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상륙작전과 서울탈환, 그리고 낙동강방어선에서 반격작전으로 국군과 유엔군은 9월 말까지 38선 남쪽의 북한군을 격멸하고 사실상 전쟁 이전의 상태를 회복했다. 그 과정에서 국군과 유엔군이 38선으로 접근함에 따라 38선 돌파 여부가 최대의 관심사항으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38선 돌파문제는 1950년 8월 30일 애치슨 미 국무부장관의 발언이 있은 후부터 본격적으로 거론되었으며, 그때부터 북진에 대한 찬반 논쟁이 일어났다. 38선 돌파 논쟁의 핵심은“국군과 유엔군의 북진을 허용해 패주하는 북한군을 격멸하게 할 것인가?”, 또한“북한군의 격멸 후 통일문제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에 있었다.
북진을 찬성하는 측은 전쟁범죄자를 처벌하고 유엔의 목적인 한국의 통일을 달성하기 위해 북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울러 만일 추격을 중지하게 되면 북한군이 군사력을 재정비해 재침할 가능성을 남겨두어 유엔군이 계속해서 한국에 주둔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에 대해 북진을 반대하는 측은 38선을 넘게 되면 소련 및 중국의 개입을 초래하게 되며, 필연적으로 전쟁이 확대되고 장기화되어 제3차 세계대전을 유발할 위험이 있다고 주장했다.
한편, 한국의 이승만 대통령은 일찍이 트루먼 미국 대통령에게“이 전쟁의 궁극적인 목적은 국토통일이어야만 한다.”는 내용의 전문을 보냈다. 그는 전문을 통해 이번 기회에 침략자를 격멸해 통일을 달성해야 하며, 한국 국민에게는 그렇게 할 권리가 있다는 그의 신념을 피력했다.
38선 돌파를 지시하는 이승만 대통령의 친필 지령문
미국은 이승만 대통령의 전문에 대해 공식적인 반응을 나타내지 않았다. 그러나 유엔군사령부는 9월 29일 모든 부대에 진격을 멈추도록 명령했다. 이에 대해 이승만 대통령은“유엔군 사령부가 어떻게 결정하든지 한국군은 진격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국군이 38선에서 정지하고 있을 때, 정일권 육군총참모장에게 38선을 돌파해 북진할 것을 지시했다.
그렇지만 국군의 작전지휘권이 유엔군사령관에게 이양된 상태이므로, 군 지휘체제상의 혼선이 야기되는 사태를 방지해야겠다는 것이 정 총장의 복안이었다. 이에 따라 그는 워커 장군에게 동해안 전선의 국군이 전술적인 상황 하에서 38선 바로 북쪽의 고지를 점령할 필요가 있음을 역설해 동의를 얻었다. 그 결과 국군의 선두부대가 10월 1일, 최초로 38선을 돌파할 수 있었다.
미국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결의에 따라 무력침략으로부터 한국을 방어하고 국제평화와 지역 안전을 회복하기 위해 유엔군을 지휘할 권한을 위임받고 있었다. 이에 따라 미국은 유엔군사령관을 임명했으나, 유엔으로부터 작전 한계에 대한 지침을 받지는 않았다.
낙동강전선의 전황이 점차로 유리하게 전개되어 가고 인천상륙작전 계획이 수립된 가운데 전세를 역전시킬 전망이 보이기 시작하자, 앞으로의 작전을 어떻게 전개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미국 행정부와 합동참모본부 및 유엔군사령부를 중심으로 활기를 띄게 되었다.
그때쯤인 9월 1일, 미국의 국가안전보장회의가 전쟁지도에 관한 각 부처의 견해를 종합했다. 그 결과, 한반도에서 미국이 소련보다 유리한 입장을 확보할 수 있는 기회가 있을 때 이를 최대로 활용해야 한다는 점에 의견 일치를 보았다. 이에 따라 안보회의는 유엔군의 작전목표를 북한의 군사력을 무력화 시키는데 두기로 합의하고, 유엔 안보리의 결의가 곧 유엔군의 38선 돌파를 허용하는 법적 근거가 된다는 입장을 취했다.
그러한 가운데, 영국을 비롯한 8개국은 한반도의 인위적인 분단을 해소하고 유엔의 권능을 확립한다는 기조 위에 미국이 작성한 결의안을 유엔총회에 상정했다. 그리고 결의안은 10월 7일, 유엔총회에서 압도적인 찬성으로 가결되었다.
38선 돌파 기념목비를 세우는 김백일 국군 제1군단장
유엔군사령관 맥아더 원수는 북진계획을 미 합참에 제출했다. 그리고 9월 29일, 트루먼 대통령의 승인을 받았으며 10월 2일,‘작전명령 제2호’로 유엔군 예하 전 부대에 하달했다.
북진작전 명령의 골격은 미 제8군을 주공, 미 제10군단을 조공으로 북진하며, 정주-군우리-영원-함흥-흥남을 잇는 선선(일명 맥아더 라인)까지 진출한 후 그 선 이북지역에 대한 작전은 한국군이 전담한다는 것이었다. 한편 북진작전 명령의 특징은 유엔군의 작전지역을 낭림산맥을 기준으로 동서로 양분하고, 동부지역에 투입될 미 제10군단을 미 제8군에 배속하지 않고 유엔군사령부가 직접 통제해 원산으로 상륙케 한다는 것이었다. 그때 미 제8군사령부에서도 별도의 북진작전 계획을 수립했으나 빛을 보지 못했다. 다만 맥아더 원수의 복안에 따라 북진작전이 결정되었을 뿐이었다.
10월 1일 정오, 맥아더 원수는 북한군 총사령관에게 항복을 요구하는 성명을 방송했다. 그러나 북한의 응답은 없었다. 10월 9일, 맥아더 원수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새로운 결의안에 근거해 다시 북한의 항복을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북한의 김일성은 두 번 째의 제안에도 응답하지 않았다.
그 같은 사태를 예상하고 있던 맥아더 원수는 북진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그 결과 10월 9일, 전면적인 북진작전이 시작됐다. 그 같은 38선 돌파와 북진은 국군과 유엔군에게 대단히 고무적인 일이었다. 특히 한국인의 입장에서 볼 때 민족의 염원인 조국통일의 기대를 갖기에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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