밀려온다고 하더라도 안심 할 수 있고 지하 수백미터에 걸쳐 강한 암반층이 가마솥 형상을 이뤄 대한반도 최대 양질의 청정 지하수를 담고있어 지구촌의 천혜받은 축복의 땅이랍니다. 그리고 연간 청정일수와 양질의 일조량이 동남아시아 중 최고이기 때문에 일본업체들이 태양열 발전에 진출하려고 하는 지역이기도 합니다.
정감록 십승지 으뜸 지역이자 조선조 한반도 최고 예언자 남사고 선생이 말을 타고 봉화에서 한양으로 가는 길에 안정 들판(비상활주로지역)을 지나가던중 소백산을 보고 ' 저 게 바로 사람을 살리는 산이다" 라며 말에서 내려 산을 향해 넙죽 절을 했다는 일화가 유명합니다.
영주의 화강석과 봉화의 춘양목(금강송), 내성천의 모래는 일본이 최고로 인정해주는 건축재료입니다.
백두대간 소백산맥 영주 도솔봉 일대에 국내최초 국립테라피 단지와 태백산맥 봉화 문수산 일대에 국립수목원이 들어서면 국내최고 청정지역인 영주와 봉화는 옛날의 명성을 되찾을 날이 올것입니다. 영주댐이 건설되면 우주국 지구촌 수도로 최 적합지역이 될 것입니다.
<순흥 도호부>
밭이 된 순흥도호부를 아시나요 (소백산-영주)
Ⅰ.죽령
‘대나무도 넘기 힘든 고개'
죽령(689m)을 넘는다. 비가 뿌린다. 자욱한 안개까지 몰고 온 빗줄기가 우루루 잿마루를 넘는다. ‘선비의 고장, 영주’ 땅을 알리는 표석이 빗속에 희미하다. 그래서인가, 잿마루 죽령주막의 흘러간 노랫소리도 쓸쓸하다. 옛 책 <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죽령 잿마루에는 영남의 관문이었던 성이 있었다지만 그 흔적조차 찾을 길 없다. 다만 죽령에 얽힌 온갖 풍문들만 재넘이 바람에 실려 고개를 넘나든다.
신라 효소왕 때의 화랑 득오가 지은 향가 <모죽지랑가>의 죽지랑도 죽령과의 인연에서 비롯된다. 진덕여왕 때 사람 술종이 삭주(지금의 춘천) 도독사로 가면서 죽령을 넘을 때 만났다는 한 거사와의 인연으로 태어났다 해서 아들의 이름을 죽지로 지었다는 것. 이 이야기는 <삼국유사>에 나오기도 하거니와 이 책에는 죽령이 ‘죽지령(竹旨嶺)'으로 기록되어 있다. 아무려나 죽령이 ‘죽지령'이거나 지난 호에서 말한 ‘죽죽이'에서 왔거나 모두 ‘죽'이 뿌리다. 그 죽 뿌리를 찾다보면 죽령이 ‘큰 고개'라는 뜻에서 비롯되었다는 풀이에 이른다. 그 해석은 죽령 고개에 무릎 장단을 치고 추임새까지 넣어놓는다. 큰 고개가 한자에서 뜻 빌림을 하면서 ‘대재'가 되는데, 여기서의 ‘대'가 다시 ‘대나무=죽(竹)’으로 이어졌다는 것. 우리말과 한자가 뒤죽박죽 뒤섞이면서 죽령으로 만들어냈다는 것. 그런데, 죽령(더 남쪽으로 잡으면 안동)은 우리나라 대나무의 북방한계선에 걸린다. 대나무 선을 그어보면, 강원도 양양에서부터 동해안을 따라 내려오다가(백두대간을 넘어 서쪽으로 가지 못하고) 울진 죽변에서 내륙으로 들어와 마침내 백두대간에 걸리면서 죽령~새재~추풍령으로 이어진다. 그러니 죽령은 우연 같은 필연으로 ‘대나무도 넘기 힘든 고개’가 된다.
대나무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아주 힘겹게 죽령을 넘어간 종이 하나 있다. 오대산 상원사 동종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신라 성덕왕 24년(725)에 만들어졌다는 이 종의 본디 자리는 안동 땅이었다. 경주의 성덕대왕신종(에밀레종)과 함께 범종의 대표로 꼽히는 것이다. 상원사가 세조를 기리는 절집이 되면서 나라 안의 이름난 종을 찾다가 안동 남문루에 걸려 있는 이 종을 점찍었다. 100여 필의 말이 끄는 수레에 싣고 가는데, 죽령 잿마루에 이르러 꼼짝도 하지 않았다. 고민 끝에 36개의 종 젖꼭지 중 하나를 떼어 안동으로 보내고 나서야 재를 넘었다는 이야기다.
옛날 죽령은 시끌벅적한 고갯길이었다. 삼국의 싸움터를 지나, 새 나라 고려의 이념이 경상북부의 큰 도시 안동과 순흥으로 이어지는 길목이었다. 과거 길의 선비들이나 장사치들이 부지런히 재를 넘었다. 죽령주막 앞 골짜기를 따라 희방사역까지 2.5킬로미터의 그 옛길이 이어진다. 이 길에는 술집은 물론이거니와 떡집이며 마방이며 객점이며 짚신장수까지 있어 그야말로 어느 저잣거리에 못지 않게 시끌벅적했다. 술집은 희방사역 자리의 마을 어귀에 있던 무쇠다리 주막거리가 가장 컸고, 죽령의 고갯마루 주막거리가 두 번째, 그 사이에도 느티정과 주점 주막거리가 있었을 정도였다니 그 흥청거림을 짐작하고도 남겠다.
그 고갯마루 주막을 물려받은 죽령주막 마루에 앉아 택배기 한 잔 마시며, 흘린 술에 젖은 거친 턱을 쓸며 희미한 잿마루를 바라보고 싶다. 산줄기 달리다 편 텐트 속에서, 새벽이 어슴어슴 깨어날 즘 잠 덜 깬 귀로 저 옛길 올라오는 보부상들의 수런스런 목소리를, 혹은 그 어떤 그리움 깊어서인지 야반도주로 지친 남정네의 한 깊은 속내를 들어보고 싶다.
Ⅱ.풍기
저마다 먹고살 건 움켜쥐고 찾아왔다
소백산 남녘 자락에 안긴 풍기(豊基)는 그 이름처럼 풍요로운 터다. 웬만한 장마에도 홍수가 들지 않고, 백두대간이 북녘을 가린 덕에 때때로 녈비(지나가는 비)가 내려 가뭄이 들지 않는다. 거기에다 진흙보다는 모래가 더 많이 섞인 모래진흙땅이어서 농사가 잘 된다. 죽령 고개를 사이에 두고 북쪽 단양이 석회암지대이지만, 그 남쪽 풍기 땅은 화강암의 풍화작용으로 이루어진 사양토다.
풍기가 풍요로운 땅이 되는 데에는 뭐니뭐니 해도 인삼이 으뜸이다. 풍기인삼은 예로부터 그 이름 값을 톡톡히 했다. 풍기인삼을 담았던 종이에서는 몇 달이 지나도 인삼 내가 풍긴다고 했고, 두세 번 달여먹어도 좋을 만큼 약효가 높았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때는 개성삼은 열여섯 냥, 금산삼은 열 냥, 풍기삼은 여덟 냥을 한 근으로 쳐서 값을 매겼다고 한다. 1970년 인삼 포장 규격이 통일되기 전까지만 해도 풍기인삼의 300그램을 다른 지방의 인삼 375그램과 같게 쳤을 정도였다. 모양에서도 서로 달랐다. 모두 고려인삼이라는 이름을 달았지만 말린 인삼을 구부린 정도로 보아 산지를 구별했다. 강화·김포·개성 인삼은 곧은 그대로인 ‘직삼’이며, 금산인삼은 완전히 구부린 ‘곡삼’이고, 풍기인삼은 그 중간쯤으로 꼭 절반을 구부리는 ‘반곡삼’이다. 이 구부림은 약효보다는 그 지방의 습성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반곡삼인 풍기인삼의 뿌리는 소백산의 산삼에 닿아있다. 예로부터 소백산 산삼은 이름난 진상품이었다. <삼국사기>에 신라 성덕왕 33년(734) 당나라에 산삼 200근을 선물했다는 기록이 있고, 조선 왕가에서도 즐겨 썼다고 한다. 그러니 나라에서는 산삼을 바치라고 성화였을 테고, 풍기사람들은 얼마나 들볶였을까. 그래서 소백산 산삼 씨앗을 받아서 기르게 된 것이 풍기인삼의 시초라는 것. 또 하나는 조선 중종 때 주세붕이 풍기 군수로 있으면서 산삼 씨앗을 구해 풍기읍 금계리에 뿌리면서 시작되었다고 전한다.
