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癸巳年) 두레골 성황제(城隍祭)
Ⅰ. 시작하면서
1. 유계 선생과 두레골
영주의 역사 기록은 취사(炊沙) 이여빈(李汝馪) 선생이 1625년에 편찬한 영주지로 부터 시작되었다고 보며, 근대사의 기록은 유계(幽溪) 송지향(宋志香) 선생이 1967년에 발간한 ‘영주향토지’로부터 출발하였다고 볼 수 있다. 필자가 최근 영주의 전설을 KBS 라디오를 통해 방송하고 있는데 청도 김씨 가문의 ‘대호 이야기’나 공주이씨 가문의 ‘천하명의 이석간’이야기 그리고 반남박씨 가문의 ‘서릿골 족제비의 보은’ 이야기 등 모든 전설이 영주향토지에 근거해 영주시사에 실렸고 인터넷으로도 널리 전파되었다고 본다.
유계 선생이 삼국시대부터 일제강점기 때까지 고을명이 이합·집산됐던 영주의 역사, 인물, 문화의 기록을 찾는 작업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참고 문헌마저 마땅치 못한 상황에서 ‘지금 우리에게 가장 절실한 것이 무엇인가’를 깨닫고 남긴 것이 ‘영주향토지’이다. 선생은 후세들에게 바른 역사의식과 교육을 위해 절대적인 업적을 남기신 분이라고 생각하며 감사와 경의를 드린다. 오늘 유계 학술발표회를 준비하면서, 선생께서 찾아 헤맸을 두레골 골짜기를 사진으로 찍어보기도 했고 서낭당 기둥을 어루만지면 금성대군을 추모하던 모습도 상상해 보았다.
2. 아주 별난 두레골 성황제
성황제는 우리나라 전통 민속 중의 하나로 매년 음력 정월대보름을 전후하여 마을을 지켜준다는 성황신(서낭신)께 드리는 대동제(大同祭)이다. 우리고장 순흥(順興)에도 18마을에 18개 서낭당이 있어 예외 없이 두레풍습의 일환으로 성황제를 드리고 있다. 특히 순흥초군청 성황제의 특이한 점은 제의(祭儀) 대상이 두 곳이라는 점이다. 정월 열사흗날(음1.13) 오전 7시(辰時)경에는 순흥고을 주산(主山)인 비봉산(飛鳳山)을 진혼신(鎭魂神)으로 삼은 본당(本堂)에 제사를 올리고, 이어 보름날 (음1.15 子時)에 두레골에 모신 만고충신이요 절의(節義)의 상징인 금성대군(錦城大君)을 모신 상당(上堂)에 다시 대동제를 올린다. 제물은 다른 지방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황소이며, 이때 희생(犧牲)을 양반(또는 어른)으로 의인화(擬人化)해 제물로 드리는 것이 특이한 점이다. 두레골 성황제가 이처럼 특별한 것은 비운에 승하하신 단종대왕을 기리며 왕위 복위에 앞장섰던 금성대군을 신(神)으로 모셨기 때문이다. 두레골 성황제에 대한 많은 연구와 기록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세월이 흐르면서 전통이 조금씩 변천하고 있다는 사실 또한 간과(看過)할 수 없다. 그래서 두레골 성황제의 2013년 현재의 제의를 관찰하고 기록하여 역사에 남기고자 한다.
두레골은 현 행정구역상 경북 영주시 단산면 단곡3리(웃질막)로 되어있다.
두레골은 자재기재를 넘어 좌석, 고치령으로 통하는 길과 국망봉으로 오르는 길, 그리고 점마재를 넘어 배점으로 가는 분기점에 위치하고 있다. 몸을 숨겨야 하는 집단의 경우 유사시 퇴로가 확보된 지리적 요충지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기에 일제 강점기에는 의병과 광복군들이 여기를 거점을 활동했고 6,25 전에는 빨갱이들이 이곳에 은둔해 있다가 밤이면 민가에 내려가 만행(蠻行)을 저지르기도 했던 본거지 이다. 1949년 가을 소백산 빨갱이들이 단산면 병산리 행갈마을에 내려가 사람을 죽이고 마을을 불질러 행갈마을을 풍비박산(風飛雹散)내기도 했던 역사도 있다.
두레골 성황제의 유래는 단종복위 거사를 도모하다 죽임을 당한 금성대군의 혈석(피묻은돌)에서 부터 시작된다.
이튿날 마을 사람들이 죽동 냇가를 뒤졌더니 과연 그 돌이 발견되었고 이 혈석을 가까운 죽동 서낭당에 안치하게 되었다.
그래서 금성대군의 혈석은 소백산 국망봉 바로 밑 두레골로 옮겨서 모시게 되었는데 이 때 이 일을 주관한 사람들이 바로 상민(常民) 자치기군인 순흥초군청이었다.
