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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마을탐방[234] 영주의 진산 철탄산(鐵呑山) 아랫마을 ‘숫골’

단산사람 2020. 4. 26. 14:39

우리마을탐방[234]영주1동 숫골 [탐방일 2019.1.20]

영주의 진산 철탄산(鐵呑山) 아랫마을 ‘숫골’   


삼국 때 군사 주둔지 ‘술골(戌谷)’에서 유래한 '숫골'
제일교회-풍국정미소, 근대역사문화의 거리로 지정


숫골 전경


철탄경로당

영주1동 숫골의 입지
제일교회와 풍국정미소 사잇길을 따라 철탄산으로 오르는 골짝과 산비탈 전체를 ‘숫골’이라 한다. 숫골 동편에는 신사골이 있고, 서편은 관사골(옛 두서)이다.

지난달 20일 숫골 마을에 갔다. 이날 영광여고 아랫쪽에 있는 철탄경로당에서 최월성 노인회장, 김건웅 사무장, 양옥순 총무, 석금자 할머니 그리고 여러 어르신들을 만나 숫골의 역사와 전설을 듣고 왔다.


숫골 초가집(1950년대)
철탄산 아랫마을(1930년대)

조선 때 망궐리 화동방(禾洞坊)
영주는 본래 고구려의 내이군(奈已郡), 통일신라 때 내령군(奈靈郡), 고려 때 강주(剛州)-순안(順安)-영주(榮州)로 불렀고, 1413년(태종13년) 조선의 행정구역을 8도제로 정비할 때 경상도 영천군(榮川郡,별칭龜城)이 됐다. 이 무렵 군(郡)의 행정구역을 방리(坊里)로 정비할 때 숫골 지역은 영천군 망궐리(望闕里) 화동방(禾洞坊)이라 부르다가 조선 후기(영조무렵) 면리(面里)로개편하면서 망궐면(望闕面) 화동리(禾洞里)가 됐다. 벼 화(禾)자 화동(禾洞)은 논(畓)이 많은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조선말 1896년(고종33) 행정구역을 13도제로 개편할 때 경상북도 영천군 망궐면 노상동(路上洞)로 개칭되었다가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 개편 때 영주군 영주면 영주리에 편입됐다. 그 후 1940년 영주읍 영주1리 숫골, 1980년 영주시 영주1동 숫골, 1995년 통합 영주시 영주1동 숫골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전쟁이 남긴 지명 술골(戌谷)
삼국사기에 「소지왕 11년(489) 가을 9월 고구려가 신라 북변을 내습하여 과현(戈峴)에 이르고 겨울 10월 호산성(狐山城,청송)을 함락했다」고 기록했다. 여기에 나오는 과현은 장수고개(商峴)에서 갓골(戈峴,조와동)으로 넘어가는 고개(峴)를 말한다. 당시 고구려 군사는 마구령(부석)을 넘어 과현산(戈峴山,308m,갓골뒷산)에 진지(陣地)를 구축했고, 신라 군사는 철탄산(276.4m) 북편 성재산(306.8m)에 진을 치고 방어했다. 조와천(助臥川)을 사이(약 2km)에 두고 대치한 양군은 한 달 동안 치열한 공방이 있었다고 역사는 기록했다.

이 때 적군의 동정을 살피는 곳을 망동(望洞)이라 하였으니 지금의 상망동·하망동을 이르는 지명이고, 군사들의 숙영지(宿營地)를 ‘술골(戌谷)’이라 하였는데 ‘술골’이란 군사 주둔지라는 뜻이다. 즉 숫골은 삼국 때 군사 주둔지로 ‘술골(戌谷)’이라 불렀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발음이 변해 ‘숫골’이라 됐다는 것이다. ‘숫골(戌谷)’은 신라와 고구려의 전쟁이 남긴 지명으로 유서 깊은 마을이다.

숫골의 또 다른 이름들
최월성(82) 노인회장은 숫골의 유래에 대해 “철탄산에서 서쪽으로 뻗어 내린 산줄기의 형상이 마치 호랑이가 잠자고 있는 모습과 같다하여 잘 수(睡)자에 골 곡(谷)자를 써 ‘수곡(睡谷)’이라 불렀는데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발음이 변해 ‘숫골’이 됐다는 이야기가 마을에 전해온다”고 말했다.

김건웅(80) 사무장은 “숫골의 또 다른 유래도 있다”면서 “해방이 되자 만주·일본 등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살 집이 부족했다. 이 때 이들을 수용하기 위해 초가연립주택 5동 30세대를 지었는데 이 주택을 ‘수용소’라 불렀다. 그 후 사람들은 소용소골이라 부르다가 어느 때부터인가 숫골이 됐다. 이처럼 숫골은 시대에 따라 지명유래를 달리하고 있는 유서 깊은 마을”이라고 말했다.

철탄산 아랫마을 숫골
숫골은 철탄산 아래 첫 마을이다. 철탄산(鐵呑山)을 언제부터 ‘철탄산’이라 불렀는지는 알 수 없으나 1625년에 발간된 최초의 영주지에 기록된 것으로 봐서 그 이전(조선초 또는 고려말)부터 ‘철탄산’의 이름이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영주지에 보면 「철탄산은 군(郡)의 진산(鎭山:뒤에서 눌러 보호하는 산)이다. 옛적에 이 산의 형세가 남동쪽을 향하여 달리는 말의 형상과 같으므로 철탄(鐵呑:쇠붙이를 물고 있는 산)이라고 했다. 대개 ‘말에 재갈을 물리어 멍애를 씌운다’는 뜻을 취함이라」고 적혀있다.