인삼은 ‘반음-반양’ 즉 그늘과 햇볕이 적당히 드는 곳에서 잘 자란다. 또 바람이 잘 통하면서도 물이 잘 빠져야 한다. 땅이 너무 기름져서도 안 되고, 밤낮의 기온 차도 커야 좋다. 이런 조건은 사과 농사에도 좋다. 겨울이면 눈이 많이 내리고, 봄이면 녈비가 내려 가뭄 걱정이 없다. 이 모든 조건을 충족시키는 울타리는 역시 소백산이 어깨 겯고 있는 백두대간이다. 흔히 죽령을 넘어온 풍기 바람이 세차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것은 북서계절풍이 부는 겨울이고, 대부분의 삼밭이나 사과밭은 소백산에 등을 기대고 동남쪽을 바라보고 앉았으니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한다.
풍기를 흔히 바람과 돌과 여자가 많다고 해서 뭍의 제주도라 불렀다. ‘풍기 삼다’ 중 바람과 돌에서는 고개를 끄덕이던 이들도 여자에서는 고개를 갸우뚱한다. 이 ‘여자’는 십승지지에 그 뿌리를 둔 곁가지에서 비롯되었다.
본디 승지는 경치 좋은 곳이나 지형이 뛰어난 곳을 일컫는다. 하지만 승지는 풍수의 시각으로 보아 굶주림을 면하고 전쟁이나 천재지변을 피할 수 있는 피난처를 뜻한다. 신라 말의 도선을 비롯해 고려 말의 무학, 조선 중엽의 남사고·이지함들이 이른바 최고 풍수 도인으로 꼽힌다. 예로부터 열 곳의 승지, 즉 십승지를 꼽았다. 십승지로 꼽히는 곳은 조금씩 다른데, 남사고의 십승지가 가장 널리 알려졌다. 지난 호에 말한, 소백산에게 ‘사람을 살리는 산’이라며 절을 했다던 그 사람이다. 그가 첫번째로 가리킨 곳이 바로 풍기인삼의 텃밭이자, 훗날 정감록마을이 된 금계동이다.
조선시대의 비결서 <정감록>의 십승지는 남사고의 것과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으뜸으로 꼽는 곳이 풍기 금계동인 것은 같다. 하여 금계동을 중심으로 한 소백산 남쪽 자락 곳곳에 <정감록>을 받드는 이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이 풍기를 찾은 때는 구한말이나 일제강점기 때처럼 고단한 시절이었는데, 그 중에서도 6·25 때 피난 와서 눌러앉은 이들이 대부분이다. 풍기는 거란이나 몽고의 침입이나 임진왜란 때도 큰 피해가 없었고, 6·25 때도 스쳐가는 정도였다니 십승지의 ‘영험’ 덕을 톡톡히 봤다.
팔도에서 온 이들로 넘쳐나던 그 시절 풍기사람 열에 여덟은 타지에서 온 이들이었다. 특히 함경도·평안도·황해도 등 북한에서 내려온 이들이 많아 풍기는 ‘이북5도’라 불리기도 했다. 그 중에서도 명주의 본고장이었던 평안도 영변과 덕천에서 온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이 1930년대부터 ‘쪽닥베틀기(족답기)’ 한두 대씩을 가지고 인견사(人絹絲)를 원료로 한복 속옷감 따위로 쓰이는 인견직을 잤던 것이 ‘풍기인견직’의 시초다. 일제강점기를 거쳐 해방을 맞으면서 ‘풍기인견’은 서울·부산·대구 등지의 대도시를 비롯해 전국으로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1940년도에 100대 정도에 불과했던 쪽닥베틀기가 해방 이듬해인 1946년에는 1,500대로 무려 15배가 늘었다. 풍기인견의 인기를 실감할 수 있는 대목이다. 6·25를 거치면서 대도시의 공장들은 쑥대밭이 되었지만, 큰 피해를 입지 않았던 풍기의 인견직은 다시 한 번 날개를 달았다. 급증한 인견직의 수요를 충당하느라 집집마다 인견직을 짜는 베틀소리로 밤을 밝혔다. 요즘은 그 베틀기를 이은 100여 개의 섬유공장에서 인견직·나일론·폴리에스터 생산은 물론 수출까지 하고 있다.
본디 풍기에는 황씨 성을 가진 이들이 많아 황씨를 바람과 돌과 함께 ‘풍기 삼다(三多)’로 꼽았다. 하지만 인견직공장에서 일하는 여성들이 천 명을 넘어서면서 황씨 대신 여자를 삼다에 넣었다. 백두대간 산자락의 자그마한 마을과 섬유공장은 어울리지 않는다. 대부분 방직공업은 원료 산지나 시장이 가까운 대도시 근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상식’이다. 하지만 풍기인견은 교과서적인 상식을 대수롭지 않게 웃어넘겼다. 풍기의 풍요는 소백산 울타리에 그 뿌리를 두고, 이곳의 바람과 물과 세월의 흔들림이 버무려낸 것이다. 십승지에 어울리게 이처럼 딱 떨어지는 땅이 또 어디 있으랴 싶다.
풍기역 뒤편 비로봉 가는 길이 금계리다. 한때 정감록마을로 소문이 자자했던 옛날도 잊은 듯 여느 마을과 다를 바 없이 조용하다. 그러나 십승지로 풀이하자면 소백의 기운을 고스란히 받으며 금선계곡을 타고 온 비로봉의 옥수로 몸을 적시는 땅이다. 비로봉 가는 길에 비로사가 있다. 자세한 절집 내력이야 알길 없지만 당간지주며 부도며 주춧돌로 미루어 짐작컨대 소백산 자락에서 가장 오래된 큰절일 듯싶다. 20여 년 전에 금을 입혔다지만 본디는 석불이라는 아미타불좌상을 보려고 절집 여기저기를 두드려보아도 묵묵부답. 텅텅 빈 비로사를 나와 희방사로 길을 잡는다.
빗속에 제철을 만난 듯 와그랑대며 쏟아지는 희방폭포가 반갑다. 희방사도 스님은 출타중이란다. 희방사는 선조 1년(1568)에 만든 <월인석보> 1·2권의 판목을 보관해 왔던 절이다. <월인석보> 1권 머리에 붙은 <훈민정음>의 것까지 모두 200장의 판목이 있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죽령과 소백산에서 싸움이 치열했던 1951년 1월 13일, 유엔군이 ‘작전상의 이유’로 희방사에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질러 한줌의 재가 되고 말았다. 다만 그 <훈민정음> 판목으로 찍어 만든 책 한 벌을 잿더미 속에서 나중에 가까스로 건져냈다.
절집을 에돌아 허청걸음으로 산을 내려가는 길. 정감록으로 풍성한 터를 일구어낸 땅, 풍기가 떠오른다. 약속의 땅, 풍기를 찾아가는 사람들은 저마다 힘겨운 삶을 살아낼 방법 하나쯤은 가슴에 품고 갔다. 평안도 영변사람이 베틀기를 들고 왔다면, 황해도 개성사람은 개성상인의 사업수단을 품고 왔으며, 대구사람들은 사과를 손에 움켜쥐고 찾아갔다. 그랬으니 그 풍기의 지신밟기는 얼마나 옹골찼으랴. 우리, 이제, 무엇을 품고 어디로 가야 하나. 빗속에 우두커니 서니 그렇게 중얼거려진다.
