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예상보다 빨랐던 미국의 참전
북한이 남침 계획을 세웠을 때 고려하던 여러 변수 중, 가장 중요하였던 것이 미국이었습니다. 북한과 남침 세부안을 작성한 소련은 설령 미국의 대응이 있더라도 군사적인 개입은 상당히 늦을 것이라 판단하였고 그사이에 한반도 전체를 군사적으로 점령하면 된다고 낙관적으로 생각하였습니다. 더구나 1950년 1월 12일, 애치슨(Dean G. Acheson) 당시 미 국무장관이 미국의 태평양방위선에서 한국과 대만을 제외하여 놓은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미국의 6.25전쟁 참전은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하였을 만큼 즉각적이었는데 그 중심에는 대통령 트루먼(Harry S. Truman)이 있었습니다.
[미국의 즉각적인 참전을 결정한 트루먼]
6월 25일 11시 04분(이하 한국 시간), UP통신의 보도로 6·25전쟁 발발소식이 미국 전역에 전해졌고 이어서 무쵸(John J. Mucio) 주한미국대사의 보고가 국무성에 도착하자 미주리의 별장에서 휴가를 보내던 트루먼은 UN안전보장이사회를 소집하도록 지시하고 비행기 편으로 즉시 귀환하였습니다. 그때 트루먼은 워싱턴으로 돌아가는 3시간 동안 비행기에서 대처방안을 골똘히 구상한 후 중대한 결정을 내렸는데, 그것은 오늘날 대한민국이 존속하도록 결정한 가장 극적인 판단이 되었습니다.
“북한의 전면남침은 소련이 미국에 대해 시험을 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번의 침략을 방치한다면 공산당의 마수는 아시아 전역으로 미치게 되고, 나아가 제3차 세계대전이 유발될 것이다. 따라서 한국을 지켜내는데 미국이 적극 나서야 한다.”
이러한 대통령의 결심과 별개로 미국 합동참모본부는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맥아더 극동군사령관에게 주한 미국인 소개를 위한 제한적 군사조치를 하달하였고 26일부터 29일까지 전원을 일본으로 철수시키는데 성공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서울 상공에 출현한 북한군 YAK기를 미 공군이 격추함으로써 한반도에서 최초로 미국과 북한간의 교전이 벌어졌지만 이것은 미국의 참전에 따른 교전이라기보다 우발적 충돌이었습니다.
[북한의 도발을 불법으로 규정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6월 27일 11시, 백악관에서 열린 제2차 안보회의에서 미 해‧공군의 참전을 결정되었고 지상군 참전에 관한 최종 판단은 맥아더 원수에게 맡겨졌습니다. 이러한 조치에 따라 6월 29일에 맥아더는 한국으로 날아와 한강방어선을 직접 시찰하고 난 후 지상군 투입의 당위성을 6월 30일 03시, 트루먼 대통령에게 건의하였고 대통령의 허가가 나자마자 미군의 본격적인 개입이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이때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미 제24사단에게 출동 명령이 하달되고 그 선발대로 선정된 스미스 특수임무부대(Task Force Smiths)가 7월 1일 부산에 상륙하게 됨으로써 전쟁은 북한군과 한‧미 연합군간의 전쟁으로 성격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더불어 6월 26일 04시, 긴급 소집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북한군의 적대행위 즉각 중지와 38선 이북으로 복귀 요구, 이를 시행하기 위한 회원 각국의 협조 및 북한에 대한 원조 금지를 요구하는 결의문”이 채택되었고 이어서 6월 28일 북한을 침략자로 규정함과 동시에 회원국들에게 “한국을 도와 무력공격을 격퇴할 것을 권고”하는 결의안이 일사천리로 채택되었습니다.
[유엔군 깃발을 전달받는 맥아더]
7월 7일 개최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유엔군사령부 설치에 대한 결의안이 채택되면서 유엔 역사상 최초로 유엔군사령부가 창설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맥아더 원수가 초대 유엔군사령관으로 임명되었고 7월 14일 이승만 대통령이 국군의 작전 지휘권을 이양함으로써 한반도에서 대한민국을 구하기 위해 북한군과 싸우는 아군은 유엔군의 깃발아래 하나가 되었습니다.
최근에는 찾아보기 힘들만큼 신속하였던 미국과 국제사회의 이러한 대처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하였던 대한민국에게는 커다란 힘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국제사회의 지원에 용기를 얻은 국군은 후퇴와중에도 부대를 재건하면서 전선을 재정비하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비록 지금 당장 전세를 회복할 수 있던 상태는 아니었지만 대한민국은 결코 혼자가 아니었던 것이었습니다.
