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3일만에 능욕 당한 서울
3. 3일만에 능욕당한 서울
치밀한 사전 계획에 의거 남침을 개시한 북한군은 장단반도, 문산, 동두천, 춘천 그리고 강릉의 5개 방향으로 38선을 일거에 돌파하여 남으로 밀고 내려왔습니다. 2개 군단으로 구성된 20만의 북한군 선두에는 잘 훈련되고 준비도 완벽하게 마친 7개 사단(서에서 동으로 제6,1,4,3,2,7,5사단)이 도열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3개 보병연대와 1개 포병연대로 구성된 완편사단들이었고 더불어 제105전차여단 예하의 전차부대를 배속 받아 화력이 증강된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이들 바로 뒤에는 돌파구를 확대하면서 후속 진군할 2선부대로 6개 사단(서에서 동으로 제7,10,13,9,15,8사단)이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전쟁개시와 함께 북한군은 38선을 돌파하였습니다]
[전쟁초기 북한군의 공격축선 상황도]
반면 당시에 국군은 8개 사단(수도경비사령부 포함) 그리고 1개 독립연대로 구성된 총10만이었는데, 이중 4개 사단과 1개연대가 38선 일대를 경계하고 있었고(서에서 동으로 제17연대,제1,7,6,8사단) 나머지 사단들은 후방에서 공비 토벌 등의 임무를 수행 중이었습니다. 하지만 삼각편제 기준으로 완편 된 부대는 4개 부대밖에 없었고 이 또한 포병연대가 배속된 북한군과 달리 15문으로 구성된 포병대대밖에 없어 평면적으로 전력을 비교하기도 민망한 수준이었습니다. 때문에 겉으로 드러난 병력으로는 1:2 수준이었지만 화력을 계량화한다면 1:5수준으로 북한군이 압도적으로 국군을 앞서고 있었습니다.
더구나 앞서 알아보았던 것처럼 6월 24일 0시를 기해 국군은 그동안 전군에 내려졌던 비상경계령이 해제되면서 많은 병력이 휴가, 외출 등을 나와 있었던 관계로 개전 시점의 전력차이는 더욱 벌어져있던 상태였습니다. 예를 들어 동두천-포천으로 돌파하여 의정부를 거쳐 서울로 진군할 북한군 주공은 2개 사단(후속할 제13사단까지 포함하면 총 3개 사단)과 1개 전차여단으로 구성된 총 3만2,000명 수준이었는데 반하여 이를 방어할 국군 제7사단은 총 7,000여명의 병력 중 2,500여명이 휴가나 외출중이어서 4,500여명만 부대에 남아있을 뿐이었습니다. 병력으로도 7배였지만 화력은 무려 18배가 벌어진 엄청난 차이였습니다.
[개전이 되자 국군의 이동이 이루어졌으나 상황은 좋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전력차이 중에서도 이후 두고두고 국군에게 오래 동안 콤플렉스가 되었을 만큼 가장 위협을 주었고 또한 막아내기 힘들었던 것은 바로 전차였습니다. 자료마다 조금씩 차이가 나지만 개전 당시 북한군은 242대의 소련제 T-34전차를 남침의 전면에 내세웠습니다. T-34는 제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끈 당대 최고의 명품전차였는데, 그중에서도 소련이 북한에게 공급한 T-34는 85밀리미터 포를 장착하여 화력이 강화되고 장갑도 증가된 최신형이었습니다. 반면 이를 막아내기 위해 국군이 보유했던 장비는 2.36인치 로켓포와 57밀리미터 대전차포였습니다.
게다가 이들 대전차무기로 T-34의 장갑을 뚫을 수는 없었으며 더구나 대다수의 병사들이 전차를 북한군의 남침 당시 처음 보았을 만큼 구체적인 공격방법조차 모르던 상태였습니다. 비록 많은 용사들이 화염병이나 포탄을 직접 들고 특공작전을 벌여 전차의 진격을 막아내어 적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지만 대세를 바꿀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특히 북한군 주공이 엄청난 압력을 가하여 내려온 의정부축선은 제7사단의 허무한 붕괴와 함께 돌파당하며 개전 하루 만에 서울의 관문인 의정부가 북한군에 점령당하였습니다.
