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위기에서 빛난 해군의 용전분투 |
[북한은 38선 돌파와 더불어 해상으로 상륙하여 아군의 배후를 차단하였습니다]
흔히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에 전쟁이 시작된 것으로 알고 있지만 엄밀히 말해 북한의 도발은 그보다 한 시간 전에 이미 개시되었습니다. 북한은 동해 축선을 담당하고 있던 국군 제8사단의 배후를 차단하기 위해 새벽 3시에 제549독립연대를 삼척에 그리고 제766유격연대를 안인진리 일대에 상륙시켰던 것이었습니다. 당연히 이들을 상륙시키는 데는 북한 해군의 역할이 컸는데 이러한 와중에 남북한 해군 간에 최초의 해전이 동해에서 벌어졌습니다.
새벽 5시 김상도(金相道) 소령이 지휘하는 YMS-509 경비정은 해군본부로부터의 긴급출동 명령에 따라 묵호항을 출발하여 북상하였는데, 아직까지는 전면전이 발발하였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던 상태는 아니었습니다. 북상하던 509정은 7시 20분경 옥계해상에 이르러 상륙군을 승선시키고 운항중인 북한 해군의 소형 포함(PGM)을 발견하고 즉시 교전이 벌였습니다. 상대적으로 속도가 느렸고 화력이 약했던 509정은 북한 포함에 최대한 접근하여 공격을 가하는데 성공하였고 50여 분간의 교전 끝에 북한함정을 북으로 패주시켜 해군 간에 벌어진 최초의 교전을 당당히 승전으로 기록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509정이 보인 놀라운 활약의 끝이 아니었습니다. 최초 교전 후 묵호항으로 귀환 후 긴급보수를 마친 509정은 급박한 전황 때문에 오전 9시 50분에 대강의 준비를 마치자마자 재 출동하였습니다. 오후 3시경 옥계북방 3마일 지점에서 상륙 중이던 북한군을 목격하고 신속히 접근하여 기습포격을 가함으로써 적 상륙정 1척을 격파하고, 발동선 1척을 나포하는 전과를 올림으로써 북한군의 상륙을 상당시간 지연시키는 혁혁한 전과를 올렸습니다. 하지만 이것도 우리 해군이 보여준 용전분투의 시작이었을 뿐이었고 대한민국을 구한 더 큰 해전이 부산인근에서 벌어졌습니다.
[하와이에서 포를 장착하는 백두산함]
개전 당일 12시경, 전면전 발발 소식을 접한 해군의 진해 통제부(統制府)사령관은 당시 우리 해군이 보유한 최대의 전투함인 PC-701백두산함에게 즉각 출동을 명령하였습니다. 백두산함은 1949년 변변한 함정이 한 척도 없음을 통탄한 초대 해군 참모총장 손원일(孫元一) 제독이하 해군 장병들이 봉급의 10%를 갹출하여 마련한 기금과 국민의 성금 및 국고의 지원으로 어렵게 장만한 함정이었습니다. 사실 함정이라고 명명하였지만 15명의 구매단이 미국으로 건너가 해양대학의 구형 실습선을 구입하여 직접 수리 및 도색을 한 후 진주만에서 구입한 미국 육군의 3인치 포를 장착한 450톤 규모의 소형 함정이었습니다. 하지만 미국을 떠나 태극기를 게양한 백두산함이 1950년 4월 10일 진해로 입항하였을 때 국민들이 감격의 눈물을 흘렸을 만큼 한국 해군 역사에 기념비적인 함정이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한국 해군의 자랑이 조국을 구하기 위해 출동한 것이었습니다.
