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고장 우리마을 숨겨진 보물을 찾아서[23]
1976년 대전서 열린 전국새마을지도자대회서 성공사례발표
잘살아 보기 위해 10년 작정 장성광산에서 열심 일하고 저축
도박과 술타령 몰아내고 초가집도 없애고 마을길도 넓히고…
1976년 전국 새마을지도자대회 성공사례발표문(영주문화원 소장)
어머니회원들이 ‘마을 안길 넓히기’ 공동작업을 하고 있다.
영주문화원 주최 ‘영주 근현대사 기록물전시회’에 나온 정명규 여사 기록물들
1973년 풀베기대회 참가모습
1974년 7월 9일 매일신문, 「마을회관 건립한 어머니회」 기사
1976년 대전에서 열린 새마을지도자대회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정명규 여사가 성공사례를 발표하고 있다.
정명규 여사
가흥1리 한정마을 정명규 여사의 ‘새마을운동 성공사례 발표문’
1976년 12월 13일 새마을운동 6년을 결산하는 전국 새마을지도자대회가 대전에서 열렸다.
이날 박정희 대통령은 대회사에서 “새마을운동으로 5천 년 묵은 가난의 때가 서서히 자취를 감추고 있다”며 “부락 공동사업은 주민들의 총의를 모아서 하며, 부녀회원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영주읍 문정리(한정마을) 정명규(44, 어머니회장) 새마을지도자는 박정희 대통령이 지켜보는 가운데 성공사례를 발표했다. 정명규 지도자의 발표문에는 이미 부녀회원들이 새마을운동에 적극 참여하고 있었으니 당시 문정리는 새마을운동 선진마을이었던 것이다.
세월이 흘러 2020년 11월 영주문화원(원장 김기진)이 주관하는 「영주의 빛바랜 근현대사 기록물 전시회」에 정명규 여사가 손수 또박또박 쓴 성공사례발표문 원문이 전시됐다.
총 30여 쪽에 달하는 발표문에는 정명규 여사의 생애와 새마을운동 성공사례가 담겨있었다.
영주문화원은 ‘성공사례발표문’과 당시 지은 ‘새마을회관’을 국가등록문화재로 등록하는 방안을 연구·추진하고 있다.
한정마을의 유래
저의 남편 박승건(朴勝健, 반남인)은 소고(嘯皐) 박승임(朴承任, 1517-1586) 할아버지의 13세손입니다. 소고 할아버지의 아드님이신 박록(朴漉, 1542-1632) 할아버지께서 초곡(푸실)에 터를 잡고 정자를 세우시니 그의 아버지 소고 할아버지께서 하한정(夏寒亭)이라 명명했는데 이때부터 마을 이름이 하한정(여름에도 시원하다)이 되었습니다. 그 후 세월이 흐르면서 하(夏)자는 생략되고 한정(寒亭)만 남아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또한 이곳을 문정리라 한 것은 1914년(일제강점기)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글 좋은 선비들이 많아서 ‘글밭’이라는 뜻을 가진 문전(文田)에서 문(文)자를 따고, 한정(寒亭)에서 정(亭)자를 따 문정(文亭)이라 했다고 합니다. 시내 중심에서 약 4km 정도 떨어진 변두리 마을로 외나무다리를 건너 시내로 오갔습니다.
한정마을로 시집온 정명규 새댁
저 정명규(鄭明圭, 봉화인, 1932生)는 영주시 문수면 만방리 속칭 ‘우무실’이라는 산골마을 가난한 농가의 외동딸로 태어나 보통학교 2학년까지 다니다가 열여덟 살 때 한정마을로 시집왔습니다. 가난한 시가(媤家)에는 시아버지와 병석에 누워있는 시숙, 그리고 과년한 시누이가 단칸방에서 살았습니다. 영월 광산에서 벌어 보내주는 적은 돈으로 근근이 생계를 유지했습니다. 그러던 중 6.25 전쟁이 일어나 남편이 군대에 가게 되니 살림은 더욱 어려워졌습니다. 이때부터 어린 딸을 등에 업고 남의 집 길쌈과 삯바느질로 겨우 연명해 나갔습니다. 고난의 3년 세월이 지나고 남편이 군복무를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둘이 힘을 모아 허리띠를 졸라매고 일했지만 가난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고향을 떠나 장성광산으로
저는 남편에게 “우리 여기서 이렇게 있을 게 아니라 10년 작정하고 고향을 떠나자”, “성공하면 돌아오고 그렇지 못하면 영영 돌아오지 말자”고 했더니 남편도 동의하여 고향을 떠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달포 뒤 80세 고령의 시아버님을 모시고 어린 딸을 등에 업고 가진 것이라곤 좁쌀 한 말과 이불 보따리뿐, 이것을 이고 지고(1957년) 어느 날 새벽 정든 고향을 눈물로 하직하고 강원도 철암행 기차를 탔습니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장성탄광’이란 곳이었습니다. 하늘도 땅도 사람도 모두 새카만 세상이었습니다. 남의 집 처마 밑을 며칠 전전하다 요행으로 아는 사람을 만나 광산 일자리를 소개받았습니다. 그리고 좁은 골목길 귀퉁이에 루핑형 판자집 한 칸을 겨우 얻어 짐을 풀었습니다. 저는 그날부터 수백 미터 깊은 굴속에서 불철주야 일하는 남편을 생각하며 ‘무슨 일이라도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보따리 장사를 시작했습니다. 허리띠를 졸라매고 마늘장사, 비단장사, 화장품, 양그릇 등 계절 따라 시절 따라 닥치는 대로 해냈습니다. 생활비는 제가 번 돈으로 해결하고 남편 월급은 몽땅 저축해서 불과 6년만에 160만원이란 돈을 모았습니다. 그동안 아이들이 태어나는 기쁨도 있었지만 시아버님께서 세상을 떠나시는 아픔도 겪었습니다. 저는 남편에게 “이제 먹고 살 수 있는 돈을 모았으니 고향으로 돌아자”고 했습니다. 1964년 봄. 꿈에도 잊지 못할 고향 한정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가난한 한정마을에 새바람이
6년의 세월이 흘렀는데도 고향 마을의 환경과 주민 생활은 조금도 나아진 것이 없었습니다.