[서울로 입성한 북한군 T-34전차]
그런데 이런 전선의 위급함에도 불구하고 전쟁을 총지휘하여야 할 정부와 군 수뇌부는 갈피를 못 잡고 갈팡질팡하였고 어떻게든 서울을 방어하겠다는 조급증에 이끌려 후방에서 올라온 부대들을 축차적으로 전선에 투입하는 악수를 두어버렸습니다. 결국 뿔뿔이 쪼개져 후방에서 서울로 이동한 제2사단과 제5사단 예하부대들은 대오도 정비해보지도 못하고 모닥불에 뛰어드는 불나방처럼 차례차례 전선에 투입되면서 소진되어 버렸습니다. 비록 3개 사단을 쏟아 부으며 피로써 북한군의 진격을 막기 위해 애썼지만 개전 3일 만인 6월 28일 오전 11시 30분, 서울 시내전역이 북한군의 수중에 들어가는 치욕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2. 준비된 도발
제대로 된 준비도 없이 북한에게 침략을 당한 우리는 그 대가로 초반의 굴욕을 겪었지만 이점은 반대로 생각한다면 북한의 침략준비가 상당히 철저하였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6·25전쟁은 흔히 국지전이 국제전으로 확대된 것으로 보는 경향이 많지만 이는 잘못된 시각이고 시작부터 철저하게 한반도를 적화하겠다는 외세의 깊숙한 개입이 있었습니다. 1950년 당시 일제의 식민지를 갓 벗어난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가장 못사는 후진국이었고, 사실 이점은 풍부한 자원과 일제가 남긴 많은 기간시설을 보유한 북한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따라서 외세의 구체적인 지원이 없이 단지 도발하겠다는 의지만가지고 북한이 전쟁을 벌일 수 있는 여건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1950년 4월 소련을 방문 중인 김일성]
1949년 3월과 1950년 4월, 두 차례에 걸쳐 김일성은 직접 스탈린을 찾아가 남침 계획을 설명하고 지원을 요청하였습니다. 여기에 동의한 스탈린의 지시로 북한이 전쟁의 주도권을 행사할 만큼 충분한 다량의 전차, 야포, 전투기를 포함한 각종 전쟁 물자가 소련으로부터 북한에 공급되었고 이 때문에 전쟁 발발직전에 남북한 간의 전력비는 거의 1:5 수준까지 벌어졌습니다. 이와 더불어 김일성은 남침직전인 1950년 5월 13일, 중국의 마오쩌둥(毛澤東)을 찾아가 남침 동의를 구하고 필요한 군사지원도 약속받았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지원에 의하여 북한군이 외형적으로 증강된 것과는 별개로 쉽게 충당하기 힘들만큼 부족한 것이 있었는데 바로 전쟁경험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남침당시 20만 북한군을 이끈 총참모장 강건(姜健)만 하더라도 항일유격대를 거쳐 소련군에서 활약하였지만, 위관장교로 중대규모의 부대를 지휘한 경험만 있던 불과 33세의 젊은이였을 만큼 거대한 전쟁을 이끌만한 인적자원이 절대 부족하였습니다.
결국 김일성은 실질적으로 전쟁 지휘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인력지원을 요청하여 1950년 4월부터 6월 사이에 수십 명의 소련군 장교들이 고문단 명목으로 북한에 들어왔고 이들의 주도로 구체적인 남침계획이 수립되었습니다. 전쟁 당시 북한 총참모부 작전국장이었던 유성철(柳城鐵)의 증언에 따르면“원래 북한군 장교들이 작성한 작전계획이 있었으나, 군사고문단 소속인 포스트니코프 소장이 그것을 폐기한 후 새로운 작전계획을 만들었다”고 하였을 만큼 남침에 관한 소련의 개입은 실질적이고 구체적이었습니다.
