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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마을탐방[239] 문수면 조제1리 분계

단산사람 2020. 4. 26. 16:59

우리마을탐방[239] 문수면 조제1리 분계 [탐방일:2019.3.9]

큰물이 마을 앞을 빙 돌아간다 하여 ‘분계(汾溪)’

 

달성서씨·안동김씨 400년 세거지 분계촌
하얀 백사장이 마을의 자랑, 지금은 없다

 

분계마을 전경
조제1리 경로당

문수면 조제1리 분계 가는 길
분계 마을은 영주에서 학가산 방향 최남단에 있는 마을이다. 남산육교 사거리에서 문수방향으로 향한다. 노벨리스코리아 앞에서 좌회전하여 와현-전닷-삼계 마을 앞을 지나 삼계삼거리에서 좌회전하면 내성천 강가에 자리 잡은 마을이 분계다. 지난 9일 분계촌에 갔다.

이날 조제1리 마을회관에서 김문교 이장, 김동인 노인회장, 박은숙 부녀회장, 서정창 씨 그리고 여러 마을 사람들을 만나 마을의 역사와 전설을 듣고 왔다.

두레와 품앗이

역사 속의 조제리   
영주는 삼국 때는 내이군(奈已郡)이라 하였고, 통일신라 때 내령군(奈靈郡)으로 고쳤다. 고려 때는 강주(剛州)-순안(順安)-영주(榮州)로 부르다가 조선조 태종13년(1413) 영천군(榮川郡)이 됐다. 조제리 지역은 1600년경 군(郡)의 행정구역을 방리(坊里)으로 정비할 때 영천군 진혈리(辰穴里) 조제방(助梯坊)이라 부르다가 1700년경 면리(面里)로 개편될 때 진혈면 조제리(助梯里)가 됐다. 1896년(고종33) 행정구역 개편할 때 경상북도 영천군 진혈면(辰穴面) 조제동(助梯洞)으로 개칭됐다.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 개편 때 영천군, 순흥군, 풍기군이 영주군으로 통합되면서 영주군 문수면 조제리가 되었다가 1980년 영풍군 문수면 조제리, 1995년 영주시 문수면 조제리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김문교 이장은 “조제1리는 분계, 샛골, 잔드리로 구성돼 있다”며 “분계의 경우 20여 가구가 살고 있으나 경로우대 어르신들이 대부분이고 실제 농사를 짓는 가구는 6가구밖에 안 된다”고 말했다. 


황량한 내성천

지명유래
1914년 일제 때 ‘문수면 조제리’가 탄생했다. ‘문수(文殊)’라는 지명은 문수면 초입 탑거리에 있던 문수원(文殊院)에서 유래됐다. 원(院)은 조선 때 역과 역 사이에 있던 ‘여관’ 구실을 하던 숙박시설로 스님이 원주(院主)로 있었기에 주변에 절도 있고 탑도 있었다. 

조제리는 도울 조(助)자에 사다리 제(梯)자를 쓴다. 조선 중기 행정구역을 정비할 때 당시 이곳에 살던 선비들이 모여 의논 했다. 분계에서 샛골-잔드리로 올라가는 길이 좁고 높아서 ‘사다리를 밟듯 오른다’는 뜻에서 도울 조(助)자에 사다리 제(梯)자를 써 ‘조제(助梯)’라 정했다고 한다. 이 마을 출신 서문식(78,한중협중앙위원장) 씨는 “분계 마을은 오랜 역사만큼이나 시대에 따라 지명유래를 달리하고 있다”며 “처음 마을이 형성됐을 때는 이곳 지형이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이라 하여 연화동(蓮花洞)이라 불렀고, 조선 후기 무렵 내성천의 큰물이 마을 앞을 빙 돌아간다 하여 ‘물 빙 도는 모양 분(汾)자’를 써 분계(汾溪)라 했다고 전해온다”고 말했다. 경북지명유래총람(1984)에는 멱실(覓實), 삼계(三溪), 잔도리(棧道里)로 가는 분기점(分岐點)이라 하여 분계(分溪)라 했다했고, 영주시사(榮州市史,2010)에는 향기로울 분(芬)자를 써 분계(芬溪)라고 적었다. 김문교 이장은 “분계는 본래 분계(汾溪)라 썼는데 시대가 바뀌면서 분계(芬溪) 또는 분계(分溪)로 바꿔 부르게 된 것 같다”며 “마을 앞 백사장은 분계의 상징이자 자랑이었으나 지금은 없다. 언젠가 저- 잡목(잡초)들을 걷어내고 옛 모래사장을 되찾고 말 것”이라고 했다.


달성서씨 500년 세거지
영주시사에 보면 분계는 500년 전 달성서씨 가문의 한 선비가 마을을 개척했다고 기록했다. 분계의 달성서씨는 현감공파(縣監公派)로 시조 서진(徐晋)의 7세손 현감공 제(濟)의 후손들이다. 출향인 서문식 씨는 “저의 선조는 원래 안동 예안에 사셨는데 임진왜란(1592) 때 이곳에 정착하여 다래덤불을 걷어내고 마을을 개척하셨다는 이야기를 할아버지로부터 들었다”며 “그 후손들이 분계에서 427년 세거해 왔다. 6.25후까지는 30여 세대가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으나 산업화 이후 대부분 도시로 나갔다”고 말했다. 이 마을에 사는 후손 서정창(77) 씨는 “저의 7대조 때부터 재산을 크게 일구어 고조부 대(代)에 이르러서는 만석꾼 부자가 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며 “근대에 이르러서는 후손들 교육에 중점을 두신 것으로 안다. 분계 후손들이 재능을 발휘해 전국 각지 각계각층에서 지도자로 활동하고 있다”고 말했다.