Ⅲ.순흥
고구려 땅에서 일으킨 남대궐의 ‘반역’
순흥에 이르려면, 슬픈 역사의 빗줄기에 젖어들어야 한다. 쓸쓸히 사라져간 한 세월이 아프다. 사라진 옛 도시, 순흥. 풍기는 알아도 순흥은 모른다. 옛날 순흥은 경상 북부의 행정·문화 중심지였던 도호부가 있던 땅이다. 옛 순흥도호부는 관할지역만도 지금의 충북 단양군 영춘, 강원도 영월군 상·하동면과 태백시의 황지·철암·장성, 경북 예천과 울진군의 일부를 포함할 만큼 넓었다. 그러나 이곳에 유배되었던 금성대군의 단종 복위를 위한 거사가 세조 3년(1457)에 발각되면서 순흥 고을은 불바다 피바다가 되었고, 쑥대밭으로 허물어졌다.
지금이야 영주시에 하나로 묶이지만, 예로부터 순흥·풍기·영주는 오랫동안 엇비슷한 크기로 나뉘며 역사를 이어왔다. 본디 세 고을 모두 고구려 땅에 들었다. 그 시기는 고구려가 죽령을 차지했던 470년 무렵의 장수왕 때인 것으로 짐작한다. 그 뒤 신라는 진흥왕 12년(551)에 백제와 함께 죽령 이북 열 고을을 빼앗으면서 고구려를 밀어냈다. 그로부터 40년이 흐른 뒤 고구려 영양왕 1년(590), 온달은 ‘죽령 이북 열 고을을 되찾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겠다’는 출사표로 달려와 온달산성에서 신라와 대치했던 것.
순흥에서 만날 수 있는 고구려의 흔적은 ‘어숙묘’와 ‘읍내리벽화고분’이다. 이 둘 모두 고구려나 백제 고분의 형태인 횡혈식고분이다. 경주를 중심으로 한 신라의 것들은 수혈식고분이며 벽화고분도 발견되지 않는다. 어숙묘는 돌문에 새겨진 글자를 해석한 바에 따르면 신라의 관직에 있던 ‘어숙’의 묘이며, 신라 진평왕 17년(595)에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읍내리고분은 539년쯤에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그 주인들이 고구려사람일까 신라로 귀화한 고구려사람일까 고개를 갸우뚱거리고 있을 뿐이다. 고구려의 땅을 더 넓혀 보면, 순흥 동쪽 봉화·울진까지 확대된다.
고구려의 남쪽 끝머리 영토였던 영주사람들은, 고구려와 신라가 싸울 때 신라에 무릎 꿇지 않기 위해 끝까지 버티었다고 한다. 그런 옛날 때문인지는 몰라도 ‘영주사람들이 앉았던 자리에는 풀도 나지 않는다’는 말을 종종 들을 정도로 영주사람들의 기질이 굳고 끈질기다고 평한다. 그것은 자고 나면 세상이 바뀌는 국경지대의 사람들이 험한 세상 견뎌내는 삶의 방식이었으리.
순흥면사무소 마당 한켠에는 고려 충숙왕 때 다시 지었다는 누각 봉서루가 옛 도호부의 영화를 이야기하듯 서 있다. 공민왕이 썼다는 ‘흥주도호부아문(興州都護府衙門)’이라는 현판이 있다. 흥주는 고려 때의 순흥고을 이름이다. 땅만 넓었다고 옛 순흥도호부를 꼽는 것은 아니다. 이곳은 임금의 태(胎)를 가장 많이 묻었던 땅으로 도호부 중의 도호부로 꼽혔던 도시였다. 고려말까지만 해도 한강 이남은 순흥이요, 한강 이북은 송도(개성)라 해서, 남순북송(南順北宋)이라는 말이 생겼을 정도였다. 사방 십리를 가도 남의 땅을 밟지 않고 다녔다는 아흔아홉 칸 짜리 기와집들이 즐비했고, 집집마다 쌀밥을 짓고 참나무숯불에 자반고등어를 굽던 마을이었다. 자부심 강했던 순흥이었으니 안축의 경기체가 <죽계별곡>도 술술 읊어졌으리. ‘죽령 남쪽, 안동 북쪽, 소백산 앞의/천년 흥망 속에도 풍류가 한결 같은 순흥성 안에/다른 곳 아닌 취화봉에 임금의 태를 묻었네/아, 이 고을을 중흥시킨 모습 그 어떠합니까/ … / 아, 소백산 높고 죽계수 맑은 풍경 그 어떠합니까’.
금성대군이 세조 3년(1457) 순흥으로 유배되면서 순흥부사 이보흠은 뜻을 함께 할 것을 맹세한다. 그들은 순흥도호부 관할 고을에 격문을 띄우고, 절절한 마음을 담은 글을 보내 뜻을 함께 할 선비와 무사를 모았다. 고치령을 넘어 소백산 북녘 자락 남대천에 ‘남대궐’을 짓고 한강의 ‘북대궐’과 대항하겠다는 큰 꿈을 키웠다. ‘첫째, 순흥을 근거지로, 도호부의 군사 700여 명을 움직여 이웃 고을을 점령한다. 둘째, 죽령과 조령을 장악해 한양과의 연락을 두절시켜 영남을 아우르고, 온 나라에 격문을 띄워 동지들을 모은다. 셋째, 남대궐을 짓고 상왕을 모셔 복위에 대비하며, 힘을 길러 한양으로 진격한다.’ 그 즘 단종이 영월 땅에서 읊은 애절한 시 한편이 소백산을 넘어와 순흥고을을 적시곤 했다. ‘달 밝은 밤에 자규새 울면/시름 못잊어 다락에 기대었네/네 울음 슬퍼 내 듣기 괴롭구나/네 소리 없으면 내 시름없을 것을/이 세상 괴로운 이에게 말을 보내 전하노니/춘삼월 자규루에는 부디 오르지 마소.’
하지만 그들의 꿈은 순흥도호부 관노의 밀고로 일순간에 깨어진다. 겹겹의 포위망에 갇힌 순흥은 ‘역적의 고을’로 불탔고 하루아침에 잿더미가 되었다. 금성대군은 서울로 옮겨져 경회루에서 참형을 당했고, 순흥 사람 수백 명이 살육 당한 시체는 산을 이루었다. 지금의 소수서원을 감싸고 흐르는 죽계천에는 수많은 주검들이 수장되었다. 그들의 피는 죽계천을 따라 20여 리나 흘러가서야 멈췄으니 지금도 ‘피끝마을’이 있다.
그 아수라가 지나간 죽계천에서는 밤만 되면 애처로운 넋들의 울음소리가 구슬프게 이어졌다. 쑥대밭이 되고 90년 뒤 소수서원을 세워 냇가 바위에 ‘경(敬)’를 새기고 붉은 색을 칠한 뒤에야 넋들의 울음소리가 멈췄다고 한다. 소수서원이 경 자를 새긴 또 다른 내력이 있다. 소수서원은 본디 통일신라 때 문을 연 숙수사라는 큰 절집이 있던 자리다. 순흥이 불바다가 되면서 숙수사도 불탔으니 석불들만 드문드문 남아있었던 모양이다. 그 자리에 서원을 세우면서 석불이라는 석불은 죄다 소에 던져버렸다. 불교를 억누르고 유교를 받들던 조선이라 절터에 서원이 들어앉는 일은 흔했다. 아무튼 비가 내리는 칠흑의 밤이면 그 소에서 무엇인가가 뛰어올랐다가 다시 떨어지는지 ‘첨벙’대는 소리가 밤새도록 들려왔는데, 경 자를 새겼더니 잠잠해졌다고 한다. 옛날에는 어른 키로 열 길이 넘도록 깊은 소였다지만 요즘은 바닥이 훤히 들여다보일 정도로 얕다.