진해기지를 출항, 동해안으로 이동 중이던 백두산함은 25일 18시경, 연기를 내뿜으며 남하하고 있던 미확인 선박을 발견하고 해상 발광신호(發光信號)로 국적과 선명을 밝히도록 명령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반응도 없이 남진을 계속하자 백두산함은 위험을 무릅쓰고 근접확인에 나서 괴선박의 정체가 약 600명의 상륙군을 탑승시킨 북한의 1,000톤급 무장수송선임을 확인하였습니다. 백두산함은 일단 현장에서 이탈한 후 통제부의 명령을 받아 26일 0시 10분경 북한 무장수송선의 좌현 3마일까지 접근한 후 공격을 개시하였고 북한군이 격렬히 대항함으로써 역사적인 대한해협전투가 시작되었습니다. 이 전투 결과 아군은 전사와 부상이 각각 2명인 피해를 입었지만 적선을 완파하여 침몰시키는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1950년 5월 22일 촬영된 백두산함 장병들]
당시 북한 무장수송선은 북한군을 부산일대에 상륙시켜 부산항을 점거하는 것이 주 임무였을 것으로 추측되는데, 만일 그렇게 되었다면 위기에 처한 대한민국의 유일한 생명선이 조기에 차단될 수도 있었던 아찔한 순간이었고 백두산함은 그러한 절체절명의 위기로부터 대한민국을 구한 것이었습니다. 비록 6.25전쟁 당시에, 국군과 북한군 모두 해군의 전력이 작았던 관계로 전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그리 커 보이지 않지만 이처럼 전쟁 초기에 바다에서도 숨 막히는 위기의 순간은 있었고 이 때 보여 준 아군의 승리가 가진 의의는 그만큼 컸습니다.
6. 서울에서 지체한 북한군
상식과 전혀 반대로 엉뚱한 일이 발생하였을 경우, 이를 흔히 미스터리라고 하는데 가장 극한 상황의 총합이라 할 수 있는 전쟁터에서 이런 모습은 의외로 흔하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6.25전쟁 또한 그 과정을 살펴보면 지금까지 두고두고 회자되는 많은 미스터리가 있는데 그중 하나가 개전 초에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한 후에도 공격하지 계속하지 않고 3일간이나 지체하였던 일이었습니다. 분명히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하였을 때 중동부전선에서 선전한 국군 제6사단 외에 전선의 상황은 상당히 비관적이었는데, 바로 이때 북한군 주력이 진격을 멈추고 서울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북한군의 서울 점령을 상징하는 중앙청에 게양된 인공기]
수많은 민간인의 희생과 아군 주력을 고립시키면서까지 시도된 한강교 폭파 때문에 그런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한강에는 인도교(현 한강대교 구교)와 3개의 철교가 있었는데 2개의 철교가 폭파에 실패하여 그대로 남아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북한군은 물론 국군에게 극심한 공포를 불러일으키며 남침의 선봉장 노릇을 하던 전차들까지 마음만 먹었다면 신속하게 한강을 건너 패주하고 있던 국군을 추격을 계속할 수 있었었습니다. 만일 이때 북한군의 진격이 쉬지 않고 계속되었다면 국군은 상당히 어려운 상황에 이르게 될 가능성이 컸습니다.
사실 북한 스스로 이에 대하여 명쾌하게 밝힌 자료가 없기 때문에 추측만 있고 이것이 미스터리가 되어버렸지만, 그러한 이유 중 하나로 당시에 북한이 정세를 크게 오판하고 있었다는 점이 거론되고 있습니다. 남침계획 수립당시 북한의 전쟁지도부는 “서울을 점령하면 남한 전 지역에서 남로당원이 봉기하여 이승만 정부가 순식간 붕괴될 것이다”라고 생각하였습니다. 하지만 6월말까지도 민중 봉기는 일어나지 않았고 이것은 전후에 김일성이 박헌영을 비롯한 남로당 세력을 숙청 할 때 구실로 삼기도 하였습니다.
[폭파되지 않은 한강 철교를 6월 30일 미군기가 폭격하는 모습 ]
하지만 무엇보다도 북한군이 3일간 서울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던 가장 큰 이유는 앞서 알아본 바와 같이 북한의 초기 계획을 완전히 망쳐버린 국군 제6사단의 대승과 김포축선을 방어했던 김포지구전투사령부의 분전 때문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의정부 축선을 돌파하여 서울을 선점한 북한군 제3, 4사단의 좌우익 상황이 지지부진하자 더 이상 단독으로 앞서 나가기 힘들었던 것으로 볼수 있습니다. 결국 이러한 북한군의 지체를 틈타 육군본부는 한강선 방어를 위해 임시로 시흥지구전투사령부를 편성했고 삼삼오오 한강을 도하해오는 철수병력을 재편성하여 6월 29일에는 간신히 한강방어선이 형성할 수 있었습니다.
