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혼/현대사 100년

아! 6,25/인천상륙작전

단산사람 2010. 3. 27. 19:59

인천상륙 작전계획

‘마운트 맥킨리’호 함교에서 상륙작전을 지휘하는 
맥아더 원수와 그의 참모들
‘마운트 맥킨리’호 함교에서 상륙작전을 지휘하는
맥아더 원수와 그의 참모들

북한군의 남침 이후 낙동강 전선에서 위기를 넘긴 유엔군은 적을 일거에 포위 격멸할 목표 하에 인천상륙작전을 단행하고 대반격작전을 전개함으로써 전쟁의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맥아더 장군의 구상은 북한군의 전진이 계속되어 병참선이 신장될 것을 예견하고 아군을 적의 후방 깊숙이 침공시켜 병참선을 차단하고 낙동강방어선에서의 반격부대와 연결작전을 전개하여 적을 일격에 섬멸한다는 것이었다. 인천상륙작전 계획은 미 제1해병사단을 돌격상륙부대로 하여 인천-서울을 목표지역으로 결정하고 낙동강전선의 미 제8군과의 협조된 작전을 동시에 실시한다는 것이 핵심이었다.

맥아더 장군이 계획을 발전시키는 동안 미 합참은 상륙계획 자체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동의하였으나, 상륙지역을 인천으로 결정한 것에 대해서는 완강히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해군측 반대의 이유는 인천지역이 조수, 수로, 해안조건에서 상륙작전에 많은 제한요소를 갖고 있기 때문에 상륙의 적지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맥아더 장군은 인천에 상륙해야하는 이유에 대해 “적은 그의 후방을 무시하고 있고 병참선이 과도하게 신장되어 있으므로 전세를 회복할 만한 능력이 거의 없다”라고 역설하였다. 그는 계속해서 전략적, 정치적, 심리적 이유를 들어 서울을 신속히 탈환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그때 그는 지도를 가리키면서 인천은 제8군이라는 ‘망치’가 북한군을 분쇄하는데 제10군단은 ‘모루’ 역할을 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워싱턴으로 복귀한 군 수뇌들은 존슨 국방장관, 트루먼 대통령에게 방문결과를 보고하였다. 결국 맥아더 장군은 국방장관과 대통령의 지지를 얻어냈으며, 미 합참은 8월 28일 인천상륙작전 계획을 공식 승인하였다. 이에 따라 맥아더 장군은 8월 30일에 인천상륙작전 명령을 하달하였으며, 9월 6일 상륙작전 날짜를 최종 9월 15일로 확정하였다.

인천상륙작전 개시

인천상륙작전 계획과정에서 해군은 극동해군사령관의 주도로 준비되었다. 극동해군은 이러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제7합동기동부대를 구성하고 제7함대사령관 스트러블 중장을 기동부대 사령관에 임명하였다. 인천상륙 일자가 다가오자 제7합동기동부대는 9월초에 부산, 일본의 사세보, 고오베, 요코하마에서 상륙군 적재를 시작하여 9월 10일부터 인천으로 출항하기 시작하였다.

미 해병 제1사단과 미 보병 제7사단은 각각 고오베와 요코하마에서 9월 11일에 출항하였으며 도중에 부산에서 출항한 국군 해병 제1연대와 제17연대 등과 합류하였다. 이렇게 하여 모든 함정들이 9월 14일까지는 서해 중부 해상의 약정된 집결지인 덕적도 근해에서 총집결하였다. 제7합동기동부대의 인천으로의 항진과 사전폭격은 상륙계획의 작전보안을 유지하고 특히 상륙지역과 일자를 기만하기 위한 기만작전과 양동작전이 병행 실시되었다. 상륙군 부대의 인천으로의 항진과 보조를 맞추어 목표지역을 제압하기 위한 제7합동기동부대의 공중폭격은 9월 4일부터 상륙 시까지 계속되었다. 이러한 맹렬한 사전폭격과 포격으로 월미도는 뼈만 앙상하게 남은 나무들만이 불에 타고 있을 뿐 정적이 흐르고 있었으며 인천시내는 검은 불길이 하늘을 매웠다.

