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혼/현대사 100년

영주의 자랑/항일 투사 이교영 의병장(2)

단산사람 2011. 8. 20. 21:33

영주출신 최초 항일투사 이교영 의병장
순국 100주기 추모제“성황”
[270호] 2010년 03월 04일 (목) 17:37:23 전우성 기자 lkj10001@hanmail.net

   

 

우리 고장 출신으로 의병을 일으켜 일제와 맞서 싸우다 체포돼 자결한 고 이교영 의병장 순국 100주기 추모제가 24일 오전 11시, 그가 태어나 자랐던 영주시 가흥동(아지동)소재 삼수당(三秀堂)에서 열렸다.

 

이교영 의병장 순국기념사업회(회장 송필현)가 주관한 이날 추모제는 광복지사 및 기관 단체장. 유림단체 및 기념사업회 회원, 전의 이씨(全儀 李氏) 문중 후손 등 약 18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경건하게 진행됐다.

 

식전행사로 후손들이 올린 고유제를 마치고 이교영 의병장 공적소개에 이어 식순에 따라 참석자들의 분향이 이어졌다.

 

송필현 기념사업회장은 추념사를 통해 “이교영 의병장은 조국 없는 민족의 슬픔을 헤아리시고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잔악한 일본군과 맞서 싸우신 분”이라며 “그 정신은 우리들이 마땅히 본받아야 할 일이며 그 업적을 재조명하여 숭모사업을 전개해야 한다”고 말했다.

 

광복회 이인술 지부장은 헌사를 통해 “나라를 찾기 위해 목숨을 바친 투철한 애국정신을 거울삼아 부강한 국가를 만드는 데 노력해야 한다”고 했다. 영주시 심인섭 주민생활국장과 김지권 안동보훈지청장은 “이교영 의병장은 거룩한 희생정신으로 조국광복의 기틀을 마련하여 주신 분”이라며 “한 알의 밀알로 썩어 우리들에게 값진 정신적 유산을 물러주신 분”이라고 말했다.

 

유족 대표는 “전의 이씨 집안인 우리 자손들은 조선시대 500년을 아지동에 집성촌을 이루고 청백리를 실천하며 살았으나 의병 거병 이후 유랑민이 되어 아직도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며 “명문 거족도 나라를 잃으면 뿔뿔이 흩어짐을 뼈저리게 느낀다”며 애국심을 강조했다.

 

이교영 의병장은 1873년 지금의 아지동 전의 이씨 유가가문에서 태어나 열심히 수학한 후 27세(1900)때 문과, 31세(1904)때 무과에 각각 급제했으나 32세(1905)때 일본의 침략적 야욕인 을사늑약이 체결되면서 선비로서 울분을 참지 못해 국권을 회복해야겠다는 각오로 의병장이 됐다.

 

또, 300여 명의 의병을 인솔하고 강원도 영월, 충북 영춘, 단양, 경북 영주, 풍기, 순흥, 예천, 상주 등지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여 일본 헌병 소장 이하 많은 사상자를 내게 했고 일제의 앞잡이들을 소탕하면서 군자금을 조달하는 등 맹활약을 하다가 1909년 11월 일제에 체포됐다.

 

이후 공주지방재판소 청주지부에서 사형언도를 받고 1910년 1월 29일 서대문 형무소로 이감되어 상고했으나 기각, 1910년 2월 24일 교수형이 확정되자 그 자리에서 “나는 내 목숨을 더러운 일본인의 손에 맡기지 않겠다”고 말한 뒤 혀를 깨물어 38세의 아까운 나이에 자결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인정해 1995년 8월 15일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우리 고장 출신의 한 선비로서 국권 피탈의 통분을 참지 못하고 결연한 의지로 의병장이 되어 간악한 일본군과 맞서 싸우다 자결한 이교영 의병장이 태어나 자라던 그 삼수당 뜰에서 순국 100주기 추모제를 올려 그분의 발자취와 높은 뜻을 기리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흠모하는 마음으로 묵념을 올리고 유훈을 되새겼다.

 

그 당시 항일투쟁을 위해 선봉에 섰다가 만약 체포되면 자신의 생명은 물론이요 가족과 측근까지 살아남지 못한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과감히 실천하신 그 정신은 곧 선비정신이었고 바로 이런 일들을 실천한 사람만이 민족과 국가를 위한다는 말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일 것이다.

 

100년 전 그 당시 나라는 당파싸움으로 세월을 보내고 족벌세력들 끼리 입을 맞추다가 결국은 나라를 일본에 빼앗겼다. 이교영 의병장을 추모하는 자리에서 오늘의 국내 상황과 그때 그분의 거룩한 애족 실천은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2011.8.20 충청소백향우회에서 담아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