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미 24사단의 굴욕
국토가 38선으로 분단되면서 본의 아니게 대한민국의 역외 영토가 된 지역이 있었는데 바로 옹진반도였습니다. 전쟁 직전 이곳을 담당하던 부대가 독립 제17연대였는데 무려 10배의 전력을 가진 북한군의 공격으로 개전 이틀 만에 이곳을 완전히 포기하고 해상으로 후퇴하였습니다. 사실 6·25전쟁 초기에 모든 아군 부대가 후퇴를 하였지만 개전 당일 당시 신성모(申性模) 국방부장관의 후퇴 지시가 내려왔을 만큼 이곳을 사수할만한 전략적 가치는 사실 없었습니다. 비록 마지막 철수선에서 장병들은 비통의 눈물을 흘리며 옹진반도를 바라보았지만 당시의 상황으로는 그것이 최선이었습니다.
[전쟁 전 옹진반도의 제17연대를 위문 방문한 여학생]
전력을 보존한 채 해상 철수에 성공한 제17연대는 새롭게 창설된 국군 제1군단에 배속되어 청주지역에서 적의 공격을 막아내었습니다. 그러던 7월 중순, 중부 전선에서 부산을 향하여 남진하고 있던 북한군은 험준한 소백산맥을 돌파하기 위하여 안간힘을 쓰고 있었습니다. 특히 북한군은 개전 이래 그들에게 계속하여 치욕을 안겨준 국군 제6사단이 방어하고 있던 충주-문경-상주 축선을 돌파기 위해 2개 사단을 집중하였습니다. 비록 제6사단이 선방하고 있었지만 병력증원이 절실히 요구된 중부전선의 위기였습니다.
다급한 상황을 직감한 육군본부는 제17연대를 제2군단으로 배속전환하고, 상주 북방의 함창으로 이동할 것을 명령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제17연대는 제1대대를 선발대로 하여 7월 17일 04시에 대대별로 출발을 개시하였습니다. 청주를 출발한 제1대대는 보은을 거쳐 충청북도와 경상북도의 경계선 부근인 상주의 화령장을 통과하는 도중 시골 노인으로부터 어젯밤 북한군이 이곳을 지나 상주 쪽으로 갔다는 첩보를 입수하게 되었습니다.
[교육 훈련 중인 북한군 보병]
화령장은 산간의 협로였지만, 소백산맥을 통과하여 보은에서 상주에 이르는 도로와 괴산에서 상주를 연결하는 도로가 합류하는 교통의 요충지였습니다. 하지만 전력이 부족하였던 국군은 이곳에 방어선을 구축하지 못하였고 이점을 간파한 북한군은 이 곳으로 북한군 제15사단을 투입하여 공격을 감행하였던 것이었습니다. 제1대대장 이관수 소령은 정찰대를 파견하여 때마침 그 곳을 지나가던 북한군 전령 1명을 생포하여 북한군 1개 대대가 어제 밤 이곳을 통과해 상주로 진출했으며, 본대인 제48연대가 후속할 예정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대대장은 북한군 사이에 끼여 상주 쪽으로 행군할 것이 아니라, 상곡리에 매복하여 북한군 제48연대 본대를 기습할 것을 결심하고, 7월 17일 15시경까지 전투준비를 완료한 후 북한군의 접근을 기다렸습니다.
이윽고 16시경, 제1대대가 매복중인 상곡리에 북한군의 행군대열이 나타났는데 그들은 선발대대가 아무 일 없이 지나갔던 관계로 경계를 풀고 저녁 식사를 준비했습니다. 바로 그때 제1대대의 모든 화기는 일제히 불을 뿜었고 1시간의 공격 끝에 북한군 제48연대는 붕궤되어 버렸습니다. 이 전투로 제1대대는 250명의 적을 사살하고 30명의 포로를 잡았으며 1,200여정의 소총 등 수많은 군수품을 노획하는 대승을 거두었는데 전사는 이를 ‘상곡리 기습전’이라 명명하였습니다. 하지만 아직 제17연대의 선전은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화령장 전투 기념행사]
다음날 제17연대 제2대대가 제1대대를 후속하여 화령장에 도착하였는데 마침 북한군 제15사단의 제49연대가 제48연대를 후속할 예정이라는 귀중한 첩보를 입수하였습니다. 제17연대장 백인엽(白仁燁) 대령은 제49연대마저 격멸하기로 결심하고, 제1대대를 현 위치인 상곡리에, 제2대대를 상곡리 북서쪽 동관리에 매복시켰습니다. 그리고 3일 후 도로를 따라 밀집종대로 행군하며 내려온 북한군 제49연대는 제2대대의 포위망 안에 완벽하게 갇히게 되었고 기습에 순식간 무너져 버렸습니다. 이 작전으로 적 356명이 사살되고, 26명의 포로가 잡혔는데 이 전투가 바로 동관리 기습전입니다.