서울을 점령한 후 3일간을 지체했던 북한군은 그들이 뭔가 잘못하고 있는 사실을 깨닫고, 더불어 미국 지상군의 조기 참전가능성이 대두되자 6월 30일 밤부터 한강방어선을 돌파하는데 전 역량을 집중하게 되었습니다. 한강을 마주보고 치열한 공격과 방어가 이어지고 난 후인 7월 1일 04시, 철교를 이용하여 4대의 적 전차들이 강을 건너고 후속하여 북한군 주력이 영등포까지 진출하자 그동안 아군이 필사적으로 막아내던 한강 방어선이 붕괴되기 시작하면서 국군은 7월 3일, 경부축선을 따라 남으로 후퇴하게 되었습니다.
[한강철교를 이용하여 강을 건너는 북한군 전차]
필사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한강 방어선은 붕괴되었지만 국군과 북한군이 한강을 사이에 놓고 대치했던 6월 29일부터 7월 3일까지의 5일간은 전쟁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비록 그러한 시간이 미스터리로 남아있지만 한강교 폭파로 인해 적진에 고립되며 붕괴되었던 국군 주력 부대들이 천금같은 5일간의 시간을 이용해 부대를 수습하고 재편성하여 지연전을 전개할 수 있었으며, 그 시간 동안 미군이 증원되어 참전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5. 수뇌부의 무능 그리고 한강교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대한민국의 심장은 서울이었고 북한이 이곳을 최우선 목표로 정하여 주력을 집중시킨 것은 너무나 당연하였고, 같은 이유 때문에 국군은 이를 결사적으로 지키려 하였습니다. 10만의 국군을 이끌던 참모총장 채병덕(蔡秉德) 소장은 26일 오전까지만 해도 “서울 사수를 위해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의정부를 지켜야 한다”며 예하 부대를 독려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의지와 상관없이 당시 육군 수뇌부가 보여준 모습은 무능 그 자체였습니다.
[전쟁 발발 직전인 1950년 6월초에 촬영된 서울전경]
수도방위를 위해 공비토벌 임무를 담당하고 있던 후방의 사단들을 급거 서울로 이동시킨 것은 굳이 작전이라 할 사항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귀중한 자원을 어떻게 방어전에 투입하여야 좋은 효과를 얻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 군 수뇌부는 전혀 준비가 없었습니다. 채 총장은 단지 무너지고 있던 전선을 어떻게든 틀어막겠다는 생각에만 매몰되어 후방부대들이 도착하는 순서대로 즉시 의정부지역에 투입하도록 명령했는데, 이것은 마치 방화선을 구축하여 근본적으로 산불을 잡을 생각을 하지 않고 단지 물 한 양동이씩 준비되는 대로 거센 산불을 향해 뿌려대기만 하는 것과 같은 행동이었습니다.
결국 이러한 예비 병력의 축차투입(逐次投入)은 단순히 의정부 방어의 실패로 그치지 않고, ‘서울 함락과 국군 주력의 소진(消盡)’이라는 비극적인 사태를 야기하였습니다. 6월 27일 10시에 창동방어선이 무너지자 북한군의 서울 진입은 시간문제가 되었는데 그때 그 순간까지 정부는 단지 국민의 동요를 막겠다는 단순한 생각만으로 ‘국군이 북한군을 물리치고 있다’고 상황을 오도하기에만 급급하였습니다. 정작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한 위정자들은 이미 그날 새벽 03시에 150만의 서울 시민을 적의 군홧발 아래 남겨두고 서울을 빠져 나갔습니다.
