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 칭 | : | 만취당(晩翠堂) | |
소 재 지 | : | 경상북도 영주시 이산면 신암리 165 | |
건 축 주 | : | 김개국(金盖國, 1548~1603) | |
건축시기 | : | 1587년(선조 20) | |
소 유 자 | : | 연암김씨 문중 | |
문 화 재 | : | 문화재자료 제451호(영주시), 2003-12-15 지정, 1동 |
건축 이야기 |
경상북도 영주시 이산면 두월리의 내성천을 가로지르는 두월교를 지나자마자 왼쪽으로 소로를 따라가면, 이미 폐교가 된 작은 학교가 나오고, 넓은 들녘을 따라 가면 우금촌 두암고택이 있다. 그 곳을 지나 북쪽으로 조금만 가면 만취당이 나온다. 정자에 앉아 보면 우측으로는 내성천이 봉화 쪽에서 흐르고, 좌측으로는 재사가 고풍스럽게 자리하고 있다. 주위에는 산이 에워 두르고, 물은 감돌아 산경수색이 안석에 오는 듯하며, 당의 이름은 주변의 솔숲과 더불어 그 풍취를 완상하는데 마음에서 얻어 경치에 붙인 것이라 하겠다. |
건축 배경 |
증좌승지 김개국(金盖國)이 1587년(선조 20)에 건립하였다. |
건축 구성 |
건물의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몰익공계 납도리 소로수장집이다. 평면구성은 마루방 4통칸, 온돌방 2통칸을 연이어 놓고 사면에는 폭이 좁은 쪽마루를 돌렸다. 온돌방 후면에는 반침 흔적이 남아 있고 마루방 우측칸 뒤에는 반침이 설치되어 있는 구조를 하고 있다. 기단은 사고석을 높게 쌓은 다음 자연석 초석을 놓고, 기둥은 네모기둥을 세웠다. 가구는 5량가이다. 충량은 대량 측면에서 온통으로 꽂아 넣고, 충량위에 소로를 두어 외기로리 왕지에는 달동자로 결구시키고, 외기 부분에는 우물 반자로 고급스럽게 치장하였다. 지붕은 홑처마 팔작지붕에 골기와를 이었다. |
현판 |
만취당, 양진재(晩翠堂, 養眞齋) |
만취당 편액은 100×38㎝ 크기이고, 양진재 편액은 90×45㎝ 크기로 밖과 안으로 걸려 있다. 이 두 글씨는 전아(典雅)하면서도 기품이 있는 글씨이지만 누구의 글씨인지는 알 길이 없다. |
만취당중수기(晩翠堂重修記) |
안동(安東) 권상규(權相圭)의 중수기문(重修記文)이 있다. |
누정 이야기 | |
- 소나무의 푸르름을 사랑한 만취당 | |
만취당에 게판 되어 있는 한시 작품을 간단하게 살펴보기로 한다. 먼저 창석(蒼石) 이준(李埈)의 작품은 작품을 짓게 된 간단한 배경을 설명하고 총 280자에 해당하는 매우 긴 장편의 작품을 남기고 있다. 삼가 생각해보니 영특한 명망은 남보다 훨씬 뛰어났고 상서로운 풍채는 따뜻하기가 곤륜산에서 나온 옥과 같네. 젊은 날에는 과거에 올라 명성을 드날렸고 노년에는 시골에 은거하며 발자취를 감추었네. 창문 앞엔 그림 같은 산이 들판을 에두르고 헌함 밖에는 개인 무지개 같은 물이 마을을 둘러 흐르네. 번화한 것을 가지고 명승지를 자랑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만취를 가지고 그윽한 헌함에 현판 걸었네. 겨울이 깊은 길에 국화는 혼연히 부끄러운 얼굴을 하고 추위에 눌린 강가의 매화는 아직 피려고도 하지 않네. 다만 많은 높은 품격은 뭇 꽃에서 빼어나니 누가 바른 기운으로 외로운 뿌리에 붙일까? 처음 났을 땐 쑥에 파묻히는 재앙을 면하지 못했으나 홀로 빼어나 바야흐로 초목 가운데 존귀한 것이 되었네. 힘과 도량은 올바른 사람에 참으로 견줄 수가 있지만 곧은 자태는 평범한 식물과 감히 함께 논할 수 있으랴? 차가운 소리는 웅장한 파도와 분간하지 못하겠고 검은 빛은 길이 어둑한 계곡의 비인가 의심스럽네. 올곧기는 아옹과 더불어 취미를 함께 하니 어찌 시속을 따라 염량하는 태도로 변하겠는가? 교유하는 데 궁벽한 골목에 온 것을 보지 못했고 굳센 절개는 오직 작은 정원에 짝함이 마땅하네. 푸른빛이 마름 물가를 감쌀 때 자주 작지 짚고 산책하고 상쾌함이 꽃핀 언덕 엄습할 때 맑게 술통을 휴대했네. 큰 재목은 구름을 능가하는 줄기를 헛되어 저버렸고 보검은 문득 땅에 묻히는 원통함을 이루었네. 신선 사는 자부에 영묘한 모습 볼 수 없다고 슬퍼 말라. 소나무에 오히려 전형이 남아 있다고 상상하네. 재배하는데 얼마나 선조의 은택을 입었던가? 지금까지 북돋우고 심는 것을 후손들에게 부탁하네. 