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고장 우리마을 숨겨진 보물을 찾아서[24]
단산면 구구3리(배나무실) ‘홍유한 선생 유적지’
1726년 서울 아현동 출생, 1758-1775 충청 예산에서 천주교 서적 탐독
1775년 순흥부 동쪽 10리 구고리(배나무실)에서 ‘칠극’에 의한 수계생활
1785년 향년 60세 일기로 선종, 순흥부 동쪽 문수산 자락 우곡에 안장
홍유한 유적지 전경(단산면 구구3리)
홍유한 선생 동상(봉화 우곡성지)
홍유한 선생 유적비와 유택지(구구3리)
홍유한의 조부 홍중명의 정려문(구구3리)
홍유한 선생 유적비와 유택지(구구3리)
홍유한 선생의 묘(봉화 우곡성지)
봉화 우곡성지 전경
단산면 구구리 홍유한 선생 유적지
영주 서천교에서 회헌로를 따라 순흥·단산 방향으로 향한다. 귀내-장수고개-피끝-조개섬-사천(새내)을 지나 바우(사천2리) 마을 앞에서 우회전하여, 구구교를 건너 3km쯤 올라가면 구구3리 배나무실(梨木谷)이 나온다. 마을회관에서 한 집 두 집 지나면 곧바로 홍유한선생 유적지(洪儒漢先生遺蹟地) 표지판이 보인다.
이곳은 조선 때는 순흥부(順興府) 동원면(東園面) 구고리(九皐里, 구두들)라 불렀는데 일제강점기 때 단산면 구구리가 됐다가 해방 후 구구3리로 분리됐다. 지금도 이곳을 배나무실(梨木谷)이라 부르기도 한다.
홍중명의 정려문
차에서 내려 유적지로 들어서면 위엄이 있는 붉은 솟을대문이 나타난다. 이 대문은 보통 대문과 다른 정려문(旌閭門)이다. 문두에 「孝子 贈 通善郞 司憲府 持平 洪重明 之門(효자 증 통선랑 사헌부 지평 홍중명 지문)」이라고 쓴 현판이 가로로 걸려 있다.
이 정려문은 홍유한의 조부 홍중명(洪重明)이 경종 4년(1724년)에 효자로 정려(旌閭)되고, 영조 2년(1726년)에 사헌부 지평으로 증직된 효자문이다.
홍유한 선생이 서울 아현동을 떠날 때 정려문 현판만 가지고 예산으로 갔다가 다시 이곳에 정착하였으나 집안 사정으로 정려문을 세우지 못했다. 그러다가 경상도관찰사로 부임한 족질 홍익주의 도움으로 정려문을 세우게 됐다. 현 정려문은 2014년 영주시가 중수했다.
홍유한이 조부 홍중명의 정려문 현판을 예산을 거쳐 구구리까지 가지고 온 것은 조부와 부친(홍창보)의 효(孝)를 본받기 위해서였다.
홍유한 유택지(遺宅地)
효자문 안으로 들어서니 새마을시대 때 개축한 시멘트벽돌로 기와집 한 채가 있고, 마당에는 천주교안동교구청이 1995년 홍유한 선생 선종 210주년을 기념하여 마련한 유적비가 있다. 마당 주변에는 홍유한의 삶의 흔적으로 추정되는 호박돌 등이 보인다.
현재 건물을 짓기 전에는 홍유한 선생이 거처하던 ☐자형 초가집이 있었고, 마당에 샘이 있었다고 하며, 방 5칸, 큰 마루, 작은 마루, 방앗간, 부엌, 대문간, 마구간 등 전형적인 농촌 주택이 있었다고 마을 사람들은 말한다. 이 마을에는 1960년대까지 풍산홍씨 10여 가구가 살았으나 돌아가시거나 타지로 떠나고 지금은 딱 한 집만 살고 있다 한다.
한국 최초 수덕자 홍유한
한국 천주교는 「최초 수덕자(修德者)인 홍유한(洪儒漢, 1726-1785)의 수계생활에서 발아(發芽)되었다」고 기록했다.
홍유한(1726~1785년)은 충청도 예산의 양반 명문 가문 출신으로 정조대왕의 외가(혜경궁 홍씨의 친정) 집안이다. 그는 한국 천주교회 창립(1784년)보다 30여 년 앞서 천주 신앙을 받아들였던 한국 천주교 최초 수덕자이다. 풍산홍씨(시조:之慶) 16대손인 홍유한(洪儒漢)은 아버지 홍창보(洪昌輔)와 어머니 창녕성씨(昌寧成氏)에게서 1726년 서울 아현동에서 태어났다.
어린 유한은 8, 9세에 이미 경서를 두루 읽고 백가서를 모두 섭렵했다. 그는 한번 눈을 거치면 바로 암기하는 재주를 지녀 사람들이 신동이라 일컬었다. 홍유한은 과거를 보아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16세 때 실학자 성호 이익(星湖 李瀷)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에 정진했다. 1750년경부터 이익 선생의 제자들과 교유하며 ‘천주실의(天主實義)’와 ‘칠극(七克)’ 등 서학(西學)을 연구할 때 유학이나 불교에서 발견할 수 없었던 오묘함이 천주학 안에 숨어 있음을 누구보다도 먼저 알아차렸다.