[열차편으로 북한에 공급되는 T-34 전차의 모습]
소련 군사고문단은 동서간의 대립으로 서유럽에 긴장이 고조되던 당시의 국제여건상 미군이 신속하게 한반도의 전쟁에 개입하기는 힘들 것이고, 서울을 조기에 점령하면 남한 전역에서 동시에 민중봉기가 일어날 것이라는 북한 측의 설명을 염두에 두고 다음과 같이 구체적인 침략계획을 수립하였습니다.
주공은 서울을 북방에서 정면공격하고, 조공을 춘천-수원과 김포-영등포 방향으로 우회기동 시켜 38선 인근의 국군부대와 후방에서 올라올 예비사단들의 배후까지 동시에 차단시켜 일거에 궤멸시킨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해방 5주년이 되는 1950년 8월 15일에 한반도 전체를 무력으로 점령하여 전쟁을 종결한다는 목표를 가지고, 50일 동안 하루 10킬로미터씩 전진한다는 가정 하에 역으로 환산하여 그해 6월 25일을 개전일로 산정하였습니다.
[소련의 개입으로 작성된 선제타격계획도]
그만큼 그들은 자신만만하였고 충분히 달성 가능한 계획으로 생각하였습니다. 또한 북한은 불법남침을 합리화하기 위하여 소련 군사고문단의 도움으로 작성한 계획을 남한의 공격징후가 보이면 사전에 예방한다는 차원의 의미를 지닌‘선제타격계획’또는 남한의 공격 시 즉시 응전한다는‘반격계획’으로 그럴듯하게 포장하여 그들의 침략야욕을 숨겼고 계획대로 전쟁은 개시되었습니다. 가장 최후의 그리고 최악의 상황에서나 택할 수 있는 전쟁이라는 수단을, 그것도 같은 동족을 향해서 김일성과 소련은 이와 같이 아무런 거리낌 없이 쉽게 꺼내어 들었고 중국 또한 처음부터 함께하고 있었습니다.
그동안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6.25전쟁의 발발원인을 분석한 다양한 시각들이 나왔지만, 이처럼 무력으로 한반도를 적화하겠다는 김일성의 의지와 이를 후원한 스탈린의 결정 그리고 중국의 후원에 의해서 전쟁이 개시되었다는 사실보다 논리적으로 앞서는 어떠한 전쟁 발발의 사유를 발견할 수는 없습니다. 결국 우리 현대사 최대의 비극은 침략의 주인공이었던 김일성과 이를 후원한 외세의 합작품이었습니다.
1. 비극을 알린 신호 ‘폭풍’
1950년 6월 25일, 단지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위해 편의상 설정되었다가 어느덧 국경 아닌 국경으로 변한 38선 일대에 태풍 '엘시'의 영향으로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직 동트기 이전인 새벽 4시가 되면서 38선 일대에 배치된 북한군 각 부대에 암호명 '폭풍'이 하달되자 이미 남쪽을 향하여 조준을 완료하고 있던 모든 대포는 국군 진지를 향하여 일제히 불을 뿜기 시작하였습니다.
38선으로 남북이 분단된 이후 '송악산 전투'처럼 서로 좋은 위치를 차지하려는 국지적인 충돌이 많았기 때문에 그때까지만 해도 국군은 부지불식간 날아온 포탄의 의미를 정확히 몰랐습니다. 하지만 제한적인 공격이라 생각했던 최초의 생각이 오판임이 밝혀지는데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습니다. 북한은 서해의 끝 옹진반도에서 동해의 양양에 이르는 38선 전체에서 북한군은 동시에 포격을 가하였습니다. 포연이 걷혀가자 주요 축선으로 탱크를 앞세운 대규모의 북한군이 남하하는 모습이 관측되었습니다. 바로 현대사 최고의 비극인 6·25전쟁이 발발한 것이었습니다.
