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혼/현대사 100년

아! 6,25/평양-원산 점령

단산사람 2010. 3. 28. 16:59

평양과 원산 점령

이승만 대통령이 참석한 평양 입성 환영식
이승만 대통령이 참석한 평양 입성 환영식

38선 돌파 및 북진이 결정된 이후 북한의 수도 평양을 목표로 하는 진격작전이 큰 관심사로 떠올랐다. 여기에는 미 제1군단(미 제1기병사단, 미제2 4사단, 국군 제1사단)과 국군 제2군단(제6, 제8사단) 등이 참가했다. 그 결과 평양탈환전은 평양 선두 입성을 위해 국군과 유엔군, 그리고 각 군단 및 사단이 치열한 경쟁을 벌이는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드디어 10월 19일, 국군 제1사단이 평양에 최초로 입성했고, 곧 미 제1기병사단이 합류했다. 한편, 육본명령에 따라 평양 탈환전에 참여했던 국군의 제7사단도 거의 동시에 평양에 입성했다. 그 후 시내의 잔적을 소탕하는 작전이 전개되었다. 그리고 소탕작전이 완료된 10월 30일, 이승만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평양 시청에서 성대한 평양 입성 환영식을 거행했다.

한편 유엔군사령부는 북한의 작전지대를 낭림산맥을 기준으로 2개 지역으로 구분하고, 서측을 미 제8군사령부에, 동측을 미 제10군단에 부여했다. 이에 따라 동측 산악지대를 담당하게 된 미 제10군단은 원산으로 상륙하게 되었다. 그러나 원산상륙작전은 맥아더 원수의 최대 실책으로 기록되게 되었다.

인천에서 원산으로 향할 인원 및 장비의 승선과 적재에 많은 시간이 소요되어 미 제8군의 북진작전까지 지장을 주었지만 10월 16일, 마침내 상륙함정의 출항이 시작되었다. 원산상륙에 참가할 미 제7사단은 철도와 차량을 이용해 부산으로 이동했으며 10월 17일, 부산에서 승선 및 적재를 완료했다.

원산에 상륙할 부대들이 항해 중이던 10월 10일, 국군 제1군단이 원산을 점령함으로써 원산상륙은 행정적인 상륙으로 변질되었다. 그러나 그것도 결코 쉽지 않았다. 북한군이 원산 앞 바다에 고성능 기뢰를 부설했기 때문이다.

유엔군의 추수감사절 공세

1950년 10월 하순에 이르면서 국군과 유엔군은 머지않아 전쟁이 승리로 끝날 것이라는 분위기에 도취되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전쟁 종결을 예상한 미군 수뇌부는 한국전에 더 이상의 부대를 투입하지 않도록 하고, 투입된 부대를 차출해 다른 지역으로 보낼 계획까지 검토하고 있었다.

1950년 10월 중순, 작전 주도권을 완전히 장악한 국군과 유엔군은 추수감사절( 11월 23일)까지는 전쟁을 종료시킬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그리고 멀지 않은 거리에 있는 압록강과 두만강을 향해 총공격을 감행하기로 결정하면서‘추수감사절 공세’를 계획했다.

이에 따라 맥아더 원수는“전 병력을 투입해 최대한의 속도로 압록강과 두만강선까지 진격하라!”는 새로운 명령을 하달했다. 그것은 그가 설정했던 유엔군부대의 북진한계선을 철폐하는 조치였다. 그 결과 북진작전 중인 각급 부대들은 국적에 관계없이 압록강과 두만강을 향해 총진격을 서두르게 되었다.

추수감사절 공세’계획에 따라 10월 24일, 국군과 유엔군은 총공격을 감행해 서부전선에서 청천강을 도하해 압록강을 향하고, 동부전선에서 함흥과 흥남을 점령한 다음 장진호와 청진 방향으로 진격했다.