무덤의 솔과 가죽나무에 조상 생각하는 느낌 더하고 시경 육아장에 큰 하늘과 같은 은혜 보답하기 어렵네. 삼 년이나 묘소에서 일찍이 잣나무를 부여잡았고 백세의 모친 계신 곳에 오히려 원추리를 심었네. 성균관에 들어간 재주 많은 자손들은 연이어 있고 부모 봉양에 맛있는 음식으로 받드니 효심이 돈독하네. 동량 같은 자손들 다른 날에 나라에 등용되고 나복과 같은 공경대부가 되어 자손들이 좋아지리라. 그대들을 위해 아름다운 시를 지으려고 하니 옛 정회가 종이를 대하니 문득 말을 잊었노라. 창석 이준의 작품은 만취당의 선조와 만취당 자신의 생애와 관련하여 만취의 의미를 해석하고 소나무의 특성을 풀이하여 노래한 작품이다. 방후손(旁後孫)인 김성연(金性淵)이란 사람이 쓴 시판은 아래와 같다. 부끄럽게도 못난 후손이 우리 가문에서 태어나니 무수한 후손 중에 문장을 한 것을 많이 감사하네. 범준의 심잠은 소나무가 시냇가에 있고 도연명의 정화는 술이 술통에 가득하네. 풍광이 아름다운 계산에는 주인이 있고 세월이 흘러가도 서까래는 손상됨이 없네. 헌함 앞에 왕양하게 흘러가는 낙동강 물은 다만 응당 한 근원에서 흘러왔으리라. 이 작품은 명문가의 부족한 후손으로 태어난 자부심과 같은 근원에서 유래한 일가들이 화목을 유지하는 마을의 풍광이 좋은 만취당에 대해 노래하고 있다. 역시 종인(宗人)인 안동 부사 김후의 시판은 아래와 같다. 성근 소나무 가랑비에 정성스럽게 문에서 환영하니 만취당 남긴 집에는 후손들이 살고 있네. 뇌락한 교목 그늘엔 책이 서가에 가득하고 단란한 꽃 아래에서 술통의 술을 기울이네. 버들 둑에 구름이 젖으니 꾀꼬리 노래 껄끄럽고 모낸 논에 하늘이 낮으니 백로의 깃이 뒤적이네. 우는 샘물 맑게 헌함 두른 것을 가장 사랑하니 백 갈래 길로 나뉘어 흘러도 처음에는 한 근원이네. 후손들이 살고 있는 만취당을 어렵게 찾아가니 반갑게 맞아주는 인심과 만취당의 모습을 노래하고 아울러 세대가 흘러감에 따라 촌수가 멀어지기는 했으나 본래 한 근원에서 나온 일가라는 사실을 새삼 강조하고 있다. 이 만취당에 걸려 있는 권상규(權相圭)의 기문을 보면, 이 만취당의 유래와 만취당 주인의 사적을 알 수가 있다. 영주에서 명승지를 손꼽을 때 동천(東川)을 으뜸으로 치는데, 동천의 위쪽 두암(斗巖) 동네의 만취당이 그 가운데 하나를 차지한다. 현재 이 만취당은 야트막한 야산의 아래 약간 도드라진 언덕에 자리 잡고 있는데, 당의 뒤로는 제법 오래된 소나무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고 당의 앞으로는 꽤나 넓은 들판이 펼쳐져 있어서 이 동네에 사는 사람들의 경제적 수준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만취당의 정면에 보이는 산이 무슨 산인지 확인은 못했으나 이 주위에서는 제법 높고 범상치 않은 기운을 느끼게 하였다. 그리고 들판 건너로는 봉화에서 내려오는 내성천(奈城川)이 관류하고 있어서 산수가 어우러진 명승의 사이에 이 만취당이 위치하고 있다. 연안김씨(延安金氏) 양진선생 김개국(金盖國)이 이곳에 머물며 강학하고 인격을 도야했는데, 당 앞에 수백 그루의 소나무가 있기 때문에 만취라고 당호를 지었다고 한다. 아마도 『소학(小學)』에 보면 노공(魯公) 범질(范質)이 그의 조카인 범고(范杲)에게 경계로 지어준 시에 ‘지지간반송, 울울함만취(遲遲澗畔松, 鬱鬱含晩翠)’라고 하는 것이 있는데 만취란 이름이 여기에서 유래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런데 이 소나무는 다른 나무들이 지니지 못한 독특한 면모가 있다. 봄과 여름을 맞게 되면 온갖 나무와 꽃들이 화려하게 경쟁하듯 피어나지만 가을과 겨울을 만나 서리와 눈이 내리치게 되면 그전에 화려하게 경쟁하듯 피었던 나무와 꽃들은 모두 곧 영락해버려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다. 하지만 홀로 이 소나무는 봄과 여름이라고 하여 더욱 번영하지도 않고, 가을과 겨울이라고 하여 문득 영락하지도 않고, 사시사철 거의 그 모습을 바꾸지 아니한다. 참으로 평이하고 험난하며 곤궁하고 현달하여도 그 전개를 변하지 않는 군자의 기상과 절개를 지녔다고 하겠다. 그리하여 『논어(論語)』의 「자한(子罕)」편에서 공자는 ‘세한연후 지송백지후조야(歲寒然後 知松栢之後凋也)’라고 송백에 대해 극찬하고 있고, 공자 이래로 동양인들에게 비록 외적인 모습은 볼품이 별로 없다고 할 수 있지만 가장 애호되는 나무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아마도 만취당이란 당호는 이러한 의미에서 탄생된 것이 아닌가 한다. | |