인천상륙작전 입체상황도
인천상륙작전 입체상황도

인천상륙은 9월 15일 새벽에 개시되었다. 이날 새벽은 구름이 잔뜩 끼어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 같은 음산한 날씨였다. 02:00 월미도에 상륙돌격을 감행할 미 제5해병연대 3대대 상륙단의 선견대가 인천수로로 진입하기 시작하여 얼마 후 미 해군정보장교 클라크 대위가 밝혀주는 팔미도 등대의 안내를 받아 무난히 인천항에 이르렀다.

이들은 05:00 고속항모부대의 함재기들이 어둑어둑한 하늘로 날아올라 월미도와 인천 내륙지역에 맹폭을 실시하고, 그 뒤를 이어 구축함의 첫 포탄이 월미도에 작렬하였다. 로켓포함이 녹색해안과 그 주변 북한군 진지에 대해 1천여발의 포탄을 퍼붓는 동안 상륙주정 7척에 분승, 해상에 설정된 공격개시선을 통과하였으며, 08:00에 월미도를 확보하고 섬 전체에 걸친 소탕작전을 정오쯤 완료하였다. 인천시가지 소탕작전은 국군 해병 제1연대가 담당하였다.

수도 서울의 수복

인천상륙작전으로 교두보를 확보하는데 성공한 미 제10군단은 9월 18일부터 서울을 향한 진격을 시작했다. 이를 위해 미 제1해병사단(국군 제1해병연대 배속)은 서울의 서쪽에서 시가지를 향해 공격하도록 하고, 미 제7보병사단(국군 독립 제1 7연대 배속)은 서울의 남쪽에서 북한군의 증원차단과 함께 그들의 퇴로를 차단하면서 낙동강전선을 돌파해 북상하는 미 제8군과 연결하도록 했다.

국군과 유엔군의 서울공격이 시작되자 북한군은 제9사단과 제18사단 등 2만여 명의 병력을 동원해 서울을 방어하려 했다. 그들은 서울의 시가지 교차로마다 장애물을 설치해 시가전을 전개할 준비를 갖추면서, 연희고지와 안산을 고수해 아군의 서울 진입을 저지하려 했다. 이에 따라 서울 서측방과 남측방에서 격렬한 전투가 전개되었다.

미 제10군단은 행주와 마포, 신사동에서 한강을 도하한 후 연희고지와 망우동, 구의동 일대의 북한군 저지진지를 공격해 9월 26일까지 서울 시가지의 절반 정도를 점령했다. 다음날인 2 7일에는 공격부대가 삼각지와 남대문, 회현동 일대의 잔적을 격멸하고 중앙청에 태극기를 게양했다.

이어서 9월 28일, 공격부대들은 북한군을 서울 시내에서 쓸어내듯 소탕하며 의정부 방면으로 공격을 계속했다. 그날로 북한군의 저항은 끝났으며 수도 서울은 인천상륙 후 2주일, 북한군에게 피탈당한 지 3개월 만에 완전히 수복되었다.

그 이튿날인 9월 2 9일 정오, 중앙청에서는 감격의 수도탈환식이 거행되었다. 이 행사를 통해 맥아더 원수는 수도 서울을 이승만 대통령에게 인계했으며, 대통령은 맥아더 원수에게 태극무공훈장을 수여했다. 전쟁에서 적의 침공으로 상실했던 수도를 되찾는다는 일은 어느 한 전투의 승리 또는 어느 한 지역의 회복과는 다른 특별한 의의가 있는 일이다. 북한군 남침 3일 만에 그들에게 빼앗겼던 수도 서울의 탈환은 그만큼 우리 국민에게 감격적인 사건일 수밖에 없었다.

국군과 유엔군은 인천상륙과 서울진격작전 동안 대체로 약 4천여 명의 병력 손실을 입었으며, 이에 비해 북한군 손실은 사살이 1만 4천여 명, 포로 7천여 명, 전차 손실 50여대에 달하였다. 이 작전이후 북한군은 공격능력이 소멸되고 저항능력마저 거의 상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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