소수서원은 이곳에서 난 고려 때의 유학자 안향을 기리려고 조선 중종 37년(1542)에 풍기군수 주세붕이 세운 백운동서원을 세우면서 시작되었다. 이 나라 서원의 시초로 치는 백운동서원은 퇴계 이황이 풍기군수를 지내면서 임금이 쓴 ‘소수서원’이라는 편액을 받아 이름이 바뀌었으니 사액서원의 효시로 꼽힌다. 사액서원이 되면 임금이 책이며 논밭이며 노비까지 내려보냈으며, 면세와 면역의 특권까지 받았다. 선조 때에 이르러서는 나라 안에 이런 사액서원이 100개가 넘었다고 한다.
예나 지금이나 특권이 주어지면 열에 아홉은 썩는가보다. 소수서원 뒤쪽 죽계천에 있는 제월교는 청다리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 짜하다. 옛날, 흥청망청인 선비들과 놀아나던 기생들이 아이를 낳게 되면 이 다리 밑에 버리고 달아나곤 해서 청다리로 불렸다. 자식이 없는 집에서는 그렇게 버려진 아이를 주어와 길렀다고 한다. 옛날 어른들이 ‘너는 다리 밑에서 주어왔단다’ 하던 우스갯소리의 그 다리가 순흥에선 바로 이 청다리다. 이 지방에서는 어른들이 아이들을 얼러댈 때 ‘청다리 밑에 갖다 버린다’거나 ‘네 어미는 청다리 밑에서 고운 옷과 맛있는 음식을 해놓고 기다린단다’하는 것으로 청다리를 끌어들인다.
소수서원에서 청다리로 가는 길에 금성단이 있다. 금성대군과 순흥부사 이보흠, 그리고 죽계천에 수장되었다는 수많은 선비들의 넋을 기리는 곳이다. 200여 년이 흐른 뒤인 숙종 45년(1719)에야 단을 세웠다. 울타리 너머에는 압각수(鴨脚樹)라 불리는 아름드리 은행나무 한 그루가 말없이 금성단을 지키고 서 있다. 순흥도호부가 풍비박산 날 때 불타 죽었다가 순흥이 복원되면서 다시 살아나 오늘날까지 1200년을 살고 있다.
순흥에서 고치령으로 가는 옛길은 장고개를 넘어 두렛골서낭을 지나 세거리로 이어진다. 두렛골서낭은 금성대군과 복위운동에 연루되어 참절 당한 이들의 넋을 기린다. 500년이 넘도록 한 해도 빠뜨리지 않고 대를 이어온 두렛골서낭제는 매년 정월 대보름날 새벽 2시에 지낸다. 여느 서낭당과 달리 이곳의 제물은 하늘에 제사를 올릴 때나 임금에게나 쓰는 황송아지다. 제물에 쓸 송아지를 살 때도 흥정을 하거나 값을 깍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다. 특이한 것은 송아지에게 깍듯한 예우는 물론이고 호칭도 ‘어른님·대군님·양반님’ 등으로 부른다. 두렛골서낭제는 복위운동의 실패로 스러져간 모든 넋들에 대한 기림이자, 그들을 제물로 바쳐 다시 영혼을 위무하는 애절한 살풀이춤이다. 고치령(800m) 잿마루에도 낡은 서낭당이 하나 서 있다. 금성대군이 이 재를 넘으며 단종 복위의 뜻을 세웠다 해 건의령이라고도 부른다. 길 오른쪽에 단종과 금성대군을 함께 모시는 산령각(山靈閣)이다. 매년 정월 열나흗날과 시월 초정일에, 고치령 북쪽 즉 백두대간 너머에 있는 경상도 마을인 마락리 사람들이 고치재 산령각에서 제사를 올린다.
무시로 불어대는 바람이 재를 넘는다. 때로는 충청도에서 경상도로, 때로는 경상도에서 충청도로. 바람이 재를 넘을 때마다 성황당 주변에 피어난 붓꽃이 ‘후르르 후르르’ 대궁을 떨어댄다. 정녕 산아래 마을에 떠도는 전설처럼 단종은 이 산줄기 동쪽 태백산의 산신령이, 금성대군은 소백산의 산신령이 되었을까. 금줄을 치고 적막 속에 묻힌 성황당 마당에 주질러 앉아 허공을 떠도는 그 전설 잡아채고 싶다. 그 슬픔, 그 희망으로 버무려진 그 모진 세월 모두 엮어 고치령에 대궐을 짓고 ‘내 나라’ 세우고 싶다.
Ⅳ.연꽃마을
떠나면서도 머무를 수 있는 깨달음?
고치령 오르는 길 중간쯤인 세거리에서 연화폭포 쪽으로 길을 튼다. 계속되는 오르막으로 들어갈수록 산자락이 연이어 포개지며 내 들어온 흔적을 가린다. 3킬로미터쯤 들어갔을까, 온통 주먹만한 사과가 주렁주렁 달린 사과밭이다. 그 사이로 드문드문 집이 보인다. 밖에서 안이 보이지 않았듯, 안에서도 넘실대는 먼 산줄기만 보일 뿐이다. 연꽃마을 풍경이다. 1킬로미터쯤만 오르면 이내 능선에 설 수 있을 만큼 백두대간이 지척이다.
비로봉과 연화봉 아래 풍기가 큰 연꽃봉우리라면, 좌석리 연화동은 연화폭포 아래의 작은 연꽃봉우리다. 40여 년 전만 해도 이 작은 연꽃마을에 서른 여섯 집이 살았다. 그 중 <정감록> 비결파가 열 집이었고, 여섯 집은 평안도에서 온 이들이었다. 6·25 때는 국군이며 인민군이 고치령을 넘었다지만 이곳은 강아지 하나 다치지 않았다. 지금은 다 떠나고 여덟 집만 남았다. 비결파는 경기도 용인에서 와 8대째를 산다는 정승연(67세) 뿐이다. 그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는 <정감록>에 나오는 ‘인종구어양백(人種求於兩百)'의 ‘양백'을 소백산과 태백산의 사이 고치령이라 해석하고 연화동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연화동에서 ‘굶주림을 면하고 전쟁을 피했'으며, 일생을 ‘다정하게 이야기하며 즐겁게 지냈다'. 또 ‘가난한 사람은 살고 부자는 죽을 것이다'라는 <정감록>의 이야기도 이곳에서 겪었다.
“9대에 걸쳐 천석꾼을 이룬 최씨 집안이 있었는데, 여 연화부수라는 명당자리에 조상의 묘를 쓰고 번듯한 석물들을 잔뜩 썼네. 그런데 얼마 가지 못해 김씨네 집안에 빚을 지는 처지까지 되었지만 한해가 가고 두 해가 가도 갚을 수가 없었지. 김씨네가 돈 대신 묫자리를 달라고 하니 내줄밖에. 그 명당은 ‘물 위에 연꽃이 떠 있는 자리’인데, 그렇게 무거운 석물들을 올려놨으니 가라앉는 것은 당연지사지.”
청정함과 극락세계와 다산을 상징한다는 연꽃. 겹겹으로 두른 산자락 헤쳐내며 연꽃마을을 나올 때 문득 다리를 거는 물음 하나. 속세에 있으되 속세에 물들지 않으며, 흙탕물 속에 있으되 깨끗한 꽃 한 송이 피울 수 있을까. 혹은, 연화동을 떠나되 연꽃마을에 머물며, 소백산을 내려갔으되 소백 줄기에 머무를 수 있을까.
[출처] 밭이 된 순흥도호부를 아시나요 (소백산-영주)|작성자 곰바우
日本列島 동해안 부근 태평양 해저에 대지진이 발생한 여파로 거대한 해일이 일본 해안지역을 덮쳐 그 피해가 막심하다고 합니다.
일본열도는 지구 지형상으로 대한반도의 방파제 역할을 하기 때문에 피해복구에 우리도 전심 전력을 다해 동참해야겠습니다.
