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의 항복을 처리하기 위해 연합국이
설정한 일본의 항복 접수 지역도
한민족은 유구한 역사를 통하여 공동의 언어와 문화적 전통을 지닌 통일 민족국가를 발전시켜 왔다. 그러나 19세기에 이르러 주변 강대국들이 근대 자본주의 국가로 탈바꿈하여 식민지 쟁탈전을 전개함으로써 한반도는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한반도는 동북아에서의 전략적 가치 때문에 주변국들에게 침략의 대상이 되어 왔다. 북쪽으로는 험준한 산맥과 하천으로 국경을 이루며 중국의 만주와 소련의 연해주와 접하고 있고, 동쪽으로는 동해를 사이에 두고 일본과, 그리고 서쪽으로는 황해 건너 중국대륙과 각각 인접하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그러므로 한반도는 대륙과 해양 세력의 이해가 상충하는 전략적 교차점에 해당되므로 항상 이들 주변국들의 각축장이 되어 왔다.
소련은 블라디보스톡에 해군기지를 설치하여 극동에서의 남진정책을 꾀하였고, 일본은 이른바 명치 왕정복고를 이룩한 다음 국제적 고립에서 벗어나기 위해 아시아 대륙으로의 영토 확장을 꾀하기 시작하였으며, 중국은 역사적으로 이어 온 한반도와의 관계를 지속시키기 위한 노력을 계속하고 있었다. 이로부터 시작된 중국· 일본· 소련간에 일어난 아시아에서의 주도권 쟁탈전은 누가 한반도에 더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느냐가 언제나 핵심적인 쟁점이 되어 왔다.
또한 제2차 세계대전이 종전이 된 후 한반도는 세계질서 재편과정에서 미·소를 양축으로 하는 동서 냉전구조 속에 다시 편입되었으며, 한반도의 38도선은 남·북한뿐만 아니라 극동의 자유 및 공산진영을 포함해 미국과 소련의 힘이 직접적으로 맞선 최첨단이 되었다. 그리하여 한반도의 갈등은 국제 냉전이 심화될수록 더욱 고조되어 갔다.
미국과 소련의 합의로 한반도가 남북으로 분단하게 된
북위 38도선의 경계선 푯말
한민족에게 암담하기만 하였던 주권 회복에 대한 꿈은 전쟁종결과 전후처리를 위한 카이로선언(1943.12.1), 그리고 이를 재확인한 포츠담선언 등으로 그 서광이 비치기 시작하였다. 결국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무조건항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끝을 맺게 되자, 한민족의 자주독립에 의한 새 역사의 꿈은 마침내 실현되는 듯하였다.
그러나 종전과 함께 표면화하기 시작한 미·소간의 견해 차이는 한국문제에 예기하지 않았던 암영을 던지고 있었다. 즉 1945년 추축국이 무너지자 전 세계의 많은 지역에서 힘의 공백상태가 조성되고, 독일과 일본의 통치로부터 해방된 국가들은 미·소의 이해관계가 상충되는 지역으로 변화하게 되었으며, 한반도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와 같은 불행의 요인은 얄타회담(1945.2.11)에서부터 일찍이 싹트기 시작하였다. 전후처리 문제를 협의하기 위한 미·영·소 3국 수뇌들의 모임이었던 이 회담에서, 스탈린은 대일참전을 약속하였고, 미·영 수뇌들은 스탈린에게 대일참전의 조건으로 극동에 있어서의 러일전쟁 이전에 누렸던 모든 권리의 회복을 약속하였던 것이다. 이는 결과적으로 동북아시아에 새로운 불안을 낳게 한 원인이 되었다.
1945년 8월 9일, 대일선전을 포고한 소련군은 만주와 한반도를 향하여 밀어닥치기 시작하였으며, 그 다음날인 8월 10일, 일본은 연합국측의 무조건 항복 권유를 수락하기에 이르렀다. 이때 미국은 한반도에 38도선을 설정하여 그 이북지역은 소련군이, 그 이남지역은 미군이 진주하여 각각 일본군의 항복과 무장해제를 담당하도록 하였다. 당시의 이러한 조치는 전후처리를 위한 순수한 군사적인 조치였으며, 한반도를 정치적으로 분단하기 위한 의도는 전혀 내포되지 않은 것이었다.
그러나 소련측의 의도는 그것이 아니었다. 만주와 한반도를 겨냥한 소련군은 진격을 계속하여 8월 13일에 청진에, 22일에 평양에 각각 도달하였으며 8월 말에는 이미 북한 전역을 장악하였다. 그들은 이미 38도선을 정치적인 구획선으로 인식하고 정치적인 행보를 걷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소련은 북한지역에서 진주를 완료하자, 경의선, 경원선을 비롯한 주요 남행 간선철도를 모두 폐쇄하여 38도선 이남지역으로의 교통 통신을 제한 내지는 봉쇄한 다음, 북한 전역의 공산화를 위한 제도개혁에 착수하였다. 1945년 10월 14일에는 김일성을 등장시키고, 이듬해 2월 8일에는 이른바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를 구성하도록 하여 소위 ‘확보된 지역에서의 사회주의 구축’ 작업에 들어갔다.
이에 반하여 미국은 38도선을 설정하여 소련군의 남진한계선을 정하기는 했으나, 당시 미군의 진주가 늦어짐에 따라 과도기적인 혼란이 가중되고 있었다. 뒤늦게, 9월 4일에야 하지(John R. Hodge) 중장 휘하의 미 제24군단 선견부대가 김포공항에 도착하고 그 주력이 인천에 상륙하였으며, 9월 7일에는 맥아더 미 극동군 총사령관이 남한에 대한 군정을 선포하였고, 아놀드(A. V. Arnold) 소장이 초대 군정장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한국에 대한 정책준비 없이 출범한 미국 군정은 시초부터 상당기간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남한의 혼란상은 광복과 더불어 조직된 수많은 군소정당의 난립으로 더욱 가속화되었다. 특히 좌익들로 구성된 건국동맹이 재빨리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하여 남한 정계의 장악과 조선공산당의 설립을 시도하고 있었다.
이렇듯 국토분단과 미·소의 상반된 점령정책으로 남북 간의 이질현상이 점차로 심화되는 가운데, 모스크바 3삼회의(1945.12.26)가 개최되어 한국 임시정부의 수립문제와 함께 일찍이 카이로선언 때 이미 미·영 양국 수뇌들간에 거론되었던 한국의 신탁통치협정 문제가 구체적으로 논의되기에 이르렀다.
한국을 5년 이상 4대 강국(미· 소· 영· 중)의 신탁통치하에 두기 위한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는 소식이 남한에 전파되자, 이를 반대하는 범국민적인 신탁통치 반대운동이 거세게 일기 시작하였다. 국민들의 분노에 찬 신탁통치 반대운동은 한때 당파와 정치이념을 초월한 거족적 운동이었으나 소련의 지령으로 그 태도를 돌변하게 된 좌익들이 그 이듬해(1946.1.2)부터 신탁통치를 찬성하고 나섬으로써 새로운 양상으로 변모하였다. 이와 같은 한국민들의 신탁통치에 대한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모스크바협정에 의거하여 설치된 미·소 공동위원회는 첫 회의(1946.3.20)와 두 번째 회의(1947.5.21)를 서울에서 개최하였다. 그러나 소련측이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인사와 정당은 협의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이유를 내세워 남한측 대표의 참석을 거부하는 모순된 주장만을 되풀이함으로써 그 회의는 결국 결렬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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