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혼/현대사 100년

아! 6,25/북한군의 남침

단산사람 2010. 3. 27. 19:58

북한군의 남침

남침 선봉에 선 북한군 전차대. 그들은 전차를 앞세우고 
							포병의 지원을 받으며 조직적인 공격을 감행했다.
							일부 부대는 자주포를 전면에 내세워 전차처럼 운용했다.
남침 선봉에 선 북한군 전차대. 그들은 전차를 앞세우고
포병의 지원을 받으며 조직적인 공격을 감행했다.
일부 부대는 자주포를 전면에 내세워 전차처럼 운용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38선상의 북한군 야포가 남쪽을 향해 일제히 불을 뿜기 시작하고, 북한군 기동부대가 서쪽의 옹진반도로부터 동쪽으로 개성, 전곡, 포천, 춘천, 양양에 이르는 38선 전역에서 공격을 시작했다. 또한 유격대와 육전대가 동해안을 따라 강릉 남쪽 정동진과 임원진에 상륙했다. 우리민족의 최대 비극이었던 6·25전쟁은 이렇게 시작됐다.

북한군의 기습남침이 시작되자 38선으로부터 불과 40㎞ 남쪽에 위치한 서울은 그야말로 풍전등화와 같았다. 사전에 치밀한 남침계획을 수립했던 북한군도 남한의 그같은 약점을 결코 간과하지 않았다. 그들은 서울 북쪽에 주공인 제1군단을 투입해 서울을 목표로 집중적인 공격을 감행했다. 중부전선의 춘천과 동부전선의 강릉 북쪽에서도 북한군 제2군단의 공격이 동시에 시작됐다.

북한군의 기습공격을 받은 38선 일대의 국군 장병들은 즉시 전투태세에 돌입했으며, 주둔지에서 새벽잠을 깬 부대원들은 출동준비를 갖추기에 바빴다. 그동안 지속되었던 비상경계령이 불과 하루 전인 6월 24일(토요일) 00시부로 해제되었으며 주말을 맞이해 많은 병력이 외출·외박을 나갔기 때문에 부대에 남아 있는 병력은 많지 않았다.

38선의 국군 방어진지에서는 파도처럼 밀려오는 적 부대와 치열한 접전이 이미 전개되고 있었다. 국군 부대들이 미처 준비태세를 갖추기도 전에 방어진지를 기습한 북한군의 공격을 선도하고 있는 것은 소련제 T-34전차와 SU-76자주포였다.

그들의 전차와 자주포가 국군의 방어진지를 향해 돌진하고 있었으나, 당시 국군은 단 한대의 전차와 자주포도 갖지 못했다. T-34전차를 격파할 수 있는 대전차무기도 없었다. 따라서 북한군의 전차는 무적의 괴물이었다.

전차의 위력을 보고 있는 국군 용사들은 공포의 도가니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많은 장병들이 전의를 상실했다. 그러나 모두가 그냥 바라보고 있지는 않았다. 화염병을 들고 또는 박격포탄을 메고 전차를 향해 달려들었다. 감히 대적할 상대가 없을 것이라며 방심하고, 헷치를 열어놓은 채 진격하고 있던 전차에 올라타 전차의 내부에 화염병을 던졌다. 또한 포탄을 등에 맨 채 육탄으로 전차를 향해 돌격하는 용사도 있었다.

예상치 못했던 국군 용사들의 반격에 이제까지 무적임을 뽐내던 북한군의 전차는 화염에 휩싸이거나, 궤도가 잘려졌다. 그러나 그 같은 특공대의 활약도 대세의 흐름을 막지는 못했다. 육군본부 상황실에는 전방사단으로부터 급박한 상황을 알리는 전화가 쇄도하기 시작했다. 이른 아침 자택에서 상황보고를 받은 육군 총참모장 채병덕 소장은 곧 비상을 발령하고 신성모 국방부장관을 직접 찾아가 전쟁 발발 상황을 보고했다.

서울을 비롯한 주요 도시의 거리에는 방송 차량이 장병들의 부대 복귀를 독촉했고, 사람들이 많이 모인 극장과 운동장에도 비상사태를 알리는 방송이 울려 퍼졌다. 그러나 적과 맞서 싸울 병력이 부족한 대부분의 전방진지는 장병들이 투입되기도 전에 붕괴되기 시작했다. 그 사실이 신문 호외로 전국에 뿌려지자 국민들은 충격과 불안에 휩싸이게 되었다.

