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수부대와 피난민을 태우고 흥남항을
출발하는 해군함정
장진호 지역의 국군과 유엔군이 위급한 상황에 처했을 때 원산에 있던 미 제3사단이 그들을 지원하기 위해 북상했다. 그 때문에 원산의 경비가 약화되어 원산과 그 남쪽지역이 적에게 피탈되고 말았다. 그로인해 퇴로가 차단된 미 제10군단과 국군 제1군단은 해상으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1950년 12월 11일, 미 제1해병사단의 장진호 철수작전이 일단락되자 미 제10군단장은 미 제3사단과 미 제7사단 그리고 국군 제1군단을 함흥 일대에 배치해 교두보를 구축했다. 그리고 단계적 철수가 이루어지도록 3개의 작전통제선을 설정했다.
당시 제10군단이 철수시켜야 할 물동량은 병력105,000명, 차량18,422대, 각종 전투물자35,000톤이었다. 그 같은 대규모의 물동량을 해상으로 이동시키기 위해 미 해군은 125척의 수송선을 동원했으나 그것도 부족한 형편이었다.
흥남에서 가장 먼저 철수한 부대는 국군 제3사단이었으며, 두 번째로 미 제1해병사단의 병력과 장비가 15일까지 선적되어 각각 부산으로 출항했다. 아군의 철수작전이 계속되는 동안 공산군은 맹렬한 공격을 실시했다. 국군과 유엔군은 적을 초기에 제압하지 않으면 교두보 확보가 어렵다는 판단 아래 항공폭격·함포사격 등 가용한 모든 화력을 동원해 그들을 제압했다.
미 제1해병사단 다음으로 미 제7사단과 미 제10군단 사령부가 승선했다. 12월 20일, 부대들이 승선을 완료하자 미 제3사단이 제3통제선으로 철수했다. 그때 흥남 외곽의 방호임무는 미 해군이 맡아 화력으로 공산군의 전진을 봉쇄했다. 12월 24일 오후 2시, 미 제3사단을 중심으로 한 마지막 육상부대가 승선을 완료했다. 그때 200톤의 탄약과 얼어붙어 있는 폭약, 500개의 포탄, 그리고 200여 드럼의 유류는 후송하지 못한 채 항만 폭파시 함께 폭파했다.
흥남 철수작전은 여러 가지 기록을 남긴 것으로도 유명하다. 10만 명이 넘는 병력과 17,500대의 각종 차량, 35만 톤의 물자를 함정으로 완전하게 철수시켰다는 사실이다. 그 과정에서 한국군 지휘관들의 강력한 주장으로 남행을 결심한 피란민 91,000명까지 동행했다. 이와 함께 항공기를 이용해 병력 3,600명과 차량 196대, 1,300톤의 물자를 철수시켰다.
흥남 철수작전은 대규모적인 육·해·공 합동작전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 같은 흥남 철수작전의 성공으로 국군과 유엔군은 상당한 전투력을 보존해 다음 단계의 작전을 수행할 수 있었다.
1950년 12월 중순, 38선 일대에서 유엔군과 대치하게 된 중공군과 북한군은 열악한 보급과 계속된 작전으로 부대정비와 휴식이 절실한 입장이었다. 따라서 중공군 사령관 펑떠화이는 38선 일대에서 2~3개월간 부대를 정비한 후 38선을 돌파해 서울을 점령하기로 했다.
그러나 마오쩌둥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2~3개월간의 부대정비가 필요하다”는 펑더화이의 건의를 인정하면서도 자유진영 국가들이 기대했던 것처럼“중공군이 정지할 경우, 38선이 고착화될 수 있다.”는 정치적 문제를 우선시했다. 따라서 마오는 펑더화이에게 부대정비 기간은 서울을 점령한 후에 부여할 것이라며 즉각적인 공세로 서울을 점령할 것을 명령했다. 마오의 지침에 따라 펑(彭)은 즉각 공세준비에 착수하면서 12월 31일을 공격개시일로 선정했다.
38선 남쪽으로 황급히 후퇴했던 유엔군 각급부대는 책임지역을 할당받아 전열을 정비하고 있었지만 중공군의 공세에 대한 대비책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지휘관들 역시“중공군이 공격해 올 경우 후퇴하는 방법밖에는 없다”는 식으로 패배주의에 빠져 있었다. 그때 설상가상으로 미 제8군사령관 워커 중장이 의정부에서 자동차 사고로 순직했으며, 그 후임으로 리지웨이(Matthew B. Ridgway) 중장이 부임했다.
혹한 속에 피난 길에 나선 서울시민들.
과천 부근의 당시 모습(1951.1)
1950년의 마지막 날인 12월 31일은 일요일이었다. 유난히도 춥고 어둠이 일찍 찾아든 17시경, 서부전선에 배치된 중공군과 북한군은 짧은 공격준비사격과 함께 압도적으로 우세한 병력을 투입해 일제히 공격을 감행했다. 그때부터 20만 명에 가까운 대병력이 투입된 서부전선의 계곡과 능선은 중공군으로 뒤덮이게 됐다.
중공군들은 문산 우측의 제1사단과 동두천의 제6사단 등 한국군 부대를 집중 공격했다. 제1·6사단은 준비된 진지에서 용전분투했으나 시간이 갈수록 거세지는 중공군 인해전술(人海戰術)을 감당할 수 없었다.
해가 바뀐 1951년 1월 1일 오전, 미 제8군사령관 리지웨이 중장이 전투현장을 확인했다. 그때 국군 제1·6사단 지역에는 커다란 돌파구가 만들어져 있었고, 중동부 전선의 국군 제3군단도 집중적인 공격을 받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국군과 유엔군이 현 위치에서 더 이상 지체할 경우 주력이 중공군에게 포위될 가능성이 큰 것으로 판단했다.
위기를 실감한 군사령관은 전 부대를 한강-양평-홍천을 연하는 선으로 철수하게 했으며, 이어서 1월 3일 오후에는 한강선에서 평택-안성을 연하는 선으로 철수하게 했다. 군사령관의 명령에 따라 1월 4일 오전까지 한강 이북의 모든 부대들이 한강에 설치된 임시교량을 이용하여 질서 있게 철수했다.
그때 많은 민간인들도 피란길에 나섰다. 그리고 마지막 엄호부대가 철수하면서 임시교량을 폭파했다.
유엔군이 서울에서 철수하자 그 뒤를 따라 중공군이 서울을 점령했으며, 15시경부터 서울시청 등 주요 건물에는 인공기(人共旗)가 펄럭이기 시작했다. 군사령관이 한강선 방어를 포기하고 조기에 철수를 명령한 것은 한강이 두꺼운 얼음으로 뒤덮여 있어 중공군의 도하를 막는데 도움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후일 밝혀진 사실이지만 그 시기에는 미국 정부에서조차“중공군이 공세를 멈추지 않는다면 한반도를 포기할 수밖에 없다”는 주장이 심각하게 제기되고 있었으며, 제주도에 임시정부를 수립하는 문제까지도 검토되고 있었다. 따라서 중공군의 3차공세가 감행되던 시기는 우리나라의 운명이 경각에 달려 있었으며, 6·25전쟁 이후 최대의 위기를 겪고 있었던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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