[개전 초의 무능으로 인하여 많은 비판을 받는 채병덕 참모총장]
그러자 단지 위정자들이 서울을 비웠다는 이유만으로 채 총장은 그때까지 주장해오던 서울 사수 결심을 번복하기에 이르렀고 육군본부를 시흥으로 이동하여 한강을 방어선 삼아 저항하겠다고 천명했으나, 막상 한강 이북에서 고군분투 하던 부대들의 효과적인 철수 문제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대책이 없었습니다. 의정부축선으로 남침한 북한군은 제3사단과 제4사단, 그리고 105전차여단 예하의 전차 2개 대대였는데 반하여, 이를 막기 위해 포진되어 있던 아군은 제7사단과 후방에서 긴급 전개한 제2, 5사단 그리고 수도경비사령부의 4개 사단이었습니다. 비록 화력에서 절대열세였지만 당시 미아리고개를 경계로 하여 대치중인 피아간의 병력규모는 이처럼 얼추 비슷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안심하고 시가전을 펼칠 수 있도록 조치한다던지 아니면 안전하게 한강 이남으로 빼어내어 새롭게 방어선을 구축하려는 계획이 없었습니다. 단지 위정자들을 쫓아 군 수뇌부만 안전지대로 내려왔던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무책임한 지휘의 절정이 6월 28일 02시 30분에 벌어진 한강 인도교와 철교를 폭파하는 작전이었는데, 아무런 통제나 대피도 없이 작전이 감행되어 피난민을 포함한 약 800명의 무고한 국민이 희생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시간에 단지 2대의 T-34만이 미아리를 넘었을 뿐이었고 아군의 대다수 주력부대는 아직도 한강 이북에서 고군분투 중이었습니다.
[점령된 서울은 무자비한 폭력의 현장으로 바뀌었습니다]
이때 한강 이북에서 작전하고 있던 부대는 제1, 2, 5, 7, 수도경비사령부였는데 한강교 폭파로 말미암아 이들 육군 주력부대들의 철수로가 자동적으로 차단되었습니다. 따라서 국군은 야포, 박격포, 차량 등 주요장비를 폐기하고, 소총만을 휴대한 채로 나룻배를 이용하여 소부대 단위로 도하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마디로 서울을 포기하고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하겠다면서 개념 없이 저지른 작전이 결론적으로 주력을 사지에 내팽겨 치고 수뇌부만 이동한 어처구니없는 행위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국군의 부대편제는 완전히 무너지고, 병력 숫자도 개전 당시 10만여 명이 2만5천여 명으로 급감 했습니다.
안전하게 피난갈 수도 있었던 최소한의 기회마저 박탈당한 수많은 시민들이 남겨진 서울에서 벌어진 일은 바로 비극 그 자체였습니다. 동족의 가슴에 총칼을 들이대며 서울을 접수한 북한이 새 세계를 열겠다며 자행하였던 일은 반공인사 살해 같은 피의 학살극이었고 이것은 이후 오래 동안 동족 간에 씻기 힘든 상처와 증오로 남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비극을 초래하는데 전쟁에 대비하지 못한 당시의 위정자와 수뇌부들의 책임도 컸다는 사실은 분명히 집고 넘어가야할 역사의 교훈입니다.
4.대한민국을 구한 춘천대첩
북한군 제1군단이 서울을 점령하는 것과 더불어 북한의 또 다른 주요 침공루트는 중동부전선의 춘천일대였습니다. 이곳을 담당한 북한군 제2군단은 춘천과 인제 방향에서 동시에 38선을 돌파하여 홍천을 거쳐 수원까지 최단시간 내 남진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습니다. 만일 그들의 계획대로 남침이 진행된다면 국군 주력의 대부분은 적의 대포위망 한가운데 갇혀 일거에 괴멸될 수도 있는 엄청난 타격전략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위기상황에서 중동부전선을 담당한 국군 제6사단은 북한의 진격을 신속히 저지하며 대한민국을 풍전등화의 위기에서 구해내는 엄청난 대승을 이끌었습니다. 북한의 야심만만했던 남침전략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곳에서 커다란 벽에 부딪치게 된 것입니다.
[북한군은 일거에 국군 주력을 포위하여 격멸하려 하였습니다]
전쟁전 국군 제6사단은 84킬로미터에 이르는 38선 중동부의 넓은 지역을 방어하고 있었습니다. 예하부대인 제7연대가 춘천, 제2연대가 홍천 북동쪽 그리고 원주에는 사단 예비인 제19연대가 각각 나뉘어 주둔하고 있었는데 총 병력은 9,000명이었습니다. 반면 북한군 2군단은 3개 사단(제2,7,15사단)과 동부전선임에도 30여대의 자주포를 보유한 총 3만 5천명 수준이었습니다. 여타 전선처럼 표면적으로도 북한군은 국군을 압도하고 있었는데 화력까지 계량화한다면 거의 1:5 수준까지 전력이 벌어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전쟁 발발직전 국군에게 내려진 경계령 해제와 발맞추어 많은 병력들이 휴가와 외박을 나간 여타부대와 달리 제6사단은 위기를 인식하고 있었던 사단장 김종오(金鍾五) 대령의 통제에 의해 휴가는 물론 외출과 외박이 제한되어 경계태세를 계속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자체적으로 취득한 첩보에 따라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깨달은 사단장은 진지를 보강하고 포병대대를 적의 예상 접근로에 배치하는 등의 조치를 취하였는데, 이 같은 철저한 준비태세는 겉으로 들어난 표면적인 전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적의 전면적인 공격이 시작되었을 때 청성부대가 선전할 수 있던 이유가 되었습니다.