제17연대 제1대대의 상곡리 전투와 제2대대의 동관리 기습전은 후퇴를 거듭하던 국군과 유엔군이 방심하고 있던 북한군 선두부대를 격파해 중부전선의 위기를 수습할 수 있었습니다. 육군본부에서는 제17연대 1대대의 상곡리 전투와 2대대의 동관리 전투를 합하여 화령장 전투로 명명하고 화령장에서 대승을 거둔 제17연대 전 장병을 1계급 특진시켰습니다. 제17연대는 연대 전체가 특진하는 2번째 연대가 되면서 옹진반도 철수시 흘린 통한의 눈물을 닦을 수 있었습니다.
12. 어둠 속에서 빛을 발한 승전보
본격적인 미군의 개입이 시작되었어도 전세 역전은 고사하고 북한군의 진격을 정지시키는 것조차 여의치 않아 7월이 되어서도 아군의 후퇴는 계속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와중에도 불구하고 개전초의 정신없던 상황을 조금씩 수습하고 나름대로 선전을 하며 위기의 순간에도 빛을 발한 부대가 있었습니다. 개전 초에 춘천지역에서 북한군 제2군단의 진출을 효과적으로 지연시켜 전략적으로 의미 있는 대승을 엮어내었던 국군 제6사단이 어둠 속에서 다시 한 번 빛을 발했던 것이었습니다.
[고난의 시기에 빛난 승전이 있었습니다]
(무극지구 승전기념관-사진출처 : 음성신문)
제6사단은 육군본부의 지시에 따라 원주를 거쳐 이천-충주 일대까지 철수하면서 북한군 제2군단의 진격을 막아내었습니다. 춘천과 홍천에서 망신을 당하여 지휘부의 대부분이 교체되었을 만큼 독이 올라있던 북한군 제2군단은 공격 속도를 만회하기 위해 그 동안 예비로 두었던 제15사단을 원주에서부터 제1선에 내세웠습니다. 7월 3일에 북한군 제15사단이 장호원을 점령하자 충주-이천에 걸쳐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던 제6사단은 순식간 양분될 상황에 처하였습니다. 위기 상황임을 직감한 제6사단장 김종오 대령은 예하 제7연대에게 즉시 장호원을 탈환하라고 명령하였습니다.
명령을 받은 제7연대는 즉시 장호원에 인접한 음성 북방에 투입되었고 연대장 임부택(林富澤) 중령은 제1대대에게 음성에서 무극리로, 제3대대에게 동락리에서 생극 방향으로 각각 공격하도록 지시하고, 제2대대를 음성 북쪽의 부용산 일대에 배치하였습니다. 반격에 나선 국군 제7연대와 남진하여 내려오던 북한군의 선두가 부딪친 곳은 무극리와 동락리 일대였는데, 이때 동락리 일대를 공격하던 제3대대장이 대규모의 북한군이 출현하자 포위를 우려해 연대장의 승인도 없이 음성으로 철수하면서 동락리에서 산양리에 이르는 축선이 순식간 무주공산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제3대대의 철수를 동락리 주민들이 지켜보았는데 이런 우연한 결과는 아군에게는 대승을, 동락리 주민들에게는 비극이 되었습니다.
[동락리 전투 요도]
아군 철수 직후 북한군 제15사단의 선두였던 제48연대는 동락리를 점령하고 “국군이 차량을 타고 철수했다”는 주민들의 증언 때문에 주둔지를 안심하고 인근 초등학교에 조성하였는데, 이런 북한군의 행태를 부용산에 배치된 아군 제2대대가 관측하였습니다. 그리고 당시 동락초등학교 교사인 김재옥(金在玉)이 제공한 첩보에 따라 북한군이 경계병도 세우지 않고 식사준비를 하고 있을 만큼 경계태세가 상당히 약해져 있음을 알았습니다. 이런 판단에 따라 비록 경무장의 300여명의 제2대대였지만 중장비를 갖춘 2,000여명 규모의 북한군 제48연대를 급습하였고 순식간 북한군은 허물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더불어 독단적인 임의 철수에 대해 연대장으로부터 질책을 받은 제3대대가 동락리로 재출동하였는데 7월 7일 오후, 동락리 동쪽의 신덕 저수지 부근에서 제2대대의 공격에 허겁지겁 도망쳐 나오던 북한군잔당과 조우하게 되었습니다. 의도했던 것은 아니었으나 결과적으로 제2·3대대가 거의 동시에 동락이 일대의 북한군을 포위 공격하게 됨으로써, 북한군은 순식간에 지리멸렬 하였습니다. 전사에 따르면 사살 2,186명, 포로 132명과 함께 장갑차 4대, 트럭 60대, 지프차 15대 등 1개 연대 분량에 해당되는 장비와 물자를 노획했다고 기록되었는데 이는 6·25전쟁 발발 이후 그때까지 거두었던 최대의 승리였습니다.
[분노한 북한군의 학살로 인하여 안타까운 희생이 발생하였습니다]
이것은 건군 이래 최초로 제7연대 장병 전원이 1계급 특진되었을 만큼 위기 속에서 찬란히 빛난 엄청난 대승이었고, 패배 의식에 사로잡혀 있던 다른 전선의 아군들에게 커다란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국군 제7연대가 이날 오후 작전상 동락리에서 철수하자, 뒤이어 마을을 점령한 북한군 제48연대 패잔병들은 “주민들이 거짓말을 해서 북한군이 기습을 받았다”면서 마을 주민들을 집단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고 이것은 아군의 빛나는 대승 속에서 아픈 역사의 상처가 되었습니다.