- 돈암선생유집(遯庵先生遺集) | |
이 문집은 1814년(순조 14) 10대손 홍윤(弘胤) 등에 의하여 편집·간행되었는데 시 8수와 부록이 있다. |
관련인물 |
- 만취당 김개국 |
김개국(金盖國, 1548~1603)의 자는 공제(公濟), 호는 만취당(晩翠堂)이며, 연안(延安) 사람이다. 김몽득(金夢得)의 아들이다. 소고(嘯皐) 박승임(朴承任)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1591년(선조 24)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임진왜란 때에 고을의 의병장이 되어 많은 전공이 있었다. 강원 도사로 재직 시에는 감사인 정구(鄭逑)와 뜻이 맞아 밝은 다스림을 폈다. 충청 도사로 재직 시에는 감영이 명나라 군사의 길목이라 치다꺼리가 많았고, 감사가 병들어 집무를 못하자 공이 대리하여 일을 처리함에 조리가 있었다 한다. 생활에 늘 검소하여, 도사로 있으면서도 관이 남루하자 그의 친구가 새것으로 마련해 주었으나 받지 않았다 한다. 집 서쪽에 소나무 100그루가 있어 설한에도 푸르름을 사랑하여 만취당이라 편액하고 호로 삼았다. 너무 강직한 성격으로 만년에는 불우하게 살았다 한다. 저서로 『만취당집(晩翠堂集)』과 강원 도사로 있을 때에 일기체로 적은 『관동일록(關東日錄)』 1책이 있다. 삼봉서원(三峰書院)에 제향하였다. |
영주 > 이산권 > 신암리 | |
- 예안, 함창, 연안김씨의 집성촌, 신암리 | |
경상북도 영주시 이산면 신암리는 현재 1·2·3리로 나누어져 있고, 예안김씨, 함창김씨와 연안김씨들의 집성촌이 형성되어 있다. 신암리는 조선시대에는 영천군 말암면 지역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본리·신천리를 병합하고, 신천과 말암의 이름을 따서 신암리라 하고 영주군 이산면에 편입하였다. 신암 1리에는 삼봉골·얼음골·실내가 있으며, 2리에는 우금·머름, 3리에는 사금·미륵당·하고개·솔고개·속골·새터·새마·배진기 등의 마을이 있다. 신암 1리에 있는 삼봉골은 우금 북쪽마을로 마을의 좌면·우면·후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3개의 봉우리가 우뚝 솟아 있다 해서 삼봉골이라 불렸다. 실내는 삼봉골 북쪽 마을로 마을 앞에 큰 들이 있었는데, 대홍수로 제방이 유실되어 들이 하천 물길로 바뀌어 새로운 길이 형성되었다 해서 실내 혹은 신래라는 이름을 얻었다. 얼음골은 실내의 앞뒤 산이 수목으로 울창하고 내성천의 강바람이 불어와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이웃마을보다 얼음이 일찍 언다고 하여 얼음골이라 불렸다. 신암 2리에 있는 우금마을은 1620년경 한성부 좌윤을 지낸 두암 김우익이 개척한 마을이다. 마을의 앞산 줄기와 뒷산 모양이 천사가 거문고를 타는 형상과 같다 해서 우금이라고 하였다. 머름은 연안김씨 마을로 만취당 김개국이 지은 만취당 정자가 있다. 지난 날 이곳에는 지평 김위가 지은 갈수헌과 생원 김지가 지은 정안와, 생원 김구련이 지은 침금헌 등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 신암 3리에 있는 미륵당은 마을 입구에 미륵불이 있어 붙여진 동네로, 불당동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새터는 1783년경 신야 이인행이 개척했는데, 이인행의 호인 신야에서 신자를 따서 새터라 불렀다. 현재 신암리에는 두암고택과 만취당, 삼봉서원 구지, 신암리 미륵불상 등과 정도전의 아버지 정운경을 모신 문천서당과 모현사, 계서정 등의 유적들이 남아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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