북한측의 남침사실 은폐와 북침 주장

국내·외 신문에 보도 된 북한군 남침 관련기사
국내·외 신문에 보도 된 북한군 남침 관련기사

남침 전쟁의 기습 달성이 확실해진 것을 확인한 북한 정권은 오전 11시경 평양방송을 통해“남조선이 북침했기 때문에 자위조치로서 반격을 가해 전쟁을 시작했다”는 내용으로 대한민국에 대해 선전포고를 발표했다. 이어서 오후에는 김일성이 직접 방송을 통해“리승만 괴뢰정부의 군대가 침략전쟁을 일으켰으며, 공화국 경비대와 인민군대에게 반격을 실시하라고 명령했다”는 내용을 발표했다.

북한측의 주장은“대한민국이 북침했으므로 그들이 반격했다”는 것으로 그들의 사전 치밀한 계획에 따라 도발한 침략전쟁의 실상을 은폐하고 그 책임을 한국측에 전가하려 했던 것이다. 그 후 일부 인사들이 북한의 주장과 맥락을 같이 해“남측이 먼저 공격을 시작하였고, 북측이이를 반격함으로써 전쟁이 확대되었다.”는 소위‘북침설’을 주장하기도 했다.

북한측의 사실 은폐 기도는 많은 증거 자료를 통해서도 허구임이 드러났다. 전쟁 중에 노획된 북한군의‘선제타격작전계획’에는 그들의 남침 기도가 분명하게 명시되어 있다. 또한 전쟁 이후 공산권 특히 러시아에서 발표된 관련 자료는 소련·중국·북한이 사전에 모의해 전쟁을 준비하고 남침을 시작했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당시 전쟁에 직접 참가했던 많은 공산측 인사들도 북한의 남침 사실을 증언해 주고 있다.

특히 1994년 러시아를 방문한 한국의 김영삼 대통령에게 러시아 옐친(Boris N. Yeltsin) 대통령이 제공한 6·25전쟁 관련 비밀문서에는“김일성의 요청을 스탈린(Joseph V. Stalin)이 승인함으로써 전쟁이 시작되었다”는 내용을 분명히 명시하고 있어 북침설을 주장하던 사람들도 변명의 여지가 없게 되었다.

한편“어느 편이 먼저 총을 쏘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라고 하거나, “미국과 남한이 북한으로 하여 남침하도록 유도했다.”는‘남침 유도설’등을 내세우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그것들은 모두 북한의 전쟁 도발사실과 그 책임을 희석시키려는 가설에 불과하다.

북한군의 서울 점령

6월28일 북한군 105전차여단의 뒤를 따라 시가행진
으로 서울 시내에 진입하는 북한군 보병부대
6월28일 북한군 105전차여단의 뒤를 따라 시가행진
으로 서울 시내에 진입하는 북한군 보병부대

6월 26일 13시경, 의정부가 남침 하루 만에 점령되고 27일 오전, 아군부대들이 미처 방어진지를 편성하기도 전에 40여 대의 전차와 자주포로 증강된 적의 공격을 받게 되자 방어부대들은 창동지역을 포기하고 미아리·태릉 일대로 분산 철수했다.

국군 제7사단은 제5사단과 함께 정릉-미아리-청량리를 잇는‘미아리 방어선’을 구축하고, 두 사람이 방어지역을 동서로 나누어 각각 지휘하기로 했다. 그들은 그곳의 지형이 방어에 유리하므로 도로만 차단하면 적 전차를 막을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전력을 다해 방어진지를 구축했다.

27일 밤, 폭우가 쏟아지는 가운데 적의 공격이 재개됐다. 야간이었지만 전차를 앞세운 적은 미아리 삼거리에 설치해 둔 장애물을 쉽게 밀어제치고 길음교를 통과해 서울 도심으로 진출했다. 이 시각 한강교가 폭파되었다.

미아리 방어선의 붕괴는 서울 방어를 위한 최후 방어선의 붕괴였다. 미아리 방어선 붕괴로 적 전차가 시내에 진입함에 따라 서울 시가지는 무방비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시내 곳곳에 차량·목책 등으로 긴급히 장애물을 설치하는 방안이 강구되었지만 효과적인 저항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전쟁시 서울에서 시가전을 실시하는 방안은 원래부터 고려되지 않았다. 따라서 6월 28일 날이 밝으면서부터 서울은 북한군의 지배하에 놓이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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