9. 침략자의 실책
3일 만에 서울이 적에게 점령당하였다는 사실은 개전 초기의 주도권을 북한이 확실히 잡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반면 이것은 우리에게 더 할 수 없는 치욕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전략적으로 서울을 확보하였다는 점을 빼놓고 단지 전투의 측면에서 살펴 볼 때 서울 점령이 북한에게 그리 만족할만한 전과를 올려주지 못했음은 이후 여러 자료를 통해 밝혀지게 되었습니다.
[서울 점령 당시에 선전수단으로 이용된 전차]
우선 북한군의 전차부대 운용술이 미흡하였다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흔히 북한 전차에 밀려 국군이 눈물을 흘리며 일방적으로 밀려났다고 생각하고 있는 경향이 많고 그런 점도 있었지만, 사실 북한군도 그들의 승리를 이끌어 준 전차부대를 효과적으로 운용하지는 못하였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이른바 천혜의 교통로인 경원축선에서 벌어진 실책이었습니다. 북한은 서울을 공격할 주 공격로로 경원축선의 동두천-의정부 도로와 포천-퇴계원 도로, 두개를 선정하고 제105전차여단 예하의 전차연대를 각각 배치하여 놓았습니다.
그런데 전쟁 전에 포천-퇴계원의 도로상으로 전차가 기동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으나 실제로는 이 지역은 탱크가 다니지 못할 정도로 험한 지형이었습니다. 결국 105전차여단 예하 109전차연대는 서파까지 진입했다가 다시 포천으로 역행군을 해야만 했는데, 이것은 단순히 포천-퇴계원간 도로를 이용할 수 없게 되었다는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의정부-창동의 좁은 통로에 2개의 보병사단과 2개의 전차연대가 몰리면서 교통체증을 겪었고 이로 인하여 북한의 전차부대는 오도 가도 못하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 북한군은 6월 26일 13시에 이미 의정부를 점령하고도 미아리 방어선까지 15킬로미터를 더 진출하는데 무려 35시간이나 소모하게 되었고 이로 인하여 서울 점령이 최소한 하루 이상 늦춰지게 되었습니다.
[북한군 제105전차여단 소속 T-34]
하지만 가장 큰 미스터리는 6편에서 언급한 것처럼 가장 중요한 시기에 북한군 주력인 북한 제1군단이 서울에서 3일간을 지체한 사실입니다. 이 문제를 설명하기 위해 지금까지 수많은 가설이 제시되었는데, 애당초 한강 이남에서의 작전계획이 없었다는 주장부터 남한의 민중봉기를 기다렸다는 설, 심지어 북한이 자축연을 벌이면서 아무 생각 없이 3일간을 허비했다는 설까지 다양합니다. 더구나 북한의 서울 점령 직후까지만 하더라도 폭파에 실패한 한강철교도 남아있어서 도강의지만 있었다면 한강을 건너는데 그리 큰 문제는 없었고 이미 북한군 제6사단은 한강하구를 건너 김포반도에서 영등포로 향하고 있던 중이기도 하였습니다. 당연히 북한 제6사단이 국군의 배후를 위협하는 동안 한강을 건너 진격을 계속하여야 함에도 그러하지 않았던 것이었습니다.
사실 전쟁 전 소련 고문단이 수립한 작전계획에 따르면 서울의 점령보다 서울 일대에서 국군의 주력을 포착 섬멸하는 것이 개전 초 작전의 주목적이었는데 북한군의 서울 지체는 이런 계획 자체가 실패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엄밀히 말해 북한이 한강을 도강하지 않았다고 보는 것보다, 도강 할 수 없었다고 해석하는 것이 맞을 듯합니다. 그렇게 된 데는 중동부 전선에서 북한 제2군단의 남진을 저지한 국군 제6사단의 용전과 김포반도에서 급조된 병력으로 긴박하게 방어전을 펼치면서 북한군 제6사단의 남하를 막았던 김포지구전투사령부 분투가 결정적인 요인이었고 이로 인하여 북한의 대 포위 섬멸전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북한의 실책이면에는 국군의 투혼이 있었습니다.]