11. 스미스 부대의 붕괴
1950년 6월 30일, 결정이 나자마자 곧바로 미 지상군의 한반도 투입이 이루어졌을 만큼 미국의 6·25전쟁 개입은 상당히 빨랐습니다. 일본 점령군으로 임무 수행 중이던 미 제8군 예하부대 중 한반도에 가장 가까운 규슈(九州)에 주둔하던 미 제24사단에게 제일 먼저 출동명령이 하달되었는데, 제8군사령관 워커(Walton H. Walker) 중장은 시급한 상황을 고려하여 제24사단에게 우선 대대 규모의 특수임무 부대를 편성하여 부산으로 공수시키고 난 후 뒤이어 사단 본대를 한반도로 전개하도록 지시하였습니다.
[일본에서 항공편으로 출발하는 스미스 부대]
제24사단장 딘 소장은 예하 대대 중 가장 전투력이 뛰어나다고 판단한 제21연대 제1대대에 포병대와 약간의 지원부대를 증원시켜 특수임무 부대를 편성하였고, 이를 대대장 스미스(Charles B. Smith) 중령의 이름을 따서 스미스 특수 임무대(Task Force Smiths)로 명명하였습니다. 그리고 7월 1일 14시경 수송기편으로 스미스 부대가 부산에 도착함으로써 미 지상군의 역사적인 6·25전쟁 참여가 시작되었습니다. 부산 시민들은 이들을 대대적으로 환영하며 미군이 전세를 즉시 역전시켜 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지체하지 않고 열차편으로 북상한 스미스 부대는 7월 5일 03시에 오산 북쪽 경부가도 상에 있는 교통요지인 죽미령인근에 방어진지를 편성했습니다.
그러나 일본에서 유유자적한 생활을 즐기던 중, 명령이 하달되자 당일 부대를 편성하고 다음날 부산에 도착한 후 대전과 평택을 경유하여 죽미령까지 숨 가쁘게 달려온 스미스 부대원들의 전투준비는 당연히 미흡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5년 전 사상 최대의 전쟁이었던 제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끈 경험 때문에 미군들은 자신만만하였습니다. 스미스 부대원들은 ‘북한군은 미군이 참전했다는 사실만으로 스스로 물러갈 것’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을 정도였는데, 이러한 넘치는 자신감이 만용임이 밝혀지는데 불과 하루도 걸리지 않았습니다.
[대전역에 도착한 스미스 부대]
스미스 부대가 빗속에 허둥지둥 진지편성을 마치자마자 8대의 전차를 앞세우고 죽미령을 향해 다가오는 북한군의 행렬이 관측되었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미군은 한국군처럼 북한군 전차에 대한 공포는 없었기 때문에 당황하지 않고 사격하기에 가장 좋은 지점까지 다가오도록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7월 5일 07시 30분, 자신만만하게 75밀리 무반동총으로 사격을 가하여 북한 전차를 명중시키면서 한반도에서 미군과 북한군간의 최초 교전이 벌어졌습니다.
그러나 타격을 입은 북한군 T-34전차는 잠시 멈칫했을 뿐 계속 전진하고 있었습니다. 놀란 미 보병들은 뒤에 배치된 제52포대로부터 지원 화력을 받았으나 적 전차는 전혀 개의치 않았습니다. 미군을 보기만 해도 물러갈 것으로 생각했던 북한군이 생각과 달리 전차를 앞세워 전선을 돌파함과 동시에 보병을 좌우로 신속히 산개시켜 미군진지를 일순간 포위 돌파하면서 스미스 부대의 방어선은 순식간 붕괴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자신만만했던 상황은 순식간 당혹으로 바뀌었고 6월 25일 국군들이 느꼈던 공포를 미군들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후퇴하는 국군을 한심스러운 듯 바라보던 스미스 부대원들
하지만 그들도 6시간의 전투 후 이 대열에 동참합니다 ]
북한군의 진격 속도는 미군들이 전혀 생각지도 못한 수준이었을 만큼 상당히 급속하였습니다. 죽미령 후방에 배치되어 있던 포병대조차 갑자기 정면에 나타난 북한군 전차에 짓밟혀 버려 산산조각 나 버렸을 정도였습니다. 불과 반나절의 전투로 스미스 부대는 440명 중 150여명이 전사하거나 행방불명되었고 포병대의 야포를 비롯한 모든 중화기는 망실되었습니다. 미군과 북한군의 역사적인 첫 전투는 이처럼 미군의 참담한 패배로 끝이 났고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구한 미군들은 후퇴하는 국군과 나란히 열을 맞추어 남쪽으로 도망가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6·25전쟁 초기에 벌어진 미군의 참담했던 패배는 단지 이제부터 시작이었을 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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