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혼/현대사 100년

[스크랩] 한국전에서 전사한 모택동의 아들 모안영

단산사람 2013. 2. 2. 20:51


모안영은 모택동의 두번째 처인 양개혜와의 사이에서 낳은 3형제 중 맏이다.


그는 1922년 후난 성 창사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모택동은 모안영이 여섯살 되던 해 1927년 추수봉기 이후에 도주하면서 가족과 헤어졌는데 모안영의 어머니 양개혜는 1930년 국민당 군벌이었던, 하건에 의해 공산당 잔당으로 몰려 11월 14일 처형당했다. 전향을 강요당하며 모진 고문을 당하고 처형당한 양개혜는 모택동이 장사사범중학교에 다닐 때 가장 존경했던 스승 양창제의 딸이었다. 결국 양개혜를 전향시키는데 실패한 국민당은 마오안잉에게 그의 어머니 양개혜의 처형 장면을 강제로 지켜보게 한다. 아들 마오안잉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의 어머니 양카이휘는 30세의 젊은 나이로 그렇게 처형당했다. (사진은 모안영과 그의 아내 류숭린)


그해 석방이 된 모안영은 국민당의 추적을 피해 상하이로 도주했다가 그 곳에서 공산당 지하 조직의 보호를 받았다. 그러나 그 비밀 조직이 발각되면서, 그들 형제는 동건오라는 가난한 공산당원에게 맡겨지게 된다. 1931년 거지나 다름없는 생활을 해야 했던 터라, 어린 4살짜리 막내 모안룡은 병사하고, 둘째인 모안청은 거리에서 구타를 당해 정신이상자가 되었다.


1936년 모안영은 파리로 건너가 다시 모스크바로 갔고 그곳 프룬제 군사학교에서 가명으로 공부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소련군에 들어가 전차소대장으로 동부전선에 참전하였다. 이때 그는 포로로 잡혔고, 아들에게 심적인 빚이 있었던 모택동은 권력을 써서 그를 빼냈다. 전쟁이 끝나고 1949년 중국으로 돌아와 1949년 10월 8살 연하인 20살 처 류숭린과 결혼하였다.

1950년 김일성이 한국전쟁을 일으켰다. 초반에 밀물처럼 밀어붙이던 기세는 미군 등 유엔군의 참전으로 전세는 불리하게 돌아갔다. 당시 중국은 내전의 후유증으로 심한 몸살을 앓고있던 터라 김일성의 전쟁을 동의하지 않았다. 그러나 북한이 밀릴 경우 적국과 직접 국경이 닿을 수 있기 때문에 다른 당간부들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모택동은 참전을 결심한다. 입술이 없으면, 이빨이 시릴 것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알았기 때문이다. 또한 한참 신혼에 젖어있는 자신의 큰 아들에게도 전쟁 참여를 권유한다. 권유라기 보다는 강제적인 조처였을 것이다. 인민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전쟁에 자신의 아들만 빼 놓을 수 없는 분위기였을 것이다.

이후 중국인민 지원군이 결성되었고 모안영은 이 부대에 지원하여 중국의 10대 원수 팽덕회의 러시아어 통역관으로 팽덕회와 함께 압록강을 건넜다. 이미 유럽의 전선에서 포로로 잡힌 경험이 있는 마오안잉을 위한 팽덕회의 배려였을 것이다. 그러나 모안영은 한국전쟁에 참전한 지 약 한 달 만인 1950년 11월 25일 평안북도 동창군 대유동에서 미군 전투기 폭격으로 전사했다. 11월 24일 두대의 정찰기(P-61 Black Widows)가 떠서 중국군의 위치를 탐지하였으며, 다음 날 정오에 4개의 네이팜탄을 투하하였다. 그 중 하나가 모안영이 있는 동굴 근처에 떨어져 사망을 하게 된 것이다. 원인은 어처구니 없게도 김일성이 수고한다며 내려준 계란을 요리해 먹다가 새어나간 불빛 때문이었다. 그가 결혼을 한지 1년 1개월 되던 날이었다.