혈석을 두레골에 모시니 이곳에는 원래 있던 산신각과 금성대군당(상당). 이렇게 두 성황당이 서로 마주보며 서 있게 되었다.
순흥초군청은 매년 정월보름날 성황제를 올리는데 제례의 의식이 성대하고 아주 특별했다.
우리나라의 여러 성황제 중에서 제물로 황소 한 마리를 통째로 바치는 곳은 이 곳 뿐이라고 한다. 소를 잡아 진설할 때까지 과정이 아주 길고도 정중하다.
제관의 집에는 금줄을 걸고 잡귀의 근접을 철저히 차단한다. 이 기간동안 여성의 순흥 방문은 절대금하고 있는 것 또한 특이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다가 정월 초팔일이 되면 제물로 바칠 황소 한 마리를 선정하게 되는데 2013년에는 단산면 사천2리 띄기마을 한우축사의 황소로 선정됐다. 이를 ‘어른모시는 날’이라고 하고 황소는 거세하지 않은 튼실한 어른으로 정해야 한다는 원칙이 있다. 어른이 정해지면 한지 전지에 ‘근봉(謹封)’이라고 써서 소등에 붙이고 이날부터 좌상 부부가 아침‧저녁으로 띄기까지 가서 문안 재배하고 쇠죽(식사)을 올린다. 지금도 소 한 마리를 제물로 바치려면 많은 비용이 드는데 그 당시 소 한 마리를 마련 한다는 것은 순흥사람 모두가 성심을 다해 성금을 모았을 것으로 보인다. 이는 금성대군에 대한 숭모 열기가 대단했다는 것과 순흥 사람들이 대동․·단결하는 제례였음을 알 수 있다. 2013년 어른 모시는 비용은 6백만원 정도인 것으로 알려졌다.
순흥초군청이 14일 밤 12시(보름날 0시) 두레골 성황제를 지내기 위해서 음력 13일 비봉산 본당제를 먼저 지내야 된다. 정월 13일 해 뜰 무렵 초군들이 성심을 다한 성스러운 불(이하 성화, 聖火) 상자와 제수를 지게에 지고 비봉산 본당에 오른다.
그리고 신위 뒤쪽에 가로로 만든 횃대에 폐백을 드린다(건다). 신위에 올리는 의례에서 고깔은 관(冠)을 뜻하고 실타래는 장수(長壽)를 의미하며 폐백은 신에게 올리는 예물이다. ‘순흥안관성황신위’란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손병연 본당주인은 “순흥의 여러 성황신 중 가장 높은 신위”라고 했다. 여기서 드리는 폐백은 한지를 15Cm 너비로 접어 횟대에 걸어두는 것이다.
(維歲次 癸巳正月丁未朔十三日己未 慶州孫炳然 敢昭考于 飛鳳山順興本堂神靈謹以仰告 順興都護府太平安寧尙饗)
어른을 모신 후 성황당 마당에 불을 피워 추위를 녹히는데 요즘 학생들이 야영수련할 때 캠프파이어 하는 것과 같이 장장 18시간 동안 캠파이가 계속된다.
시계가 없던 당시 제의 시작 시간은 정원대보름달이 상당 앞 나뭇가지에 걸리는 나무시계를 사용했다고 한다.
좌상은 희생제물 외 제수(기제사와 같음)를 마지막으로 진설하고 나면 시각은 밤 12시에 이르고 제례가 시작된다.
초헌관(좌상 김낙임)의 삼상향과 참신에 이어 초헌례를 올린 후 모두 부복하면 축관(박종찬)이 독축을 한다. 축문은 다음과 같다.
유세차 계사정월정미삭 십오일신유 의성김낙임 감소고우 소백산두레골신령근이앙고 단종조충신금성대군정민공 절의충절여만고강상 순흥도호부초군공신전헌상향
(維歲次 癸巳正月丁未朔十五日辛酉 義城金洛林敢昭考于 小白山頭來谷神靈謹以仰告 端宗朝忠臣錦城大君貞愍公 節義忠節餘萬古綱常 順興都護府樵軍恭伸奠獻 尙饗)
아헌례(본당주인 손병연)와 종헌례(손기영, 박종찬, 임병상) 그리고 특별례로 김진영
부시장과 김정현 소수서원관장이 헌작했다. 첨작례, 유식례, 진다례를 올리고
제배한 후 헌관과 참제자들이 소지를 올렸다. 18년 째 성황제를 주관한 손병연
기원했다. 수 백장의 소지가 상당 처마를 타고 오르니 아주 특별한 성황제임을
제례가 끝난 후 김낙임 좌상은 취재진과 인터뷰에서 “두레골 성황제에 영주시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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