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고장 우리마을 숨겨진 보물을 찾아서[26]
이산면 신암리 ‘정도전의 시묘살이 터’
정도전의 ‘시묘살이하던 터’ 전경
정운경의 묘(정경부인 영주우씨와 합장)
‘시묘살이 터’에서 바라본 ‘정운경의 묘’
구산(龜山) 아래 정도전이 살던 고택(삼판서고택)
문천서당(文川書堂), 정도전의 높은 학문을 기리기 위해 1926년 후손들이 세움
모현사(慕賢祠), 정운경, 정도전의 위패를 모신 사당
봉화정씨추원제단비
1366년 정월 부친상, 12월 모친상으로 영주서 5년 시묘살이
묘소 앞에 여막을 짓고 학문에 정진하면서 남방학사 길러내
정몽주, 정도전에게 ‘맹자’ 선물하고 우정의 편지 주고받기도
영주가 배출한 삼봉 정도전
삼봉(三峯) 정도전(鄭道傳, 1342-1398)은 영주가 배출해낸 걸출한 인물 가운데 단연 대표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정도전의 선대는 봉화에서 누대에 걸쳐 살아오다가 고조부인 정공미(鄭公美)를 전후해 영주로 이거했다. 정도전의 아버지 정운경(鄭云敬, 1305-1366)은 순전히 자신의 능력에 의해 문과에 급제하고 형부상서에 오른 인물이며, 어머니는 토족 우연(禹淵)의 따님인 영주우씨(榮州禹氏)이다.
정도전의 출생지에 대해 종래 여러 설이 있었으나 그의 고향이 영주임을 밝혀 놓은 글이 『삼봉집』에 세 편이나 발견되었다. 삼봉은 영주 구산(龜山) 아래에 있는 고택이 자신의 고향이라고 구체적으로 기술해 놓고 있다. 그는 이곳에서 태어나서 유년 시절을 보냈고, 부친이 돌아가시기 전에 다시 고택에서 지내다가 부모상을 당해 시묘살이 전후 5년 동안을 영주에서 보냈다. 그리고 나주 유배에서 풀려난 후 영주에 와서 4년을 보냈으며, 공양왕 말년에 또다시 유배되었을 때도 영주에서 머물렀다. 삼봉(三峯)이라는 호는 그가 삼각산 아래로 은둔하여 후학을 가르치며, 학문에 침잠(沈潛)하면서 붙여지게 된 것이다. 정도전은 영주에서 시묘살이를 마치고 삼각산 아래로 돌아와 작은 누옥(陋屋)을 짓고 삼봉재(三峯齋)라 명명하였다.
구산(龜山) 아래 고택에서 태어나
정도전의 생애 중 영주에서 가장 오랫동안 머물렀던 곳은 5년 동안 시묘살이하던 여막(廬幕)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 여막은 이산면 신암3리 속칭 소골 그의 아버지 ‘정운경의 묘소’ 바로 아래에 있었다. 지금 그 자리에는 1926년 후손들이 건립한 문천서당(文川書堂)과 모현사(慕賢祠)가 있다. 문천서당은 시묘살이하면서 학문하던 자리라고 추정하고 있고, 모현사에는 염의공(정운경), 문헌공(정도전), 희절공(정도전의 아들), 일봉공(정도복, 정도전의 막내동생), 양경공(정도전의 증손)의 신위가 모셔져 있다.
찾아가는 길은 영주시내 북동편 상망교차로에서 봉화 방향으로 3.5km쯤 가다가 이산면 신암3리에서 내리면 곧바로 ‘봉화정씨시조공제단소’라는 큰 표석이 보이고, 여기서 400여m 더 가면 ‘정운경 묘소’에 이르게 된다.
그럼 지금부터 65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구성산 밑에 있는 정도전이 살던 고택(지금 삼판서고택)으로 가보자. 삼봉은 1342년 구산(龜山) 아래 고택에서 태어나 유년 시절을 이곳에서 보낸다. 10대 중반 아버지(鄭云敬, 1304-1366)를 따라 개경으로 올라가 이색 문하에서 학문의 기초를 닦았다. 나중에 부친이 벼슬을 마치고 고향에 돌아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정도전도 다시 고향 고택에서 지냈다. 그의 나이 24살 때인 1366년 1월에 부친상을 당했다. 한 달이 넘도록 산소 자리를 찾아 헤맸으나 좋은 자리를 얻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자나 되는 많은 눈이 내렸다. 그런데 지금의 영주시 이산면 신암리의 한 곳에 한 점의 눈도 없는 명당자리가 발견되었다. 그는 그 자리가 상서로운 자리라고 여겨 그곳에 부친의 장사를 지냈다.
아버지 묘소 아래 여막을 짓고…
정도전은 아버지 묘소 앞에 여막을 짓고 시묘살이를 시작했다. 상중에도 학문에 전념하는 열정을 보여 주었다. 같은 해 12월에 또 모친(영주우씨)이 돌아가시니 전후로 5년간 시묘(侍墓)살이를 하게 됐다. 삼봉집 제8권에 “남방(南方)의 학자들이 많이 배우러 왔으므로 그들을 잘 가르쳐서 모두 성립(成立)시켰다. 남방의 학자는 안비판(安秘判:비판은 관직명), 이안렴(李按廉), 성중서(成中書), 김사농(金司農), 유판도(庾版圖) 같은 사람들로서 모두 등과(登科)하여 좋은 벼슬을 했으며, 공의 아우 도존(道存)은 벼슬이 참판(參判)에 이르렀고, 도복(道復)은 판윤(判尹)이다”고 기록했다.
