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부동 전투
7월말만 해도 8월 15일까지 부산을 점령한다는 북한군의 목표는 달성 가능해보였으나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 방어선을 점령하고 적극 항전하면서 양상이 달라졌습니다. 결국 이러한 상황 변화를 인식한 북한군도 대한민국 정부와 미 제8군사령부가 위치하고 있는 대구를 8월 15일까지 점령하는 것으로 목표를 수정하였습니다. 따라서 마산과 포항 방면으로 돌파구를 확대하기 위해 북한군은 애를 썼으나 그중에서도 최우선의 목표는 대구였습니다.
[낙동강을 이용하여 방어선을 구축한 모습]
8월 초, 대구를 압박하던 북한군은 총 5개 사단이었는데, 그중 북한군 제1, 13, 15사단이 8월 5일부터 대구 북방의 왜관-낙동리를 압박하였습니다. 당시 이곳을 담당한 국군 제1사단은 낙동강을 도하하여 기습하여오는 북한군과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계속하며 전선을 고수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전선의 우익이 북한군의 강한 압박에 밀려나자 육군본부는 8월 11일부로 국군의 방어지역을 왜관-다부동-신령-기계-포항을 연하는 선으로 축소조정 하였고 따라서 국군 제1사단도 8월 13일 후방인 다부동 일대로 물러나 배치되었습니다. 그리고 이곳은 낙동강 방어선의 최대 격전지가 되었습니다.
다부동에 국군 제1사단이 도착 했을 때 북한군은 이미 인근 요충지인 328고지와 유학산을 점령하고 있었습니다. 자칫하면 제대로 된 방어선을 구축하기도 전에 북한군이 이곳을 돌파하여 대구로 내려 올 수도 있는 위기의 순간이었습니다. 당장 국군 제1사단을 가까이서 도울 수 없었던 제8군은 북한군 예상 집결지를 타격하기 위하여 8월 16일 정오에 98기의 B-29를 출격시켜 융단폭격을 퍼부었을 만큼 다급하였습니다. 이런 대대적인 폭격으로도 적의 진공을 근본적으로 막을 수는 없었지만 적의 진공이 공습으로 잠시 주춤하는 순간 제8군의 예비인 미 제25사단 27연대가 다부동에 추가 투입되었습니다. 하지만 다부동의 사수는 국군 제1사단이 용전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상황이었습니다.
[대대적인 융단폭격에 나선 B-29비행대]
18일 새벽, 북한군의 박격포탄이 대구역에 낙하하면서 위기가 고조되자 국군 제1사단은 이런 절체절명의 난관을 타개하고자 배속 받은 미 제27연대와 함께 적진 돌파를 감행하였는데, 이것은 한‧미간에 이뤄진 최초의 협동작전이었습니다. 그러나 북한군도 기갑부대를 증강하여 야간공격을 개시하였고 결국 다부동 일대에서 물러설 수 없는 거대한 충돌이 벌어졌습니다. 제8군사령부도 3개 사단을 집중한 북한군에 대응하고자 미 제2사단 23연대와 국군 제8사단 10연대를 추가 투입했을 만큼 전력을 다하였고 다부동은 서서히 전쟁의 분수령으로 바뀌어 갔습니다.
이 같이 총력지원에 힘입어 아군은 적의 돌파구를 틀어막으며 방어 지역을 안정시키는데 성공하였는데, 이것은 국군 제1사단이 매일 평균 600~700명의 피를 바쳐가며 얻은 전과였습니다. 이런 분투 결과 8월 21일을 기점으로 국군 제1사단 지역의 상황은 눈에 띄게 호전되었고 초조해진 북한군은 최후의 발악을 하듯이 전차와 자주포를 앞세워 그날 밤 대규모 야간 역습을 감행해왔지만 미 제27연대가 전차로 맞대응하며 이를 방어해 내었습니다. 그리고 8월 23일이 되었을 때 북한은 더 이상 공세를 지속할 수가 없었습니다.
[다부동 전투에서 피격 된 북한군 T-34전차]
8월 공세 기간 중 북한군은 3만 여명의 전사자가 발생하였을 만큼 엄청난 타격을 입었지만 사실 국군과 유엔군도 1만 여명의 전사자가 나왔을 만큼 낙동강 방어선의 격전은 그야말로 치열하였습니다. 그중 다부동 전투는 피아가 뿌린 엄청난 피로 얼룩진 격전중의 격전이었습니다. 폭염 속에서 다부동 일대는 시체 썩는 냄새로 진동하였는데, 북한군이 물러간 후 국군 제1사단으로부터 전선을 인계받은 미 제1기병사단이 시체를 치워주지 않으면 진지를 인수하지 않겠다고 버틸 정도였습니다.
8월의 최대 위기였던 다부동 공방전은 이와 같이 아군의 승리로 막을 내리며 대구, 더 나아가 낙동강 방어선 전체를 지키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이 전투에서 미 제27연대를 예하 부대로 지원받아 협동작전을 효과적으로 수행하면서 보여준 국군 제1사단의 용전은 그동안 국군의 전투력에 대해 극히 불신하였던 미군의 인식을 바꾸어 놓았고 이는 국군의 위상 제고와 함께, 차후 작전에서 한‧미군의 협동 및 연합 작전에 기여하는 전기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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