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때 단양군수 신세인이 활을 쏴 정착한 곳
화살(箭)과 붉(丹)은 천에서 유래한 마을 전단(箭丹)
전단마을 전경 |
전단마을 사람들 |
100년 고택 |
휴천3동 전단 가는 길
영주중 사거리에서 남간재를 넘어 영봉로로 향한다. 술바우사거리-동산고-충혼탑을 지나 조금 가다보면 둘구비 마을표석이 나타나고, 10여m 거리에 전단으로 가는 안내표석이 보인다. 우회전하여 1.5km쯤 올라가서 고개를 넘으면 전단(箭丹) 마을이다. 또 안동통로 수청정미소 앞에서 철도건널목-영남자동차학원-아랫전단을 거쳐 전단으로 가는 길도 있다. 지난달 24일 전단에 갔다. 이날 마을회관에서 신상철 노인회장, 신수균 전 노인회장, 임상임 할머니 그리고 여러 마을 사람들을 만나 마을의 역사와 전설을 듣고 왔다.
역사 속의 전단마을
영주의 옛 이름은 고구려의 내이군(奈已郡), 통일신라 때 내령군(奈靈郡), 고려 때 강주(剛州)-순안(順安)-영주(榮州)로 불렀고, 조선 초 태종14년(1414년) 영천군(榮川郡,별칭龜城)이 됐다.
조선 중기(1600년) 무렵 행정구역을 면리(面里)로 정비할 때 경상도 영천군 어화곡면(於火谷面) 전단리(箭丹里)라 불렀고, 조선 후기 1896년(고종33) 행정구역 개편 때 경상북도 영천군 어화면(於火面) 조암동(槽巖洞)이 됐다.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 개편 때 영주군 이산면 조암동이 됐다가 1980년 영주읍이 시로 승격할 때 영주시 휴천3동(5통)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안병곤(66) 씨는 “전단은 1995년 통합 영주시가 되면서 휴천3동 5통이 됐다”며 “윗전단, 아랫전단, 노루고개가 5통 관할”이라고 말했다.
입향조 신세인의 묘 |
지명유래
조선 선조 때 단양군수를 지낸 신세인(申世仁,1542-?)이 임진왜란을 당하여 가족과 함께 피난길에 올랐다. 죽령에 이르러 신에게 ‘정착지를 인도해 달라’고 기도 한 후 화살 끝에 붉은 천을 달아 남쪽을 향해 힘껏 당겼다. 그 화살과 붉은 천을 이곳에서 찾은 신 군수는 이곳 이름을 화살 전(箭)자에 붉은 단(丹)자를 써 전단(箭丹)이라 하고 마을을 개척했다.
최근 들어 인동장씨 세거지인 아랫전단과 구분하기 위해 ‘윗전단’ 또는 ‘원전단’이라고도 한다. 또한 조선말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어화면 ‘조암동’이 됐다. ‘조암’이란 멍고개에서 발원하여 흐르는 내(川) 바닥에 실금(보막이) 구실을 하는 바윗돌이 층층 있었는데 이 돌의 모양이 구유(소 먹이통)를 닮았다 하여 구유 조(槽)자에 바위 암(巖)자를 써 ‘조암동(槽巖洞)’이라 이름 지었다.
신상철 노인회장은 “어릴 적 전단에는 평산신씨 60여호가 살았으나 지금은 20여 호만 산다. 선조들은 마을 앞을 흐르는 개울을 화살 전(箭)자를 써 전계(箭溪)라고도 했다”며 “냇바닥에 ‘구유 모양의 바윗돌(槽巖)’이 여러 곳에 있었으나 수로(水路) 정비사업 때 모두 없어져 아쉽다”고 했다.
입향조 신세인(申世仁)
마을 서편(교회 서쪽 100m) 앞산에 입향조 신세인(군수공)의 묘가 있다. 비문에 보면 「公세인은 평산인으로 고려 개국공신 신숭겸(申崇謙)의 후손이다. 사간(思簡) 벼슬을 지낸 사간공파(思簡公派)로 파조 호(浩,14세,고려말-세종14년)의 7세손이다. 부 응상(應祥,1516-1550)은 직장(直長) 벼슬을 지냈고, 조부 변(변,1470生)은 1515년 문과에 급제하여 증 자헌대부 이조판서에 올랐다. 세인은 어려서부터 글 읽기를 좋아했으며, 의관정제하고 벽을 보고 앉아 끊임없이 독서했다. 그의 높은 학문이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임금님 귀에까지 들어가 특별히 단양군수에 제수됐다. 군수 말기 임진왜란을 당하자 시문을 불태우고 죽령 남쪽 영천군 전단리에 숨어살았다. 무명의 선비로 살다가 충효염(忠孝廉) 석자를 써 후손에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고 기록했다.
후손 신수균(22세손) 씨는 “세인 입향조께서 태어나신 곳은 서울 또는 양평지역으로 추정된다”며 “이곳에 정착하신 연유는 아마도 군수공 할아버지의 부인이신 봉화정씨 할머니의 친정이 인근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평산신씨 전단 문중은 사간공파 下 군수공파 라고도 한다”고 말했다.
음지마 안동김씨
전단교회 남쪽 속칭 음지마에 안동김씨(시조:金宣平) 일가 몇 집이 산다. 전단의 안동김씨는 승의랑공파(承議郞公派,15세)로 파조 극(克)의 후손이다.
이 마을에 사는 후손 김우현(55) 씨는 “1800년대 중렵 22세 김병원 선조께서 안동 풍산 소산에서 전단으로 이거하여 영주 입향조가 되셨다”며 “슬하 6형제를 두시니 후손이 크게 번성하였다. 지금도 선조들이 사용하던 샘과 빨래터가 유물로 남아있다”고 말했다.