정몽주와 정도전의 우정
정도전이 태어난 고려 후기는 원(元)의 간섭기로 왕의 이름조차 마음대로 지을 수 없었고, 친원파였던 ‘권문세족’은 대농장을 소유해 백성들을 수탈했다. 이렇게 힘든 상황에서 중소지주의 자식들이 신진사대부로 중앙에 진출하기 시작했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이 정몽주(鄭夢周, 1338-1392)와 정도전이다. 정몽주는 어릴 때부터 천재 소리를 들으며 글솜씨도 남달랐다. 그는 과거시험 준비를 하는 중에 아버지가 돌아가셔 ‘시묘살이’를 하게 됐다. 정몽주는 힘든 시묘살이를 하는 중에도 학문을 게을리하지 않아 무려 3번 연속 장원급제를 하는 등 영재성을 보였다. 이것을 지켜보며 깊은 호감을 가지게 된 정도전은 직접 정몽주를 찾아가 ‘가까이 지냈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표현하였는데 정몽주가 흔쾌히 받아들여 두 사람은 진정한 벗으로 우정을 꽃피우게 됐다.
개경과 영주를 오간 편지
정도전은 그런 정몽주를 보며 꿈을 키우게 됐고, 정몽주는 자신과 뜻을 같이한 벗을 고맙게 생각했다. 정도전의 시묘살이를 기점으로 두 사람 사이는 더욱 돈독해졌다.
이때 정도전이 정몽주에게 편지를 보냈다. “나의 벗 포은(圃隱)은 불교가 흥하고 유교가 쇠하는 현실을 바로 하는데 적격자입니다. 그 이유는 포은이 비록 높은 지위는 없다 하더라도 학자들이 본래부터 포은의 학문이 올바름에 감복했고, 벗님의 덕이 뛰어남에 감복했기 때문입니다. 나처럼 용기 없고 힘없는 사람도 세상의 비웃음을 아랑곳하지 않고 현실을 비판할 수 있는 것은 포은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늘이 포은을 내신 것은 참으로 우리의 복입니다”라고 썼다. 정몽주는 답장에서 “이것은 과찬이오. 하지만 아주 감격스럽고 기쁘오. 삼봉의 마음 씀이 너무 고맙소. 시묘살이는 어떻소. 사람들은 시묘살이가 시간 낭비라고 하지만 그 시간은 부모님을 생각하고, 학문을 연마할 수 있는 아주 귀중한 시간이라오. 한시도 낭비 말고 학문에 정진하도록 하시오”라고 적었다.
정도전에게 보낸 선물 ‘맹자(孟子)’
이렇게 두 사람은 영주에서 개경까지 먼 거리임에도 이런 우정 어린 편지를 주고받았다.
이때만 해도 같은 생각을 하며 같은 미래를 꿈꿨던 두 사람이다.
이렇게 두 사람의 관계가 돈독해진 가운데 정몽주는 정도전에게 운명이 될 책 『맹자(孟子)』를 선물한다. 『맹자』의 진심하 중에 “백성이 가장 귀하고 사직(社稷)은 다음이며, 군주는 가볍다. 이런 까닭으로 구민(들판의 백성)의 마음을 얻으면 천자(天子)가 되고 천자의 마음을 얻으면 제후가 되고 제후의 마음을 얻으면 대부(大夫)가 된다”는 내용을 읽고 감명을 받는다.
정도전은 정몽주가 보낸 『맹자』를 한 자 한 자 곱씹어 가며 읽고 또 읽었다. 2000년 전에 쓰인 책 『맹자』는 정도전의 사상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후세 사람들은 “정도전이 시묘살이를 하면서 『맹자』를 뜨겁게 읽던 그때 ‘새로운 나라(조선)의 기틀’을 마련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구산(龜山)은 내 고향(桑梓)
삼봉이 개경에서 벼슬살이를 하던 공양왕 어느 해 봄날, 정부령 정홍(鄭洪, ?-1420)이 경상도안렴사로 떠난다고 하자, 그를 전송하면서 자신을 위해 고향의 유민(遺民)들을 잘 보살펴 달라고 부탁하며 노자(路資)를 대신 지어준 시(詩)다.
萬古鷄林碧(만고계림벽) 만년을 푸르리라 저 계림이여, / 風流代有人(풍류대유인) 풍류를 대대로 잇는 사람이 있네. / 星軺 辭白日(성초사백일) 성초(星軺 , 수레)로 날이 밝아 하직 올리니, / 玉節映靑春(옥절앙청춘) 옥절은 푸른 봄에 비추이누나. / 交契通家舊(교계통가구) 교분은 예부터 집안이 통하는 벗이었지만, / 離愁此地新(이수차지신) 이곳에선 이별의 시름 새롭네. / 龜山桑梓邑(구산상재읍) 구산(龜山)은 내 고향(桑梓) 고을이 거니, / 爲我訪遺人(위아방유인) 나를 위해 유민들을 찾아봐 주게.
삼봉은 위의 시 결구(結句)에서 “구산은 내 고향의 고을이니(龜山桑梓邑)”라고 하였다. 구산은 영주 구성산(龜城山)의 줄임말이다. 구성공원 남서쪽 아래 삼봉이 살았던 고택(삼판서고택)이 있었다.
이원식 기자 lwss041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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