국군과 유엔군이총 공세를 시작함에 따라 중공군은 다음날인 10월 25일부터 전쟁에 투입된 이후 처음으로 공세작전을 감행했다. 그때 그들은 압록강을 도하한 6개 군 중에서 5개 군을 서부전선 적유령산맥 남단에 전개시켜 운산-희천 방향으로 공격케 했다. 그리고 동부전선에서는 1개 군을 장진호 북쪽에 전개시켜 국군 및 유엔군의 전진을 저지케 했다.

추수감사절 공세 계획과 중공군의 1차공세 상황도
추수감사절 공세 계획과 중공군의 1차공세 상황도

접전이 전개될 무렵 국군의 선봉부대인 제6사단 제7연대는 그 진출로가 중공군의 공격 경로와 엇갈렸던 관계로 26일 압록강변의 초산에 도달했다. 또한 서해안 축선상에서 미 제24사단과 영국연방 제27여단이 11월 1일에 신의주 남서쪽 33㎞ 지점의 정거동까지 진격했다. 그렇지만 그 밖의 지역에서 공격하던 부대들은 강력한 중공군의 저항에 부딪쳐 붕괴되거나 그들의 포위망에 고립되었다. 이로 인해 국군 제2군단의 전선이 붕괴되었고, 미 제1군단의 사정도 비슷했다. 이른바 중공군의 제1차 공세였다. 이로서 추수감사절 공세는 예상하지 못한 중공군의 기습공격으로 좌절되었다.

유엔군의 크리스마스 공세

중공군의 제1차 공세에 의해 철수한 미 제8군이 청천강 남쪽에 방어선을 형성하고 있던 11월 7일 경, 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했던 중공군이 갑자기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이에 따라 전선은 소강상태가 조성되었다.

유엔군측에서는 그 같은 상황을 어떻게 판단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중공군의 동정을 파악할 수 없게 된 미 제8군은 공중정찰과 위력수색 등을 강화하면서 영변과 박천을 탈환했다. 이어서 유엔군사령부는 소강상태가 지속되는 시기를 이용해 서부전선과 동부전선에 각각 1개 군단을 투입했다.

그때쯤 중공군의 개입 사실을 인정한 맥아더 원수는 그들의 조직적인 공격이 시작되기 전에 전쟁을 종결짓기 위한 공세를 계획했다. 그는“이번 작전이 전쟁의 최종공세가 될 것이며, 10일 이내에 전쟁을 끝내고 크리스마스까지는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고 말했다. 그런 목적으로 국군과 유엔군은 11월 24일‘크리스마스 공세’를 단행했다.

그때 중공군은 제13병단이 적유령산맥 남쪽 일대에서, 제9병단이 장진호 및 개마고원 일대에서 전투대형을 갖추고 국군 및 유엔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유엔군이 크리스마스 공세를 시작한 바로 그 다음날인 25일, 그들의 두 번째 공세를 시작했다. 중공군의 제2차공세도 제1차 공세와 같이 유엔군에게 기습적이었다.

유엔군측에서는 크리스마스 공세를 취할 때까지도 중공군의 병력은 의용군으로 구성된 단지 몇 개 사단에 불과하며, 중국이 주력을 투입해 전쟁에 개입하지는 않을 것으로 판단하고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조직적 지휘체제를 갖춘 중공군 3 0개 사단 30만여 명이 투입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에 따라 국군과 유엔군은 도처에서 출현한 중공군과 격돌하게 되었다. 중공군은 미 제8군의 우측방으로 주공을 지향시켜 청천강 이남으로 진출했다. 동부전선에서는 장진호 일대에서 미 제1해병사단을 포위했다. 눈 덮인 산골짜기에서 중공군은 엄청난 힘으로 밀어닥쳤다. 군우리에서 미 제2사단이 괴멸 되었으며, 장진호에서 미 제1해병사단이 포위되어 버렸다.

전혀 예상치 못한 사태에 직면한 유엔군사령부는 속수무책 이었다. 이에 따라 국군과 유엔군은 마치 눈사태를 만난 것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공세를 중단하고 남쪽으로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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