[포격을 가하는 북한군 포병]
침략을 당한 우리입장에서 6·25전쟁 최초의 모습은 기습이었지만 엄밀히 말하면 그것은 대비태세 부족과 그로인해 당했던 굴욕을 핑계로 삼기 위해 언급한 단어였을 뿐이었습니다. 분명히 38선에서 국지적인 도발은 계속되고 있었고 그로인해 비상경계령이 발령되었을 만큼 위험한 상황이라는 점을 감지하고 있었지만, 어처구니없게도 구체적인 대책을 세워놓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각종 정보에 의해 전쟁이 임박한 징후를 느끼고 있었으면서도 단지 경계기간이 길어지고 농번기가 되었다는 이유만으로 후속 대책도 없이 전쟁 발발 바로 전날 경계령을 해제하였을 만큼 당시의 군 수뇌부는 전쟁에 대한 준비가 부족하였습니다.
이에 반하여 북한은 소련으로부터 물자와 장비를 지원받고 체계적인 군사훈련도 완료하고, 남침 직전 국공내전에 참전하여 전투 경험이 풍부한 조선족으로 구성된 2개 사단을 중국으로부터 전환 받아 놓은 상태였습니다. 개전 2주전이 되었을 때 북한군은 전차, 야포, 함정, 항공기 등으로 중무장한 20여만의 병력을 38선 일대로 은밀히 이동시켜 배치하여 놓고 남침 명령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반면 비상경계령이 해제된 국군은 많은 병력이 외박이나 휴가를 떠나 불과 6만여 명만이 정상적인 근무중이였습니다. 더구나 중무장한 북한군과 달리 미국으로부터 전력증강을 제대로 받지 못해 국군은 제대로 된 장비조차 갖추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국군의 전신이 되는 창설 직후의 국방경비대]
분명히 개전직전 남북 간의 전력비는 일방적이라고 표현할 만큼 차이가 많은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개전 초에 있었던 굴욕적인 패배가 불가피한 것이었다고 무조건 설명하기는 곤란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관념적으로 알고 있는 것처럼 전쟁 초기에 국군이 오합지졸처럼 무조건 붕괴되었던 것만은 결코 아니었으며 경우에 따라 부족한 전력으로도 적에게 심각한 타격을 입히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개전 3일 만에 서울을 능욕 당하였다는 치욕이 너무 커서 그런지 6.25전쟁을 겪었던 세대조차 이런 사실을 제대로 모르고 있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각론적인 세세한 사실보다 중요한 것은 북한이 망설임 없이 동족을 향하여 총을 쏘면서 전쟁이 개시되었고 그것은 회복하기 힘든 엄청난 비극으로 역사에 남게 되었다는 사실 바로 그 자체입니다. 흔히 간과하는 사실이지만 3년 1개월 2일간 계속된 이 전쟁으로 무려 500만 명의 인명피해와 1천만 이산가족, 10만 명의 고아가 발생했는데 이는 당시 남북한 인구 3000만 명의 절반이 넘는 1800만 명이 전쟁으로 직간접적인 피해를 입었을 만큼 어마어마한 수준으로 우리민족이 오천년 역사 동안 겪었던 최악의 피해입니다.
[저 폐허가 불과 60년 전의 모습이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러한 비극의 역사가 불과 60년 전의 가까운 과거의 일이며, 휴전이라는 형태로 아직도 끝난 상태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 땅위에서 현재를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를 망각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역설적이지만 이러한 망각과 무관심은 60년 전에 발발한 참혹한 전쟁을 막지 못하였던 원인중 하나이기도 하였습니다. 결코 남의 땅에서 벌어진 남의 역사가 아닌 그리고 아픔을 잊지 말고 교훈을 반드시 기억하고 있어야 할 참혹하였던 우리 현대사 비극의 현장으로 이제부터 들어가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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