우현씨네 별장 황토방 벽에 걸린 ‘내고향 전단’이란 시가 있어 소개한다. 「숱한 비바람 忍苦의 세월들/沈默으로 지켜온 洞守나무여!/오늘도 의젓한 姿勢로 맞이하니/달봉지에 내려앉은 달빛 아름답구나! -중략- 대국의 천문산인들 渴馬山에 비할소냐/인생은 백년 머물기도 어려우나/내 사랑하는 고향산천 箭丹洞里여/천만세 흘러넘쳐 揚子江을 덮을 지어라」
전단교회 |
전단교회
아랫전단에서 윗전단으로 오르다보면 멀리서도 교회종탑이 우뚝하다. 교회는 60년 역사 속에 어느 덧 마을의 상징으로 자리 잡은 듯하다.
기자가 정월대보름날 오후 전단에 갔을 때 이주호(전단교회,57) 목사는 마을 사람들과 윷놀이를 하고 있었다. 1959년 마을 사람들(신언식 외 여러명)에 의해 천막교회로 시작한 전단교회는 1960년 설립, 1963년 ‘전단교회’라 이름지었다. 1978년 현 예배당 건축, 2000년 40주년 기념예배, 1990년 신수균 장로 임직, 2014년 이주호 목사 부임 등은 간략 역사다.
신수균 장로는 “우리교회는 산골 옹달샘 같은 교회로 신도 절반이 우리마을(평산신씨) 사람들”이라며 “이주호 목사님 부임 후 청년봉사단의 미용봉사, 목욕봉사, 음식대접 등 마을과 친교활동을 많이 했을 뿐만 아니라 더욱 성령 충만한 교회로 발전시키셨다”고 말했다.
아기고추와 고추아가씨 |
수박·고추의 마을
충혼탑 방향에서 전단으로 가는 초입 표석에 「윗전단 특산물 수박 고추」라고 새겨져 있다.
지금 마을 곳곳 비닐하우스에는 아기고추(모종)가 자라고 있다.
신춘식 마을 총무는 “우리마을은 오래전부터 수박·고추작목반을 운영하는 등 농업기술을 축적해 왔다”며 “대부분 농가가 수박·고추를 재배하고 있고, 재배 면적도 지역에서 최대다. 그래서 수박고추 생산지로 널리 알려져 있다”고 말했다. 음지마 앞에서 만난 신영희(70) 씨는 “우리마을은 원래 벼농사 중심마을이었으나 1990년 이후 수박고추 생산지가 됐다”며 “전단못에서 멍고개로 넘어 가는 주변은 온통 수박밭, 고추밭이 즐비하다”고 말했다.
450년 느티나무 |
전단마을 새댁네들 |
전단경로당 |
전단 마을 사람들
민영자 할머니 |
마을회관 옆 느티나무집에 사는 민영자(80) 할머니는 텃밭을 정리하다 비닐망을 들여다보면서 “벌써 마늘싹이 돋아나기 시작했다”며 “해마다 정월보름이 지나면 일을 시작했는데 지금부터 농사가 시작된다”고 말했다. 문수 적서가 고향인 임상임(91) 할머니는 “19살 노처녀가 가마타고 전단 평산신씨家로 시집왔다”며 “5대가 한집에서 살았는데 시할매도 아이들이 조롱조롱 딸리고, 시어엄도 아이를 낳고 손부도 아기를 낳으니 식구가 모두 17명이나 됐다”고 말했다.
군수공 묘소에 갔다 내려오는 길에 교회 옆 밭에서 검불을 정리하다 만난 신정식(73) 씨는 “해마다 시월이면 군수공 下 선조 묘소에 시제를 지낸다”면서 “그 때는 후손 수십 명이 참가하여 조상의 은덕을 기린다”고 말했다. 신상철 회장의 부인 강명자(65) 씨는 “마을 전체가 수박고추 농사를 많이 짓는다”며 “다른 마을에 비해 젊은 농부와 젊은 새댁네들이 많은 마을로 대농(大農)에 수익도 높은 부자마을”이라고 말했다. 마을 안 골목에서 젊은 청년들이 대문을 네트로 배드민턴을 친다. 활기 넘치는 마을이다. 골목길을 내려오다 김희숙(53) 씨를 만났다.
김 씨는 “20여 년 전까지만 해도 회관 앞에 잘생긴 소나무가 여러 그루 있었고, 갈마산 머리 부분에 연못이 있었는데 지금은 없다”며 “마을 사람들의 합심노력으로 깨끗한 마을, 살기좋은 마을, 부자마을로 가꾸어 가고 있다”고 말했다. 마을을 둘러보고 가는 길에 신수균 장로님댁 황토방에서 차 한 잔 나눔시간을 가졌다. 군불을 넣은 방바닥은 뜨끈뜨끈했고,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보물급 진품명품들은 마을의 역사와 선비家임을 말해준다. 갈 때는 수청거리로 갔지만 오는 길은 둘구비쪽으로 왔다. 마을 탐방을 주선해 주신 신춘식 총무님과 동네 구석구석 다니면서 자세한 내력을 설명해 주신 신 장로님께 감사드린다.
이원식 시민기자
신상철 노인회장 |
신수균 전 노인회장 |
이주호 목사 |
임상임 할머니 |
신정식 씨 |
신영희 씨 |
안병곤 노인회부회장 |
강명자 씨 |
김우현 씨 |
김희숙 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