대한반도 영주 봉화 지역은 동해쭉으로는 백두대간 태백산맥, 서해쪽으로는 소백산맥이 분지형을 이뤄 태풍과 오염된 공기유입을 막아주기 때문에 초강력 지진 및 수백미터 해일이 밀려온다고 하더라도 안심 할 수 있고 지하 수백미터에 걸쳐 강한 암반층이 가마솥 형상을 이뤄 대한반도 최대 양질의 청정 지하수를 담고있어 지구촌의 천혜받은 축복의 땅이랍니다. 그리고 연간 청정일수와 양질의 일조량이 동남아시아 중 최고이기 때문에 일본업체들이 태양열 발전에 진출하려고 하는 지역이기도 합니다.
정감록 십승지 으뜸 지역이자 조선조 한반도 최고 예언자 남사고 선생이 말을 타고 봉화에서 한양으로 가는 길에 안정 들판(비상활주로지역)을 지나가던중 소백산을 보고 ' 저 게 바로 사람을 살리는 산이다" 라며 말에서 내려 산을 향해 넙죽 절을 했다는 일화가 유명합니다.
영주의 화강석과 봉화의 춘양목(금강송), 내성천의 모래는 일본이 최고로 인정해주는 건축재료입니다.
백두대간 소백산맥 영주 도솔봉 일대에 국내최초 국립테라피 단지와 태백산맥 봉화 문수산 일대에 국립수목원이 들어서면 국내최고 청정지역인 영주와 봉화는 옛날의 명성을 되찾을 날이 올것입니다. 영주댐이 건설되면 우주국 지구촌 수도로 최 적합지역이 될 것입니다.
<순흥 도호부>
밭이 된 순흥도호부를 아시나요 (소백산-영주)
Ⅰ.죽령
‘대나무도 넘기 힘든 고개'
죽령(689m)을 넘는다. 비가 뿌린다. 자욱한 안개까지 몰고 온 빗줄기가 우루루 잿마루를 넘는다. ‘선비의 고장, 영주’ 땅을 알리는 표석이 빗속에 희미하다. 그래서인가, 잿마루 죽령주막의 흘러간 노랫소리도 쓸쓸하다. 옛 책 <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죽령 잿마루에는 영남의 관문이었던 성이 있었다지만 그 흔적조차 찾을 길 없다. 다만 죽령에 얽힌 온갖 풍문들만 재넘이 바람에 실려 고개를 넘나든다.
신라 효소왕 때의 화랑 득오가 지은 향가 <모죽지랑가>의 죽지랑도 죽령과의 인연에서 비롯된다. 진덕여왕 때 사람 술종이 삭주(지금의 춘천) 도독사로 가면서 죽령을 넘을 때 만났다는 한 거사와의 인연으로 태어났다 해서 아들의 이름을 죽지로 지었다는 것. 이 이야기는 <삼국유사>에 나오기도 하거니와 이 책에는 죽령이 ‘죽지령(竹旨嶺)'으로 기록되어 있다. 아무려나 죽령이 ‘죽지령'이거나 지난 호에서 말한 ‘죽죽이'에서 왔거나 모두 ‘죽'이 뿌리다. 그 죽 뿌리를 찾다보면 죽령이 ‘큰 고개'라는 뜻에서 비롯되었다는 풀이에 이른다. 그 해석은 죽령 고개에 무릎 장단을 치고 추임새까지 넣어놓는다. 큰 고개가 한자에서 뜻 빌림을 하면서 ‘대재'가 되는데, 여기서의 ‘대'가 다시 ‘대나무=죽(竹)’으로 이어졌다는 것. 우리말과 한자가 뒤죽박죽 뒤섞이면서 죽령으로 만들어냈다는 것. 그런데, 죽령(더 남쪽으로 잡으면 안동)은 우리나라 대나무의 북방한계선에 걸린다. 대나무 선을 그어보면, 강원도 양양에서부터 동해안을 따라 내려오다가(백두대간을 넘어 서쪽으로 가지 못하고) 울진 죽변에서 내륙으로 들어와 마침내 백두대간에 걸리면서 죽령~새재~추풍령으로 이어진다. 그러니 죽령은 우연 같은 필연으로 ‘대나무도 넘기 힘든 고개’가 된다.
대나무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아주 힘겹게 죽령을 넘어간 종이 하나 있다. 오대산 상원사 동종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신라 성덕왕 24년(725)에 만들어졌다는 이 종의 본디 자리는 안동 땅이었다. 경주의 성덕대왕신종(에밀레종)과 함께 범종의 대표로 꼽히는 것이다. 상원사가 세조를 기리는 절집이 되면서 나라 안의 이름난 종을 찾다가 안동 남문루에 걸려 있는 이 종을 점찍었다. 100여 필의 말이 끄는 수레에 싣고 가는데, 죽령 잿마루에 이르러 꼼짝도 하지 않았다. 고민 끝에 36개의 종 젖꼭지 중 하나를 떼어 안동으로 보내고 나서야 재를 넘었다는 이야기다.
옛날 죽령은 시끌벅적한 고갯길이었다. 삼국의 싸움터를 지나, 새 나라 고려의 이념이 경상북부의 큰 도시 안동과 순흥으로 이어지는 길목이었다. 과거 길의 선비들이나 장사치들이 부지런히 재를 넘었다. 죽령주막 앞 골짜기를 따라 희방사역까지 2.5킬로미터의 그 옛길이 이어진다. 이 길에는 술집은 물론이거니와 떡집이며 마방이며 객점이며 짚신장수까지 있어 그야말로 어느 저잣거리에 못지 않게 시끌벅적했다. 술집은 희방사역 자리의 마을 어귀에 있던 무쇠다리 주막거리가 가장 컸고, 죽령의 고갯마루 주막거리가 두 번째, 그 사이에도 느티정과 주점 주막거리가 있었을 정도였다니 그 흥청거림을 짐작하고도 남겠다.
그 고갯마루 주막을 물려받은 죽령주막 마루에 앉아 택배기 한 잔 마시며, 흘린 술에 젖은 거친 턱을 쓸며 희미한 잿마루를 바라보고 싶다. 산줄기 달리다 편 텐트 속에서, 새벽이 어슴어슴 깨어날 즘 잠 덜 깬 귀로 저 옛길 올라오는 보부상들의 수런스런 목소리를, 혹은 그 어떤 그리움 깊어서인지 야반도주로 지친 남정네의 한 깊은 속내를 들어보고 싶다.
Ⅱ.풍기
저마다 먹고살 건 움켜쥐고 찾아왔다
소백산 남녘 자락에 안긴 풍기(豊基)는 그 이름처럼 풍요로운 터다. 웬만한 장마에도 홍수가 들지 않고, 백두대간이 북녘을 가린 덕에 때때로 녈비(지나가는 비)가 내려 가뭄이 들지 않는다. 거기에다 진흙보다는 모래가 더 많이 섞인 모래진흙땅이어서 농사가 잘 된다. 죽령 고개를 사이에 두고 북쪽 단양이 석회암지대이지만, 그 남쪽 풍기 땅은 화강암의 풍화작용으로 이루어진 사양토다.