순흥 동쪽 십리 구고리에 정착
홍유한은 자신의 호를 논두렁 농(隴 )자에 숨을 은(隱)자를 써서 농은(隴 隱, 천주교에서는 ‘주님의 산에 숨은자’라 함)이라 하고, 조용히 천주교 수계생활을 했다. 1756년(영조 32년) 그는 오묘한 진리를 깨달아 솔선 실천하고자 서울집을 팔고 고향 예산(禮山) 여사울(餘村)로 옮겨 18년 동안 살았다.
이곳도 여러 가지 번거로움이 많아 1775년(영조 51) 홍유한 부부와 아들 홍낙운 부부가 거주지를 영남으로 옮긴 곳은 순흥부 동쪽 10리 동원면(東園面)이었다. 숲을 개척하여 터전을 일구어 자리 잡으니 구고리(九皐里, 천주교 기록에는 ‘구들미’라 함) ‘배나무실’이란 곳이었다.
그는 자비심과 정의감이 투철하면서도 희비애락을 얼굴에 나타내지 않는 위엄이 있었다. 본시 기질이나 신체가 강건한 편이었던 그는 지나친 고행과 절식으로 점차 몸이 쇠약해졌으나 오로지 기도와 묵상으로 말년을 보내다가 1785년 정월 30일에 천주교 예식에서 베풀게 되는 정식 세례도 받지 못한 채 향년 60세의 일기로 선종하고, 봉화군 문수산자락 우곡(愚谷)에 안장됐다. 구고에 온 지 10년째 되는 해였다.
한국 최초 천주교 신자
한국 천주교 역사에서 최초의 수덕자(修德者)라는 평가를 받는 홍유한에 대해서는 달레의 「한국천주교사」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을 하고 있다.
「그는 1770년에 천주교 서적을 발견하여 다른 공부는 모두 버리고 그것만 기꺼이 읽으며 종교 생활의 실천에 전념하였다. 축일표(丑日表)도, 기도 책도 없이 7일마다 축일(祝日)이 오는 것을 알고 매월 7일 14일, 21일, 28일에는 경건하게 일을 쉬고 이런 날에는 속세의 모든 일을 물리치고 기도에 전념하였다. -중략-
홍유한은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고적한 곳에서 묵상과 기도에 전념하기 위하여 백산(白山, 소백산을 지칭)에 들어가 13년(실제 10년) 동안 지냈다.」
위의 기록을 근거로 홍유한은 한국 천주교 교회사에서 최초의 신자로 인정받고 있다.
칠극(七克)에 의한 천주교 수계생활
홍유한 동상에서 선생이 가슴에 안고 있는 책이 칠극(七克)이다.
칠극은 스페인 출신 예수회 회원 판토하(1571-1618) 신부가 쓴 교리서로, 일곱 가지 죄의 뿌리인 ‘칠죄종(七罪宗)’을 이겨내고 하나님의 나라로 향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책이다. 홍유한은 세례를 받진 못했지만 선종할 때까지 이 책을 기준 삼아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사랑하는데 힘썼다고 한다. 칠극의 제1극은 복오(伏傲): 교만을 억누르다. 제2극 평투(平妬): 질투를 가라앉히다. 제3극은 해탐(解貪): 탐욕을 풀다. 제4극 식분(熄忿): 분노를 없애다. 제5극 색도(塞饕 ): 탐을 내어 먹고 마시는 것을 막아내다. 제6극 방음(防淫): 음란함을 막아야 한다. 제7극 책태(策怠): 게으름을 채찍질하다 등이다.
문수산(文殊山) 우곡성지(愚谷聖地)
농은 홍유한은 1785년 1월 30일 구구리에서 세상을 떠나자 그해 4월 19일(양 5월 27일) 순흥부의 동쪽 우곡(愚谷)에 안장됐다. 당시 우곡은 순흥부 와란면(臥丹面) 우곡리(愚谷里)에 속해 있었다. 단산면 구구리에서 봉화 문수산(文殊山) 중턱 우곡리까지는 직선거리로도 20km가 넘는다. ‘어떻게 그 먼 곳까지 가서 묘터를 잡았을까?’ ‘그 먼 길을 어떻게 운구했을까’라는 의문이 앞선다. 이에 홍기홍 농은공 8대 주손은 “당시 저의 집안은 정조대왕의 외가(혜경궁 홍씨의 친정) 집안이어서 어명을 받은 어풍(御風, 風水, 왕실지관)이 직접 여기까지 와서 명당을 찾았다고 하며, 순흥부 땅 동쪽 끝까지 가서 명당을 찾아 장사를 지내다 보니 선종에서 장례까지 80여 일이 걸린 것으로 보여진다”고 말했다.
우곡성지에는 ‘홍유한의 묘’, 칠극을 상징하는 ‘칠극성당’, 홍유한 선생 동상, 홍유한 후손 13위 순교자 가묘, 칠극길 등이 있다.
영주시는 천주교 안동교구와 협력하여 2017년까지 사업비 27억원을 들여 홍유한 선생의 생가를 복원하고, 기념관 건립과 주차장, 화장실 등 편의시설을 갖춘 유적지 정비 사업을 추진하였으나 국비 확보 등 여러 사정으로 성사되지 못한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홍기홍 주손은 “농은공 할아버지의 유택(단산면 구구리)이 옛 모습 그대로 복원되기를 바라며, 경기도 광주시 천진암성지 수장고에 보관되어 있는 유물들을 번역하여 책으로 발간하는 일이 조속 성사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이원식 기자 lwss041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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