안동김씨 입향 내력
분계에 세거하고 있는 안동김씨는 시조 김숙승(金叔承)의 6세손 충렬공(忠烈公) 김방경(金方慶,1212-1300)을 중시조로 하고, 익원공(翼元公) 사형(士衡,1341-1407,중시조의 5세)을 파조로 하는 익원공파(翼元公派) 후손들이다.

이 마을 출신 김종대(70,가흥동) 씨는 “선대는 원래 안동 풍산 회고개(檜峴)에 살았는데 임진왜란 때 충렬공(중시조)의 16세손이시고, 저의 14대조이신 득일(得一) 선조께서 안동 북후면 석탑리 암영골(巖寧谷)에 숨어들어 세거지를 마련하셨다”며 “그 후 손자 대(代)에 이르러 후손 일부가 분계로 옮겨 살기 시작했으니 1650년경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의좋은 형제가 살던 마을 
분계는 달성서씨와 안동김씨가 오랜 세월 정을 나누며 살아 온 ‘의좋은 마을’이다. 김동인 노인회장은 “양성이 오랜 세월 함께 살면서 서로 돕고 의지하며 400여년을 함께 살아왔다”며 “마을에 초상이 나면 마을 전체가 한마음으로 슬퍼했고, 농사일은 대동두레나 풋굿을 통해 이웃끼리 친목을 도모하며 살았다”고 말했다.

이 마을 서정창(76) 씨는 “우리 마을에 참으로 의좋은 형제가 살았다”며 “그 주인공은 우리마을 김문교 이장 부친과 숙부 두 형제분이었다. 두 분은 예전에 국민학교 책에 나오는 ‘의좋은 형제처럼’ 볏단을 동생집에 갖다놓기도 하고, 동생은 또 형님 집에 갖다놓는 등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정을 나눈 형제였다. 두 분이 좋은 본을 보여 더 의좋은 마을이 됐다”고 말했다.


마당밭골

정신대… 탈출한 김남순 할머니
분계 마을 안쪽 마당밭골에 김남순(91) 할머니가 산다. 박은숙(52) 부녀회장의 안내로 김 할머니댁 마당에서 할머니를 만났다. “예전에 살기 힘드셨죠?”라고 여쭈니 “고생고생 말도 말라”며 “일제 때 다락골에서 태어나 가난하게 살았다. 16살 되던 해(1943)에 분계 김해김씨家와 혼약을 하고 있던 중 어느 날 일본 순사에 붙들려 영문도 모르게 영주경찰서로 갔다. 그날 경찰서 앞 여관에서 하룻밤 묵게 됐다. 정신대에 끌러 갔다는 소식을 들은 신랑댁은 문중이 발칵 일어나 구출에 나섰다. 이튿날 어찌어찌하여 여관을 탈출해 집으로 왔다”고 말했다. “그래서 어찌됐나요?” “그러고 얼마 안 돼 17살 들면서 분계로 시집왔다. 그 후 6.25와 보릿고개를 넘으며 어럽게 살았다”고 말했다.

분계마을 사람들
조제보건진료소
팽남등
옛 연자방앗간
옛 문수남부초(조제분교)

분계마을 사람들

김점숙 씨
박연봉 씨

분계 마을은 비스듬한 경사면에 옹기종기 모여 산다. 마을 앞에 내성천이 흐르고 옛 조제학교는 교회 수련원이 됐다. 마을회관 앞에는 2012년 한국건축문화대상을 받은 조제보건진료소가 있다. 마을회관에 할머니 여러 분이 모였다. 예천 보문에서 가마타고 시집 온 김귀분(80) 할머니, 이산 간운에서 가마타고 시집 온 김일례(78) 씨, 안동 북후에서 가마타고 시집 온 김점숙(69) 씨, 청송서 시집 온 박연봉(70) 씨, 두월서 온 이순희 씨, 초곡(사일)서 온 오하분(74) 씨, 박영자(72) 씨 등 모두 가마타고 시집 온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조선시대도 아닌데 ‘왜 그랬을까?’

김귀분 할머니는 “분계는 피난 곳이라 길이 없었다”며 “1980년까지도 지게길 밖에 없었다. 그래서 차가 없으니 가마타고 올 수밖에 없는 곳”이라고 말했다. 김일례 씨는 “두메산골에 보건소가 생겨 참 좋다. 혈압도 재고 약도 지어주니 참으로 고맙다”고 했다.

김문교 이장은 “1947년 멱실에 설립된 조제분교가 1955년 분계로 이전 개교했다. 1963년 문수남부국민학교로 승격됐으나 농촌인구 감소로 1993년 분교로 격하됐다. 1994년 졸업생 총 1,221명을 배출하고 폐교됐다. 1970년대 학생수가 많을 때는 총 350명쯤 됐다”며 “그 후 학생야영수련장으로 활용하다가 2000년경 교회수련관이 됐다”고 말했다.

오하분 씨는 “예전에 30여 가구가 살 때는 마을이 시끌벅적했다”며 “정월보름이나 풋굿 때는 마을 사람들이 팽남등에 모여 음식을 나누고 꽹과리를 치며 흥겹게 놀았다”고 말했다.       

마을 안쪽 마당밭골 연자방앗간에서부터 팽남등, 서풍재이, 아랫골, 의좋은 형제가 살던 집 등 마을 곳곳을 안내해 주신 서정창 씨 그리고 마을의 큰 어른이신 김남순 할머니를 만나게 해 주신 박은숙 부녀회장님께 감사드린다.


김문교 이장
김동인 노인회장
박은숙 부녀회회장
김남순 할머니
김귀분 할머니
김일례 씨
서정창 씨
오하분 씨
이순희 씨
박영자 씨

 

이원식 시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