[군기가 확립된 국군 제6사단(1949년 예하 7연대 검열 모습 )]
개전 초에 춘천을 침공한 북한군 제2사단은 불과 2시간 만에 화천과 춘천을 연결하는 요충지인 모진교(母津橋)를 점령하면서 제7연대를 밀어붙여 서전을 장식하였으나 사실 그것이 끝이었습니다. 후방에서 올라온 제19연대의 증원과 제16포병대대의 지원을 받은 제7연대는 소양강을 방어막 삼아 협로에 북한군이 진입하기를 기다린 후 기회를 포착하여 맹공을 가하여 반격을 개시하였고 이후 효과적인 지연전을 펼친 끝에 북한군 제2사단 전력의 40퍼센트를 무력화시켜 버렸습니다. 그 과정에서 대전차포중대 제2소대장 심일(沈鎰) 소위는 옥산포 주변 도로에서 적의 자주포를 격파하기도 했는데 이러한 전과로 그는 국군 창군 이래 최초로 태극무공 훈장을 수여받았습니다.
더불어 사단 우익을 담당한 홍천 북방의 제2연대도 북한군 제7사단의 공격에 대항해 격렬한 공방전을 펼쳤는데 순차적으로 매복, 역습을 실시하며 북한군을 혼란에 빠뜨려 버렸습니다. 그 백미가 6월 27일 말고개 일대에서 11명의 특공조가 육탄으로 공격해 북한군의 Su-76자주포 10여문을 파괴 노획하는 놀라운 전과를 올린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모든 전선이 밀려나고 있던 개전 초에 청성부대가 보여준 용전분투로 인하여 북한군 제2군단은 개전 하자마자 그 기능이 상실되다시피 하였습니다. 이런 예기치 못한 상황에 분노한 김일성은 군단장 김광협과 제2사단장 이청송을 해임하고 사단장 최충국이 전사한 제7사단을 해체시켜 제12사단으로 개편하여 버렸습니다.
[말고개 전투에서 노획한 Su-76 자주포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은 육탄 11용사들]
하지만 청성부대는 이러한 기분 좋은 승리의 와중에 육군본부와 통신이 재개되면서 서울이 함락직전임을 인지하게 되었고, 전선의 단절과 부대의 고립을 막고자 더 이상 공세를 유지하고 않고 원주를 거쳐 충주로 전략적으로 후퇴를 하면서 자랑스러운 대첩을 마무리 지었습니다. 이처럼 국군 제6사단의 성공적인 춘천 및 홍천 전투는“서울의 동남방으로 진출하여 국군의 주력을 포위 격멸한다”라는 북한의 원대한 계획을 수포로 만들었고 이것은 대한민국을 위기에서 구한 결정타로 작용하였습니다.
춘천에서의 대승리와 더불어 놀라운 분전이 사실 38선 곳곳에서 벌어졌습니다. 강릉을 방어하던 국군 제8사단은 후방이 차단당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추격하는 북한군 제5사단에게 출혈을 가하면서 부대편제를 유지한 상태로 대관령을 넘어 안전하게 후퇴할 수 있었고, 김포방어를 위해 급편 된 ‘김포지구전투사령부’의 살신성인적인 분투는 북한군 제6사단의 김포반도 진출을 지연시켜 서부전선의 국군잔여 부대가 경수축선을 따라 후퇴할 수 있는 퇴로를 확보되었습니다. 서부전선의 몰락, 특히 서울을 3일 만에 적에게 빼앗기게 된 의정부 축선의 붕괴가 워낙 극심하였고 또한 이런 사실이 너무 부각되어서 그렇지 이처럼 우리의 선배들은 열악한 전력에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하여 적의 남침을 막아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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