풍기가 풍요로운 땅이 되는 데에는 뭐니뭐니 해도 인삼이 으뜸이다. 풍기인삼은 예로부터 그 이름 값을 톡톡히 했다. 풍기인삼을 담았던 종이에서는 몇 달이 지나도 인삼 내가 풍긴다고 했고, 두세 번 달여먹어도 좋을 만큼 약효가 높았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때는 개성삼은 열여섯 냥, 금산삼은 열 냥, 풍기삼은 여덟 냥을 한 근으로 쳐서 값을 매겼다고 한다. 1970년 인삼 포장 규격이 통일되기 전까지만 해도 풍기인삼의 300그램을 다른 지방의 인삼 375그램과 같게 쳤을 정도였다. 모양에서도 서로 달랐다. 모두 고려인삼이라는 이름을 달았지만 말린 인삼을 구부린 정도로 보아 산지를 구별했다. 강화·김포·개성 인삼은 곧은 그대로인 ‘직삼’이며, 금산인삼은 완전히 구부린 ‘곡삼’이고, 풍기인삼은 그 중간쯤으로 꼭 절반을 구부리는 ‘반곡삼’이다. 이 구부림은 약효보다는 그 지방의 습성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반곡삼인 풍기인삼의 뿌리는 소백산의 산삼에 닿아있다. 예로부터 소백산 산삼은 이름난 진상품이었다. <삼국사기>에 신라 성덕왕 33년(734) 당나라에 산삼 200근을 선물했다는 기록이 있고, 조선 왕가에서도 즐겨 썼다고 한다. 그러니 나라에서는 산삼을 바치라고 성화였을 테고, 풍기사람들은 얼마나 들볶였을까. 그래서 소백산 산삼 씨앗을 받아서 기르게 된 것이 풍기인삼의 시초라는 것. 또 하나는 조선 중종 때 주세붕이 풍기 군수로 있으면서 산삼 씨앗을 구해 풍기읍 금계리에 뿌리면서 시작되었다고 전한다.
인삼은 ‘반음-반양’ 즉 그늘과 햇볕이 적당히 드는 곳에서 잘 자란다. 또 바람이 잘 통하면서도 물이 잘 빠져야 한다. 땅이 너무 기름져서도 안 되고, 밤낮의 기온 차도 커야 좋다. 이런 조건은 사과 농사에도 좋다. 겨울이면 눈이 많이 내리고, 봄이면 녈비가 내려 가뭄 걱정이 없다. 이 모든 조건을 충족시키는 울타리는 역시 소백산이 어깨 겯고 있는 백두대간이다. 흔히 죽령을 넘어온 풍기 바람이 세차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것은 북서계절풍이 부는 겨울이고, 대부분의 삼밭이나 사과밭은 소백산에 등을 기대고 동남쪽을 바라보고 앉았으니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한다.
풍기를 흔히 바람과 돌과 여자가 많다고 해서 뭍의 제주도라 불렀다. ‘풍기 삼다’ 중 바람과 돌에서는 고개를 끄덕이던 이들도 여자에서는 고개를 갸우뚱한다. 이 ‘여자’는 십승지지에 그 뿌리를 둔 곁가지에서 비롯되었다.
본디 승지는 경치 좋은 곳이나 지형이 뛰어난 곳을 일컫는다. 하지만 승지는 풍수의 시각으로 보아 굶주림을 면하고 전쟁이나 천재지변을 피할 수 있는 피난처를 뜻한다. 신라 말의 도선을 비롯해 고려 말의 무학, 조선 중엽의 남사고·이지함들이 이른바 최고 풍수 도인으로 꼽힌다. 예로부터 열 곳의 승지, 즉 십승지를 꼽았다. 십승지로 꼽히는 곳은 조금씩 다른데, 남사고의 십승지가 가장 널리 알려졌다. 지난 호에 말한, 소백산에게 ‘사람을 살리는 산’이라며 절을 했다던 그 사람이다. 그가 첫번째로 가리킨 곳이 바로 풍기인삼의 텃밭이자, 훗날 정감록마을이 된 금계동이다.
조선시대의 비결서 <정감록>의 십승지는 남사고의 것과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으뜸으로 꼽는 곳이 풍기 금계동인 것은 같다. 하여 금계동을 중심으로 한 소백산 남쪽 자락 곳곳에 <정감록>을 받드는 이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이 풍기를 찾은 때는 구한말이나 일제강점기 때처럼 고단한 시절이었는데, 그 중에서도 6·25 때 피난 와서 눌러앉은 이들이 대부분이다. 풍기는 거란이나 몽고의 침입이나 임진왜란 때도 큰 피해가 없었고, 6·25 때도 스쳐가는 정도였다니 십승지의 ‘영험’ 덕을 톡톡히 봤다.
팔도에서 온 이들로 넘쳐나던 그 시절 풍기사람 열에 여덟은 타지에서 온 이들이었다. 특히 함경도·평안도·황해도 등 북한에서 내려온 이들이 많아 풍기는 ‘이북5도’라 불리기도 했다. 그 중에서도 명주의 본고장이었던 평안도 영변과 덕천에서 온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이 1930년대부터 ‘쪽닥베틀기(족답기)’ 한두 대씩을 가지고 인견사(人絹絲)를 원료로 한복 속옷감 따위로 쓰이는 인견직을 잤던 것이 ‘풍기인견직’의 시초다. 일제강점기를 거쳐 해방을 맞으면서 ‘풍기인견’은 서울·부산·대구 등지의 대도시를 비롯해 전국으로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1940년도에 100대 정도에 불과했던 쪽닥베틀기가 해방 이듬해인 1946년에는 1,500대로 무려 15배가 늘었다. 풍기인견의 인기를 실감할 수 있는 대목이다. 6·25를 거치면서 대도시의 공장들은 쑥대밭이 되었지만, 큰 피해를 입지 않았던 풍기의 인견직은 다시 한 번 날개를 달았다. 급증한 인견직의 수요를 충당하느라 집집마다 인견직을 짜는 베틀소리로 밤을 밝혔다. 요즘은 그 베틀기를 이은 100여 개의 섬유공장에서 인견직·나일론·폴리에스터 생산은 물론 수출까지 하고 있다.
본디 풍기에는 황씨 성을 가진 이들이 많아 황씨를 바람과 돌과 함께 ‘풍기 삼다(三多)’로 꼽았다. 하지만 인견직공장에서 일하는 여성들이 천 명을 넘어서면서 황씨 대신 여자를 삼다에 넣었다. 백두대간 산자락의 자그마한 마을과 섬유공장은 어울리지 않는다. 대부분 방직공업은 원료 산지나 시장이 가까운 대도시 근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상식’이다. 하지만 풍기인견은 교과서적인 상식을 대수롭지 않게 웃어넘겼다. 풍기의 풍요는 소백산 울타리에 그 뿌리를 두고, 이곳의 바람과 물과 세월의 흔들림이 버무려낸 것이다. 십승지에 어울리게 이처럼 딱 떨어지는 땅이 또 어디 있으랴 싶다.
풍기역 뒤편 비로봉 가는 길이 금계리다. 한때 정감록마을로 소문이 자자했던 옛날도 잊은 듯 여느 마을과 다를 바 없이 조용하다. 그러나 십승지로 풀이하자면 소백의 기운을 고스란히 받으며 금선계곡을 타고 온 비로봉의 옥수로 몸을 적시는 땅이다. 비로봉 가는 길에 비로사가 있다. 자세한 절집 내력이야 알길 없지만 당간지주며 부도며 주춧돌로 미루어 짐작컨대 소백산 자락에서 가장 오래된 큰절일 듯싶다. 20여 년 전에 금을 입혔다지만 본디는 석불이라는 아미타불좌상을 보려고 절집 여기저기를 두드려보아도 묵묵부답. 텅텅 빈 비로사를 나와 희방사로 길을 잡는다.
빗속에 제철을 만난 듯 와그랑대며 쏟아지는 희방폭포가 반갑다. 희방사도 스님은 출타중이란다. 희방사는 선조 1년(1568)에 만든 <월인석보> 1·2권의 판목을 보관해 왔던 절이다. <월인석보> 1권 머리에 붙은 <훈민정음>의 것까지 모두 200장의 판목이 있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죽령과 소백산에서 싸움이 치열했던 1951년 1월 13일, 유엔군이 ‘작전상의 이유’로 희방사에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질러 한줌의 재가 되고 말았다. 다만 그 <훈민정음> 판목으로 찍어 만든 책 한 벌을 잿더미 속에서 나중에 가까스로 건져냈다.