이유야 어떻든 북한이 겉으로 드러난 승리 이면에 숨어있던 실책이 있었고 이것은 국군이 낙동강까지 지연전을 수행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확보하는 하나의 요인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북한이 이런 실책을 범하게 된 데는 단지 그들의 착오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중과부적임에도 불구하고 살신성인의 정신을 발휘하여 침략자를 피로 막아낸 국군의 놀라운 투혼이 있었기에 그런 역사가 이루어졌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비극의 1950년 6월은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8. 맨 주먹으로 막아낸 하늘
8. 맨주먹으로 막아낸 하늘
지금까지 알아본 바와 같이 6.25전쟁 개전 당시에 남북한 간의 전력은 많이 벌어져 있었고, 이런 차이는 개전 초에 국군이 북한군에 밀리게 된 결정적인 이유였습니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공군은 경우는 일방적이었다고 표현할 수 있을 만큼 격차가 컸습니다. 당시에 북한군은 200여기의 각종 항공기를 보유하고 있었지만 국군은 일명 건국기(建國機)라고 불린 T-6 훈련기 9기를 포함한 20여기의 항공기를 보유하였지만 전투기는 단 1기도 없었습니다. 따라서 전쟁이 발발하자마자 북한이 제공권을 장악한 것은 어쩌면 너무도 자연스러운 현상이었습니다.
[국민의 성금으로 구입한 T-6 건국기]
6월 25일, 북한 지상군이 공격을 시작한지 6시간 후인 10시경이 되자 북한군의 IL-10 전투기가 서울상공에 출현하여 정찰 활동을 시작하였고, 12시경에는 YAK기 4기가 용산 상공에 나타나 용산역, 서울공작창, 통신소, 육운국 청사 등에 기총소사와 함께 폭탄을 투하하면서 6.25전쟁 최초의 공습을 단행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날 오후인 16시경에는 5기의 YAK기가 김포와 여의도 비행장을 공습하였는데, 이때 국군의 T-6연습기 1기가 파손되었고 한국에 체류하던 미국인을 소개시키기 위해 김포 비행장에 긴급 투입되어 있던 미 공군 소속의 C-54수송기 1기가 격파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북한 공군의 공격을 하늘에서 막을 방법이 국군에게는 없었습니다.
이처럼 공대공 전투를 벌일 전투기가 없어서 개전 즉시 제공권을 북한 공군에게 내줄 수 박에 없었지만 그렇다고 한국 공군이 가만히 있지는 않았습니다. 비록 전투기능이 없는 훈련기들 밖에 없었지만 한국 공군은 이들을 출동시켜 전선을 정찰함과 동시에 육군 작전을 육탄으로 지원했습니다. 조종석 밖으로 손을 내밀어 폭탄 274개와 수류탄 500개를 북한군 행렬에 투하하는 그야말로 처절한 작전을 전개하였던 것이었습니다. 지상에서처럼 맨주먹으로 근근이 적의 공격을 막아내었던 것이었습니다.
[북한 공군의 활약은 3일 천하(파괴된 북한의 IL-10)]
하지만 이와 같이 일방적이었던 북한 공군의 우세는 삼일천하로 끝나게 되었습니다. 비록 국군의 전력이 갑자기 커져서 북한 공군을 막아내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미군의 조기 참전 결과였습니다. 육군이나 해군과 비교해 신속한 이동과 전개가 가능한 미 공군이 한반도로 긴급 투입되면서 곧바로 아군이 제공권을 장악하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개전 4일 경과하였을 때 38선 이남에서 북한 공군기들은 더 이상 활동할 수 없었고 오히려 38선 이북의 북한 후방에 위치한 공군기지는 물론 적의 요충지가 공습을 받기에 이르렀습니다.
비록 지상에서는 아군이 일방적으로 밀려 후퇴하고 있던 6월 29일의 경우만 보아도 미 제5공군 제3폭격비행단 소속 B-26 경폭격기 18기가 적의 심장인 평양을 폭격하였을 정도였습니다. 이 같은 적극적인 작전으로 미 공군은 8월 10일까지 북한 공군을 완전 무력화시켰고 이를 바탕으로 자유롭게 후방차단과 근접항공지원(CAS)에 돌입할 수 있었습니다.
이와 더불어 6월 27일, 한국 공군은 미 극동 공군의 협조로 조종사 10명을 선발하여 일본 주둔 미 공군 기지에서 단 며칠간의 훈련을 받고, F-51전투기 10기를 인수해 대구기지로 귀환했는데 이때부터 한국공군도 전투기를 운용하게 되었고 7월 3일부터 한·미 공군의 연합작전이 시작되었습니다. 개전 초에 일방적이었을 만큼 많은 전력차이가 있었지만 우리 공군은 이를 두려워하지 않고 전선으로 달려 나갔고 그러한 용기는 도움을 받아 곧바로 힘으로 승화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승화된 힘은 대한민국을 위기에서 구한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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