철탄산 동쪽에는 망동(望洞,보름골)이 있고, 남쪽에는 군영(軍營) 술곡(戌谷,숫골)이, 북쪽에는 망대(望臺,성재)가 지금까지 전해온다.

이재원(82) 어르신은 “지금 성재에 오르면 갓골로 향하는 등산로가 있고, 동쪽으로 쭉 가면 제2성재, 제3성재로 이어진다”며 “오랜 옛날부터 이곳에 성(城)이 있었다 하여 ‘성재’라 부른다. 이 성(城)은 영주의 북편을 길게 감싸고 있는 자연산성(自然山城)”이라고 말했다.


사직단 구지

사직단(社稷壇) 터
철탄경로당에서 동쪽 방향에 ‘대승사’라는 절이 있다. 이곳은 조선시대 때 ‘사직단’이 있던 곳이라 하여 ‘사직골’이라 부르기도 했다. 사직단(社稷壇)이란 토지를 주관하는 신인 사(社)와 오곡(五穀)을 주관하는 신인 직(稷)에게 제사를 지내는 제단을 말한다. 즉 고을 수령이 토지신(土地神)과 곡신(穀神)에게 고을의 평안과 풍년을 기원하는 제사(祭祀)를 지내던 제단이다.

권오규(82) 어르신은 “사직단은 조선시대 때 군수가 풍년기원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그러나 1910년 나라를 일본에 빼앗기자 일제가 사직단을 폐하고, 그 자리에 천조대신(天照大神堂)을 모신 사당을 세웠다고 하니 슬픈 역사의 현장”이라고 말했다.


풍국정미소
제일교회 신축공사(1956)
영광이발관

근대역사문화의 거리
숫골 지역은 근대 마을의 형성과 발전과정을 살펴 볼 수 있는 핵심 공간이다. 이 지역은 조선 때 영천군 망궐면 화동리(禾洞里,숫골)와 두서리(斗西里,관사골) 지역이다. 당시 이곳에 이름난 선비들이 많이 살았다고 한다. 숫골 앞 제일교회-풍국정미소-영광이발관-영주동근대한옥(일명 이석간고택)-철도관사로 이어지는 거리를 ‘근대역사문화의 거리’라 한다. 2018년 대한민국 등록문화재 제720호로 지정됐다.

숫골 입구에 있는 영주제일교회는 1954년 5월 1일 기공 후 신도들의 노역봉사로 1958년 7월 25일 준공됐다. 그 서편에 있는 풍국정미소는 근대산업시기(1966)부터 운영된 정미소로 건축형식과 설비구조, 도정기기, 양곡가공과 곡물 유통 등이 산업사적 가치가 있는 곳이다. 그 옆에 있는 영광이발관은 1950년대 목조+슬레이트 구조의 건축물로서 영주에서 80년 동안 지속된 장인의 이용업 생활사를 보여주는 근대유산으로서 생활사적 가치가 높다.

박병욱(82) 어르신은 “숫골은 영주 최초 근대마을이라 할 수 있다”며 “영주역(1942)이 생기고, 영광중고등학교(1951)가 설립되면서 숫골을 중심으로 달마을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또 제일교회(1958)가 신축되고, 풍국정미소(1966)가 들어서고, 이발관(1950년대)도 생겼다”고 말했다.

숫골 사람들
숫골 철탄경로당은 영주 경로당의 원조다. 철탄경로당 벽에 「1994년 운영지침, 1-사회봉사 2-복지향상 3-조직내실」이라고 쓴 액자가 걸려 있다. 김익수(79) 어르신은 “영주에 있는 경로당 중 가장 오래된 경로당이 철탄경로당”이라며 “1980년대 현 철탄경로당 맞은편에 마을사람들이 자체 설립한 허름한 회관이 있었다. 지금 철탄경로당은 1990년대 초에 시(市)의 보조로 건립됐다”고 말했다. 양옥순(72) 총무는 “조선시대 때 경로소는 어르신들의 건강을 보살피는 보건소와 같은 역할을 했다고 한다”면서 “우리 철탄경로당은 건강관리를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이 운영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서로서로 건강을 돌봐주고 챙겨주는 정이 넘치는 경로당”이라고 말했다.

김복순 할머니

석금자(83) 할머니는 “1950년대 숫골은 풍국정미소 뒤에서부터 수용소 앞까지 전부 논이고, 집들은 산비탈에 다닥다닥 붙어있었다”며 “지금 영광여고 자리는 과수원이 있었다”고 했다. 예천 상리 모시골이 고향인 김정숙(87) 할머니는 “예전에 숫골의 모습은 철탄아파트 자리에 초가 수용소가 있었고, 주변에는 밤 새 뚝딱 집이 한 채씩 지어지곤 했다”며 “이곳에 사람들이 몰려 온 것은 집을 지을 수 있는 터(산비탈)가 있고, 먹고 살 물(샘)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강금란(88) 할머니는 “나는 경로당에 올 때마다 큰절을 하고 싶다”면서 “경로당을 만들어 주시고 지원해 주신 나라와 우리 시청에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김복순(91) 할머니는 “우리 경로당을 위해 최월성 회장님과 김건웅 사무장님, 양옥순 총무님의 수고가 참 많으시다”며 “이렇게 함께하면서 서로서로 돌봐주는 경로당이 있어 참 고맙고 감사하다”고 말했다.

이원식 시민기자

영광이발관
김건웅 사무국장
양옥순 총무
이재원 어르신
권오규 어르신
박병욱 어르신
김익수 어르신
석금자 할머니

김정숙 할머니

 

강금란 할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