절집을 에돌아 허청걸음으로 산을 내려가는 길. 정감록으로 풍성한 터를 일구어낸 땅, 풍기가 떠오른다. 약속의 땅, 풍기를 찾아가는 사람들은 저마다 힘겨운 삶을 살아낼 방법 하나쯤은 가슴에 품고 갔다. 평안도 영변사람이 베틀기를 들고 왔다면, 황해도 개성사람은 개성상인의 사업수단을 품고 왔으며, 대구사람들은 사과를 손에 움켜쥐고 찾아갔다. 그랬으니 그 풍기의 지신밟기는 얼마나 옹골찼으랴. 우리, 이제, 무엇을 품고 어디로 가야 하나. 빗속에 우두커니 서니 그렇게 중얼거려진다.
Ⅲ.순흥
고구려 땅에서 일으킨 남대궐의 ‘반역’
순흥에 이르려면, 슬픈 역사의 빗줄기에 젖어들어야 한다. 쓸쓸히 사라져간 한 세월이 아프다. 사라진 옛 도시, 순흥. 풍기는 알아도 순흥은 모른다. 옛날 순흥은 경상 북부의 행정·문화 중심지였던 도호부가 있던 땅이다. 옛 순흥도호부는 관할지역만도 지금의 충북 단양군 영춘, 강원도 영월군 상·하동면과 태백시의 황지·철암·장성, 경북 예천과 울진군의 일부를 포함할 만큼 넓었다. 그러나 이곳에 유배되었던 금성대군의 단종 복위를 위한 거사가 세조 3년(1457)에 발각되면서 순흥 고을은 불바다 피바다가 되었고, 쑥대밭으로 허물어졌다.
지금이야 영주시에 하나로 묶이지만, 예로부터 순흥·풍기·영주는 오랫동안 엇비슷한 크기로 나뉘며 역사를 이어왔다. 본디 세 고을 모두 고구려 땅에 들었다. 그 시기는 고구려가 죽령을 차지했던 470년 무렵의 장수왕 때인 것으로 짐작한다. 그 뒤 신라는 진흥왕 12년(551)에 백제와 함께 죽령 이북 열 고을을 빼앗으면서 고구려를 밀어냈다. 그로부터 40년이 흐른 뒤 고구려 영양왕 1년(590), 온달은 ‘죽령 이북 열 고을을 되찾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겠다’는 출사표로 달려와 온달산성에서 신라와 대치했던 것.
순흥에서 만날 수 있는 고구려의 흔적은 ‘어숙묘’와 ‘읍내리벽화고분’이다. 이 둘 모두 고구려나 백제 고분의 형태인 횡혈식고분이다. 경주를 중심으로 한 신라의 것들은 수혈식고분이며 벽화고분도 발견되지 않는다. 어숙묘는 돌문에 새겨진 글자를 해석한 바에 따르면 신라의 관직에 있던 ‘어숙’의 묘이며, 신라 진평왕 17년(595)에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읍내리고분은 539년쯤에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그 주인들이 고구려사람일까 신라로 귀화한 고구려사람일까 고개를 갸우뚱거리고 있을 뿐이다. 고구려의 땅을 더 넓혀 보면, 순흥 동쪽 봉화·울진까지 확대된다.
고구려의 남쪽 끝머리 영토였던 영주사람들은, 고구려와 신라가 싸울 때 신라에 무릎 꿇지 않기 위해 끝까지 버티었다고 한다. 그런 옛날 때문인지는 몰라도 ‘영주사람들이 앉았던 자리에는 풀도 나지 않는다’는 말을 종종 들을 정도로 영주사람들의 기질이 굳고 끈질기다고 평한다. 그것은 자고 나면 세상이 바뀌는 국경지대의 사람들이 험한 세상 견뎌내는 삶의 방식이었으리.
순흥면사무소 마당 한켠에는 고려 충숙왕 때 다시 지었다는 누각 봉서루가 옛 도호부의 영화를 이야기하듯 서 있다. 공민왕이 썼다는 ‘흥주도호부아문(興州都護府衙門)’이라는 현판이 있다. 흥주는 고려 때의 순흥고을 이름이다. 땅만 넓었다고 옛 순흥도호부를 꼽는 것은 아니다. 이곳은 임금의 태(胎)를 가장 많이 묻었던 땅으로 도호부 중의 도호부로 꼽혔던 도시였다. 고려말까지만 해도 한강 이남은 순흥이요, 한강 이북은 송도(개성)라 해서, 남순북송(南順北宋)이라는 말이 생겼을 정도였다. 사방 십리를 가도 남의 땅을 밟지 않고 다녔다는 아흔아홉 칸 짜리 기와집들이 즐비했고, 집집마다 쌀밥을 짓고 참나무숯불에 자반고등어를 굽던 마을이었다. 자부심 강했던 순흥이었으니 안축의 경기체가 <죽계별곡>도 술술 읊어졌으리. ‘죽령 남쪽, 안동 북쪽, 소백산 앞의/천년 흥망 속에도 풍류가 한결 같은 순흥성 안에/다른 곳 아닌 취화봉에 임금의 태를 묻었네/아, 이 고을을 중흥시킨 모습 그 어떠합니까/ … / 아, 소백산 높고 죽계수 맑은 풍경 그 어떠합니까’.
금성대군이 세조 3년(1457) 순흥으로 유배되면서 순흥부사 이보흠은 뜻을 함께 할 것을 맹세한다. 그들은 순흥도호부 관할 고을에 격문을 띄우고, 절절한 마음을 담은 글을 보내 뜻을 함께 할 선비와 무사를 모았다. 고치령을 넘어 소백산 북녘 자락 남대천에 ‘남대궐’을 짓고 한강의 ‘북대궐’과 대항하겠다는 큰 꿈을 키웠다. ‘첫째, 순흥을 근거지로, 도호부의 군사 700여 명을 움직여 이웃 고을을 점령한다. 둘째, 죽령과 조령을 장악해 한양과의 연락을 두절시켜 영남을 아우르고, 온 나라에 격문을 띄워 동지들을 모은다. 셋째, 남대궐을 짓고 상왕을 모셔 복위에 대비하며, 힘을 길러 한양으로 진격한다.’ 그 즘 단종이 영월 땅에서 읊은 애절한 시 한편이 소백산을 넘어와 순흥고을을 적시곤 했다. ‘달 밝은 밤에 자규새 울면/시름 못잊어 다락에 기대었네/네 울음 슬퍼 내 듣기 괴롭구나/네 소리 없으면 내 시름없을 것을/이 세상 괴로운 이에게 말을 보내 전하노니/춘삼월 자규루에는 부디 오르지 마소.’
하지만 그들의 꿈은 순흥도호부 관노의 밀고로 일순간에 깨어진다. 겹겹의 포위망에 갇힌 순흥은 ‘역적의 고을’로 불탔고 하루아침에 잿더미가 되었다. 금성대군은 서울로 옮겨져 경회루에서 참형을 당했고, 순흥 사람 수백 명이 살육 당한 시체는 산을 이루었다. 지금의 소수서원을 감싸고 흐르는 죽계천에는 수많은 주검들이 수장되었다. 그들의 피는 죽계천을 따라 20여 리나 흘러가서야 멈췄으니 지금도 ‘피끝마을’이 있다.
그 아수라가 지나간 죽계천에서는 밤만 되면 애처로운 넋들의 울음소리가 구슬프게 이어졌다. 쑥대밭이 되고 90년 뒤 소수서원을 세워 냇가 바위에 ‘경(敬)’를 새기고 붉은 색을 칠한 뒤에야 넋들의 울음소리가 멈췄다고 한다. 소수서원이 경 자를 새긴 또 다른 내력이 있다. 소수서원은 본디 통일신라 때 문을 연 숙수사라는 큰 절집이 있던 자리다. 순흥이 불바다가 되면서 숙수사도 불탔으니 석불들만 드문드문 남아있었던 모양이다. 그 자리에 서원을 세우면서 석불이라는 석불은 죄다 소에 던져버렸다. 불교를 억누르고 유교를 받들던 조선이라 절터에 서원이 들어앉는 일은 흔했다. 아무튼 비가 내리는 칠흑의 밤이면 그 소에서 무엇인가가 뛰어올랐다가 다시 떨어지는지 ‘첨벙’대는 소리가 밤새도록 들려왔는데, 경 자를 새겼더니 잠잠해졌다고 한다. 옛날에는 어른 키로 열 길이 넘도록 깊은 소였다지만 요즘은 바닥이 훤히 들여다보일 정도로 얕다.
