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혼/현대사 100년

아! 6,25/중공군 개입

단산사람 2010. 3. 28. 21:00

중공군의 개입 배경

압록강을 건너 북한으로 진입하는 준공군
압록강을 건너 북한으로 진입하는 준공군

국군과 유엔군이 북진작전을 전개하여 압록강과 두만강선을 향해 파죽지세로 진격하게 되자, 한반도의 통일은 현실로 다가온 듯 했다. 그러나 예상외로 중국이 개입함으로써 전쟁의 방향은 완전히 뒤바뀌게 되었다. 공세를 펼치던 국군과 유엔군은 급속히 철수하게 되었고, 통일의 꿈은 다시 한 번 좌절을 겪게 되었다.

6·25전쟁이 발발한 직후‘전쟁에 소련과 중국이 어느 정도 관련되어 있으며, 앞으로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하는 문제를 확인하는 것은 미 정책결정자들에게 매우 중요한 과제였다. 소련의 전쟁 개입은 미국과 직접적인 대결을 초래하게 된다는 측면에서 그 가능성이 낮다고 평가된 반면 중국의 개입 가능성과 그들에 대한 우려는 사라지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중국은 전세가 북한군에게 유리하게 전개될 때는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북한군이 붕괴되고 국군과 유엔군이 반격으로 38선을 향해 진격해가자 공공연히 전쟁 개입 의사를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유엔군측은 중국의 개입 가능성을 높게 보지 않았다. 아울러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중국은 결국 전쟁에 개입하지 않을 것이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유엔군의 판단과 달리 실제로 중국은 이미 전쟁에 개입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병력 규모도 예상외로 컸다. 당시 중국의 개입은, 중국의 발표에 의하면, 북한의 군사원조 요청을 받아들인 것이며, 만일 북한이 미국에 의해 점령된다면 적대국가와 국경을 마주하게 되어 국내 및 국제적으로 자신들에게 불리한 일이 많이 발생하게 될 것이라는 점이었다. 또한 중국이 소련으로부터 경제 및 군사력 건설에 필요한 원조를 획득하며, 정치적·사회적인 면에서 국가의 안정을 이루기 위함이었다고한다.

중공군 개입 과정

중국이 한반도의 전쟁에 보다 깊은 관심을 갖게 된 시기는 미 지상군의 전선 투입이 이루어지고 있던 1950년 7월 초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때 중국은 자체 판단과 소련의 권고에 따라 동북(東北)지역의 안전과, 필요시 북한을 지원할 수 있는 대비태세를 갖추기 위해‘동북변방군’을 조직했다.

그리고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역전된 후인 10일 1일, 소련과 북한으로부터 공식적인 지원 요청을 접수했다. 이에 따라 마오쩌둥은 10월 8일‘항미원조(抗美援朝) 보가위국(保家衛國)’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그동안 출전태세를 갖추어 온 동북변방군을‘인민지원군(人民志願軍)’으로 개편(개칭)하고 출병 명령을 하달함과 동시에 그 사실을 스탈린과 김일성에게 통보했다.

그 후 지원군에 대한 소련의 공군 지원이 이루어지지 않아 두 차례 출병이 유보되었으나, 10월 19일, 제4야전군 예하 제13병단의 6개 군 18개 사단(약 18만 명)이, 11월 초순에는 제3야전군 예하 제9병단 3개군 12개 사단(약 12만명)이 각각 압록강을 도하함으로써 본격적으로 참전하게 되었다.

한국에 침입한 중공군은 주로 ①단둥-신의주, ②청성진-삭주, ③지안-만포진, ④임강-중강진 등 동북지역(만주)으로부터 북한 지역에 이르는 4개의 경로를 이용해 압록강을 건넜다.

중공군의 보병사단(사)은 한국군과 비슷한 전형적인 삼각편제로서 병력은 통상 7천명 정도였다. 그러나 항미원조지원군사단들은 1만∼1만 1천 명으로 증강되었다. 그들은 제공권을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 일단 한반도에 발을 들여놓은 후에는 양호한 도로를 피하고 험준한 산악지대를 따라 집결지로 이동했다. 그리고 이동을 감추기 위해 매일 오후 7시부터 다음날 새벽 3시경까지 주로 야간에 행군하고 도착 지점에서는 참호를 파고 휴식을 취했다. 그 같은 은밀한 야간행동 때문에 유엔 공군은 그들을 발견할 수 없었다.

중공군의 전략전술

중공군의 공격. 준공군은 공격할 때 나팔을 불고 
징을 치는 등의 심리전을 병행했다.
중공군의 공격. 준공군은 공격할 때 나팔을 불고
징을 치는 등의 심리전을 병행했다.

중공 인민지원군은 사실상 중국의 정규군, 즉‘인민해방군’의 일부였다. 한국에 투입된 중공군은 동북변방군이 주축이었으며 참전경험이 많은 정규 군인들로 구성되었던 것이다. 그들의 지휘부도 마오쩌둥의 명령에 의해 총사령관에 펑더화이, 부사령관에 덩화·홍쉬에쯔·한시엔추, 참모장에 셰방이 임명되는 등 중공군을 대표하는 인물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중국정부가 공식적으로 지원한다는 지원군(支援軍)이라 하지 않고, 중국 국민들의 자원에 의해 이루어진‘지원군(志願軍)’이라고 한 것은 중국 국민이 북한 국민들을 돕는다는 민간 차원의 군대라고 겉모양을 포장하려 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때의 참전이‘미국과 유엔에 대한 선전포고’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고 상대방을 속이기 위한 위장 술책이었던 것이다. 그 같은 명칭은 한동안 유엔군측을 혼란스럽게 했고, 중공군의 실체를 파악하기 어렵게 하는 하나의 요인으로 작용했다.

중공군은 국내에서 국민당정부의 국부군과 국공 내전을 수행하면서 그들의 전력은 되도록 온전하게 보존하면서 국부군의 전력을 최대한 소모시키기 위해 전진과 철수를 반복하는 운동전(기동전)전략을 적용했다. 그러나 중공군 지휘부는 기동공간이 좁은 한반도에서는 그러한 전쟁 수행 방법이 적합하지 않음을 인식했다.

이에 따라 진지전과 운동전을 배합한 작전을 수행한다는 방침을 세운 중공군은 상황에 따라 역습·기습·매복으로 적의 유생역량(병력)을 소멸하는 전술을 구사했다. 중공군은 그 같은 기본개념에 입각해 먼저 한국군의 방어지역을 돌파 및 포위·소멸한 후 미군의 측방을 노출시켜 그 퇴로를 차단·포위함으로써 소멸시키는 분리시켜 격멸한다는 기본개념으로 작전을 수행하려 했다.

그 같은 전술에 의해 중공군은 방어에 유리하고 유엔군이 공격하기 어려운 산악지형에 진지를 구축하고, 은밀하게 숨어 적이 통과하기를 기다렸다가 유엔군의 측방과 후방을 포위·공격했다. 또한 그들은 피리와 꽹과리를 불며 협소한 정면에 압도적인 병력을 투입해 밀집대형으로 전진하는 이른바 인해전술로 유엔군의 집중적인 화력과 공중공격을 피해 야간공격을 감행함으로써 화력의 열세를 극복하고 최대의 전과를 거두려 했다. 그리고 그 같은 중공군의 전략·전술은 초기 전투에서 큰 성과를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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