그의 새까맣게 탄 주검을 안고, 팽덕회는 넋이 나갔다. 익명으로 참여를 했기 때문에 그때까지도 모안영이 모택동의 아들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팽덕회는 모안영을 살리려고, 불타고 있는 진지에 뛰어들려고 했다가 부하들의 필사적인 만류로 발만 동동 굴렀다. 모안영의 죽음을 안 주은래는 바로 모택동에게 죽음을 알리지 못하고, 3개월 이후에나 죽음을 보고 한다.

모택동과 그의 처 강청은 비통에 빠졌다. 모택동은 눈시울을 붉히며 한동안 말문을 열지 못하더니 "전쟁에는, 희생이 따르는 법이지..."라고 넋이나간 푸념을 했다. 모택동도 신혼 1년차인 며느리 류숭린에게 아들의 죽음을 3년 뒤에나 알리게 된다.

팽덕회는 그의 시신을 중국으로 가져오려고 했지만, 모택동은 다른 인민군과 함께 묻히는 것이 도리라며 거절을 했다. 결국 그의 유해는 평안북도 회창군 인민지원군 총사령부 열사릉원에 묻혔다.


2009년 그보다 20년 늦게 태어난 원자바오 총리가 그의 묘 앞에서 묵념을 하면서 소회를 달랜다.

"동지가 염원하던 부국강병의 꿈이 이루어졌습니다!"

확실히 중국은 군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부강해졌다. 미군 함대조차도 벌벌 떨 미사일을 개발했고, 세계에서 가장 빠른 컴퓨터와 세계에서 가장 빠른 기차를 발명했고, 전투기는 물론이고 민간 항공기조차도 이제는 수출하고 있는 실정이다. 뿐만 아니라 중국 상공에서 얼쩡거리는 적국의 첩보위성 쯤은 언제든지 요격시킬 수 있는 기술력을 갖추었다.

원자바오의 넋두리가 왜그리 부러운 것일까? 우리는 아직도 19세기를 정리하지 못해 꿈에도 생각지 못한 친일파가 득세하고 있는 세상이 되어 버렸다.


어떤 이들은 모택동이 한국전쟁을 일으키도록 도와줬다는 말을 하는데, 당시 중국공산당은 국공내전을 마치고 국내에 안정기가 필요하던 때였다. 따라서 중국 공산당 지도부들은 한국전쟁 참여를 반대했다. 그러나 결국 순망치한의 현실을 선택하게 된다. 또 어느 무식한 분은 마오안잉이 후방으로 빠져서 편하게 군생활하다가 재수없이 폭탄에 맞아뒈졌다고 얘기를 한다. 마오안잉은 소련군 전차부대 소대장으로 세계2차대전 때 최전방에서 전투를 하다가 포로로 잡히기까지 하였다. 또한 중국공산당도 제권이 이미 미국에 장악당하였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적어도 큰아들에게 큰 빚이 있는 마오쩌둥은 아들을 쉽게 전방에 보내지 못하고, 원수 팽덕회(펑다화이)에게 맡기지만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된다. 비록 남에게 대범한 척했지만, 팽덕회에 대한 미움은 사라지지 않았고, 결국 문화혁명기에 그를 숙청함으로써 뒤끝을 강하게 남겼다.


우리의 적국이었던 중국조차도 이러할진대 대한민국은 어떠한가? 적어도 정치인를 하겠다는 사람이라면 군대를 마치지 않은 이들은 출마조차도 하지 못하도록 법을 제정해야 한다. 부모의 권력으로 멀쩡한 놈들이 불량품 취급받아 군대를 면제받은 이들은 장관, 차관은 꿈도 꾸게하지 말아야 하며, 정치는 아예 꿈도 꾸지 못하게 제도화해야 한다. 또한 다른 나라의 시민권을 가진 자녀를 둔 이들도 정치를 하지 말아야 하며, 장차관까지는 못하게 하는 강력한 법을 시행해야 한다.

(필자는 위키백과의 필자이기도 합니다!)

출처 : 전주이씨능원대군파
글쓴이 : 동방 원글보기
메모 : 아! 6,25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귀중하게 쓰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