소수서원은 이곳에서 난 고려 때의 유학자 안향을 기리려고 조선 중종 37년(1542)에 풍기군수 주세붕이 세운 백운동서원을 세우면서 시작되었다. 이 나라 서원의 시초로 치는 백운동서원은 퇴계 이황이 풍기군수를 지내면서 임금이 쓴 ‘소수서원’이라는 편액을 받아 이름이 바뀌었으니 사액서원의 효시로 꼽힌다. 사액서원이 되면 임금이 책이며 논밭이며 노비까지 내려보냈으며, 면세와 면역의 특권까지 받았다. 선조 때에 이르러서는 나라 안에 이런 사액서원이 100개가 넘었다고 한다.
예나 지금이나 특권이 주어지면 열에 아홉은 썩는가보다. 소수서원 뒤쪽 죽계천에 있는 제월교는 청다리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 짜하다. 옛날, 흥청망청인 선비들과 놀아나던 기생들이 아이를 낳게 되면 이 다리 밑에 버리고 달아나곤 해서 청다리로 불렸다. 자식이 없는 집에서는 그렇게 버려진 아이를 주어와 길렀다고 한다. 옛날 어른들이 ‘너는 다리 밑에서 주어왔단다’ 하던 우스갯소리의 그 다리가 순흥에선 바로 이 청다리다. 이 지방에서는 어른들이 아이들을 얼러댈 때 ‘청다리 밑에 갖다 버린다’거나 ‘네 어미는 청다리 밑에서 고운 옷과 맛있는 음식을 해놓고 기다린단다’하는 것으로 청다리를 끌어들인다.
소수서원에서 청다리로 가는 길에 금성단이 있다. 금성대군과 순흥부사 이보흠, 그리고 죽계천에 수장되었다는 수많은 선비들의 넋을 기리는 곳이다. 200여 년이 흐른 뒤인 숙종 45년(1719)에야 단을 세웠다. 울타리 너머에는 압각수(鴨脚樹)라 불리는 아름드리 은행나무 한 그루가 말없이 금성단을 지키고 서 있다. 순흥도호부가 풍비박산 날 때 불타 죽었다가 순흥이 복원되면서 다시 살아나 오늘날까지 1200년을 살고 있다.
순흥에서 고치령으로 가는 옛길은 장고개를 넘어 두렛골서낭을 지나 세거리로 이어진다. 두렛골서낭은 금성대군과 복위운동에 연루되어 참절 당한 이들의 넋을 기린다. 500년이 넘도록 한 해도 빠뜨리지 않고 대를 이어온 두렛골서낭제는 매년 정월 대보름날 새벽 2시에 지낸다. 여느 서낭당과 달리 이곳의 제물은 하늘에 제사를 올릴 때나 임금에게나 쓰는 황송아지다. 제물에 쓸 송아지를 살 때도 흥정을 하거나 값을 깍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다. 특이한 것은 송아지에게 깍듯한 예우는 물론이고 호칭도 ‘어른님·대군님·양반님’ 등으로 부른다. 두렛골서낭제는 복위운동의 실패로 스러져간 모든 넋들에 대한 기림이자, 그들을 제물로 바쳐 다시 영혼을 위무하는 애절한 살풀이춤이다. 고치령(800m) 잿마루에도 낡은 서낭당이 하나 서 있다. 금성대군이 이 재를 넘으며 단종 복위의 뜻을 세웠다 해 건의령이라고도 부른다. 길 오른쪽에 단종과 금성대군을 함께 모시는 산령각(山靈閣)이다. 매년 정월 열나흗날과 시월 초정일에, 고치령 북쪽 즉 백두대간 너머에 있는 경상도 마을인 마락리 사람들이 고치재 산령각에서 제사를 올린다.
무시로 불어대는 바람이 재를 넘는다. 때로는 충청도에서 경상도로, 때로는 경상도에서 충청도로. 바람이 재를 넘을 때마다 성황당 주변에 피어난 붓꽃이 ‘후르르 후르르’ 대궁을 떨어댄다. 정녕 산아래 마을에 떠도는 전설처럼 단종은 이 산줄기 동쪽 태백산의 산신령이, 금성대군은 소백산의 산신령이 되었을까. 금줄을 치고 적막 속에 묻힌 성황당 마당에 주질러 앉아 허공을 떠도는 그 전설 잡아채고 싶다. 그 슬픔, 그 희망으로 버무려진 그 모진 세월 모두 엮어 고치령에 대궐을 짓고 ‘내 나라’ 세우고 싶다.
Ⅳ.연꽃마을
떠나면서도 머무를 수 있는 깨달음?
고치령 오르는 길 중간쯤인 세거리에서 연화폭포 쪽으로 길을 튼다. 계속되는 오르막으로 들어갈수록 산자락이 연이어 포개지며 내 들어온 흔적을 가린다. 3킬로미터쯤 들어갔을까, 온통 주먹만한 사과가 주렁주렁 달린 사과밭이다. 그 사이로 드문드문 집이 보인다. 밖에서 안이 보이지 않았듯, 안에서도 넘실대는 먼 산줄기만 보일 뿐이다. 연꽃마을 풍경이다. 1킬로미터쯤만 오르면 이내 능선에 설 수 있을 만큼 백두대간이 지척이다.
비로봉과 연화봉 아래 풍기가 큰 연꽃봉우리라면, 좌석리 연화동은 연화폭포 아래의 작은 연꽃봉우리다. 40여 년 전만 해도 이 작은 연꽃마을에 서른 여섯 집이 살았다. 그 중 <정감록> 비결파가 열 집이었고, 여섯 집은 평안도에서 온 이들이었다. 6·25 때는 국군이며 인민군이 고치령을 넘었다지만 이곳은 강아지 하나 다치지 않았다. 지금은 다 떠나고 여덟 집만 남았다. 비결파는 경기도 용인에서 와 8대째를 산다는 정승연(67세) 뿐이다. 그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는 <정감록>에 나오는 ‘인종구어양백(人種求於兩百)'의 ‘양백'을 소백산과 태백산의 사이 고치령이라 해석하고 연화동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연화동에서 ‘굶주림을 면하고 전쟁을 피했'으며, 일생을 ‘다정하게 이야기하며 즐겁게 지냈다'. 또 ‘가난한 사람은 살고 부자는 죽을 것이다'라는 <정감록>의 이야기도 이곳에서 겪었다.
“9대에 걸쳐 천석꾼을 이룬 최씨 집안이 있었는데, 여 연화부수라는 명당자리에 조상의 묘를 쓰고 번듯한 석물들을 잔뜩 썼네. 그런데 얼마 가지 못해 김씨네 집안에 빚을 지는 처지까지 되었지만 한해가 가고 두 해가 가도 갚을 수가 없었지. 김씨네가 돈 대신 묫자리를 달라고 하니 내줄밖에. 그 명당은 ‘물 위에 연꽃이 떠 있는 자리’인데, 그렇게 무거운 석물들을 올려놨으니 가라앉는 것은 당연지사지.”
청정함과 극락세계와 다산을 상징한다는 연꽃. 겹겹으로 두른 산자락 헤쳐내며 연꽃마을을 나올 때 문득 다리를 거는 물음 하나. 속세에 있으되 속세에 물들지 않으며, 흙탕물 속에 있으되 깨끗한 꽃 한 송이 피울 수 있을까. 혹은, 연화동을 떠나되 연꽃마을에 머물며, 소백산을 내려갔으되 소백 줄기에 머무를 수 있을까.
[출처] 밭이 된 순흥도호부를 아시나요 (소백산-영주)|작성자 곰바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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