쓰러져가는 울타리, 찌그러진 초가집, 양반 가문만 내세우는 고루한 풍토, 도박과 술타령으로 문전옥답마저 다 팔아버리고 고향을 등진 사람도 한둘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벌어온 돈으로 논 1,500평과 밭 4,500평을 사들여 내 땅에 내 농사를 짓는다는 기쁨으로 더 많은 땀을 흘렸습니다. 우리 마을에서는 처음으로 밭에서 채소를 재배하여 영주시장에 내다 팔아 꽤 재미도 보았습니다. 어느덧 영주시장에서는 제 별명이 ‘오이아줌마’로 불러졌고, 우리집 살림은 날로 불어나 그런대로 남부럽지 않게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도박과 술타령을 몰아내다
그러던 어느 날 이웃집 젊은 새댁이 저를 붙들고 하소연하기를 “제 남편이 논 세 마지기를 노름으로 날리고, 남은 두 마지기 밭문서까지 내놓으라고 행패를 부린다”며 “이제 죽는 길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저는 지난날 어린 나이로 시집와서 고생하던 때가 생각나서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마을에서 도박과 술타령을 몰아내야겠다’고 결심하고 그 새댁과 힘을 모으기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동네 남자들은 저를 ‘건방지고 정신 나간 여자’라며 욕설을 퍼붓고, 저의 남편보고는 ‘제 여편네 하나 휘어잡지 못하는 병신’이라고 흉을 보았습니다. 저와 새댁은 모든 수모와 비난을 못들은 채하면서 술집과 노름방을 끈질기게 쫓아다녔습니다.
마을 어머니회 조직
그러는 동안 뜻 맞는 부인들과 함께 어머니회를 조직하기로 작정하였습니다. 그러나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여자들의 모임 자체를 싫어하는 남편들의 눈을 피해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설득하였으나 고루한 인습에 묻혀 살아온 부녀자들이라 쉽사리 응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에 굽히지 않고 계속 설득에 나서 두 달 만에 21명의 회원을 모으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저는 어머니회원들과 힘을 모아 계속 술집과 노름방을 찾아다니며 극성을 부리니 술집 주모들의 욕설과 남편들의 원성이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제 남편은 끝내 ‘이혼장에 도장을 찍으라’는 사태를 불러오고 말았습니다. 눈앞이 깜깜했습니다. 저를 이해해 주지 못한 남편이 원망스럽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여기서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남편에게 빌었습니다. “우리가 고향을 떠날 때 심정이 어떠했느냐?”, “다시는 고향을 떠나는 사람이 없도록 해 보자”고 설득하였습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이렇게 애원한 보람으로 남편의 이해를 받아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회의 힘으로 술타령과 도박을 완전히 몰아냈습니다. 이러한 활동들이 동기가 되어 1972년 저는 마을 어머니회장으로 여성새마을지도자로 선임되었습니다.
새마을 사업의 구심체가 되다
저는 지난날의 경험을 거울삼아 ‘저축만이 잘 사는 길의 지름길’이라 생각하고 회원들과 의논하여 저축운동부터 벌리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우리는 상호 협동심을 바탕으로 절미운동, 구판장 운영 등 공동사업을 통해 공동기금 25만을 모았습니다. 우리들은 마을을 위한 첫 사업으로 어린이 놀이터를 만들기로 하였습니다. 아직도 여자들이 하는 일을 마땅찮게 생각하고 있는 남자들은 협조는커녕 비웃기만 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추진하여 시작한 지 23일만에 130평짜리 아담한 어린이놀이터를 완공하였습니다. 우리는 또 부녀자답게 부엌개량과 메탄가스 설치 등 작은 일부터 쉬지 않고 조금씩 개선해 나갔습니다.
영주 최초 새마을회관 건립
74년 이른 봄. 주민들이 한자리에 모인 날이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모여 의논할 장소가 있어야 한다고 의견을 모아 마을회관을 짓기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일부 남자들의 반대가 있어 여성회원들만이라도 회관을 건립하기로 하고 직접 벽돌을 찍어 내기 시작하였고, 농번기라서 밤에 횃불을 밝혀가며 야간작업을 강행하기도 하였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착공 59일만에 30평짜리 시멘트블록조(공사비 87만원) 회관을 완성하였습니다. 마을회관 준공을 계기로 남자분들의 호응을 얻어냈고, 협동할 줄 아는 마을로 변모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단합된 힘은 속칭 벼룩길을 폭 5m 길이 2,000m 진입로를 완공하였습니다. 주민들은 ‘87동 지붕개량’을 비롯하여 ‘마을 안 길 넓히기’ ‘하수구 신설’, ‘담장개량’ 등 마을은 옛 모습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변모되어 갔습니다. 그리고 자립 기금을 모아 1979년 튼튼한 콘크리트 다리를 놓기도 하였습니다.
이원식 시민기자
이원식 기자 lwss041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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